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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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구름에 달이 숨었다 드러나길 반복하던 조용한 밤은, 어느새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곧 열린 창밖으로 비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항구와 민가 사이의 허름한 객잔 이층.
열린 창가로 곧 바다의 비릿한 내음과 함께 흙먼지 머금은 촉촉한 물 내음이 흘러들어왔다.
그런 열린 창문밖에 뿌려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한숨짓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누구도 아닌 모용승겸.
“하아···.”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리 한숨을 뿌려대는 이유는 결코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삼합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음에도 그곳으로 찾아가 입회를 희망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궁 가주가 굳이 딸이 있는지 물어본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남궁가의 가주인 검왕의 발걸음을 쫓아 도착한 복주.
복주에서 검왕이 묵고 있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해 보타암의 검후와 아미파의 장문인이 얼마 전 복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복주 바닥에 파다하게 퍼져있었고, 검왕이 둘의 싸움에 대한 중재를 맡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
그렇기에 무사를 풀어 확인해본 결과 검왕이 장기간 묵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곳은 복주에서 가장 큰 반점이라는 류가 반점.
모용승겸은 무사들에게 곧바로 류가반점 주변 감시를 지시했고, 이어 들려온 무사들의 보고에 바로 그곳이 삼합회의 근거지이거나 그중 하나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인도, 점소이도 온통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이상한 반점.
반점의 모든 사람이 여인이라는 말에 남궁세가 가주가 자신에게 물었던 말이 곧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혹시 그러면 모용 가주, 따님이 있으셨던가요? 딸이 있어야 이야기라도 한번 해볼 것 같아서···.’
주인과 요리사 하나가 남자라는데 그들의 모습은 요 며칠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고, 여인들만 오고 가니, 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이상한 반점은 분명 삼합회가 운영하는 비밀 반점이 분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그런 모용승겸의 생각에 확신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아미와 보타암의 문주에 관한 일이었다.
아미와 보타암의 문주들이 벌인 싸움의 중재를 맡은 검왕이, 굳이 황산의 남궁세가가 아닌 이 복주의 류가 반점으로 두 문파의 장문인을 부른 점이 묘하게 상황에 들어맞았던 것.
황산에서 맞을 손님들을 굳이 연고도 없는 이 복주의 류가 반점으로?
여인이 있어야 입회할 수 있다는 말과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기묘한 반점.
그리고 여인들로 이루어진 두 문파의 방문.
문파의 두 장문인이 류가반점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으니, 그러니 이곳은 아마도 삼합회의 비밀 근거지 중 하나가 아니라 아마도 본거지.
분명 류가반점은 삼합회의 본거지일 확률이 높았고, 확실히 이상한 점들을 모두 삼합회와 엮어보면 그 이상한 점들이 확실히 이해되었다.
아미와 보타암의 장문인이 싸운 것부터 이상한 일이었는데, 이해 안 되는 말들을 하면서 칼을 뽑은 것도 그렇고, 십오 년 전 일로 싸운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이런 이해 안 되는 부분에 삼합회를 집어넣으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까.
두 문파의 장문인이 몰래 움직이면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이더라도 하오문이나 개방에 눈을 피할 수 없을 테고, 결국 걸리면 삼합회의 근거지를 들킬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개싸움을 벌이고 중재라는 핑계를 들어 한곳에 대놓고 모인다면?
완벽히 다른 이들을 속일 수 있는 것.
저들은 지금 천하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류가반점은 아마도 여인이거나, 여인을 통해서만 또는 여인을 볼모로 해야 입회할 수 있는 그런 비밀회.
그곳에 아미와 보타암도 입회한 것이 분명했다.
모용슴겸은 고개를 돌려 다른 침상에 잠들어있는 자기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계집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구나···.’
똘똘한 아들이라 태어날 때 그리 기뻐했는데, 이제는 계집아이 하나만 못한 상황.
모용승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이러면 양녀(養女)라도 들여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비가 들이치기 시작하는 창문을 닫았을 때였다.
-끼익.
-똑···. 또옥.
창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순간 머릿속에 그 물방울 소리가 들리지 말아야 할 방안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모용승겸은 생각을 이을 겨를 도 없이 일엽락(一葉落)을 펼쳐 재빠르게 몸을 틀었다.
일엽락은 무림 일절로 평가받는 최상의 신법.
승겸이 몸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옆으로 움직이자, 느끼지도 못했던 누군가의 손아귀가 모용승겸의 허리춤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촤악!
“크흑!”
“칫···.”
그리고 들려오는 습격자의 아깝다는 음성.
모용승겸은 곧바로 자신의 검을 찾았으나, 검은 아들과 함께 침상 쪽에 놓여 있던 상황.
그 사실을 떠올렸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인 습격자가 아들의 마혈과 수혈을 짚고, 자신을 향해 어림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엄청난 빠르기! 대, 대체 누가!?’
아들이 순식간에 인질이 되어버린 상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엄청난 신법의 상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빠르기로 따지면 자신보다 한 수 아니 두수 위.
모용승겸은 일단 몸을 빼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까지 잡혀버린다면 가문의 평안은 없을 테니까.
아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어리석게 싸우다 가주인 자신이 잡혀버린다면 가문은 그대로 끝이 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모용승겸은 습격자를 향해 지풍을 쏘아대고는 곧바로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슈슈슉!
손에서 쏘아진 지풍이 습격자를 향해 날아들고, 그 지풍을 피하려 습격자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와지끈!
모용승겸은 닫혀있던 창문을 그대로 때려 부수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회전해 충격을 줄이며, 비로 젖은 땅바닥에 굴렀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보통 때라면 체면 때문에 하지 않았을 동작.
그때!
-척.
한쪽 무릎을 꿇고 일어나려는 승겸의 바로 코앞.
빗방울 떨어지는 어두운 골목임에도 눈에 들어오는 여인의 신발과 옷.
곧이어 빗줄기가 뿌려지는 시끄러운 소리를 뚫고, 기이하게도 나직하고 조용한 여인의 목소리가 승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쏴아아아아.
“너무 소란을 피웠습니다.”
빗속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젊은 여인의 목소리인데도 모용승겸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인 순간 곧바로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거력이 코앞에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
고수!
떨리는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눈에 들어 온 것은, 자기의 이마를 향하고 있는 여자의 손이었고.
엄지로 눌러둔 그녀의 중지가 펴지며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쩌억!
“꺼훕!”
***
미미가 사전에 확인해두었던 허름한 객잔 앞에서, 감시자들의 배후로 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를 제압한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켜지기 시작하는 등불들.
창이 터져 나간 소란스러운 소리에 주변 민가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더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인지 좀 나가보슈.”
“무슨 일이 났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와 밝아지는 주변에 청이가 당황할 때.
-찰박.
이층의 터져나간 창문에서 사람 하나를 어깨에 맨 미미가 바닥으로 뛰어내리고는 젖은 두건을 벗어냈다.
그리고 청이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가자! 청아! 이러다 들키겠어!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서 한 번에 제압을 못 했더니···.]
[아, 알겠어요!]
그렇게 미미의 다급한 목소리에 청이와 미미가 이마에 큰 혹이 난 남자와 미리 제압해둔 두 남자까지 더해, 총 네 명의 남자를 각기 두 명씩 나눠 어깨에 걸쳐 맺을 때였다.
-벌컥.
근처 민가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얼굴을 내민 남자와 청이, 미미의 눈이 그대로 마주쳤다.
미미는 잠행복을 입고 있지만, 두건을 벗은 상태였고 청이는 천으로 하관만을 가린 상태.
그러나 머리카락과 피부 때문인지 상대방은 미미보다 청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어!? 류가반점 류대인의 부인께서 어찌?”
그 말에 미미와 청이가 당황해 서로를 바로 볼 때였다.
-철벅! 철벅! 철벅!
-철컹. 철컹. 철컹.
“이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지 살펴라!”
“예, 아장 어른!”
꺾어진 골목 너머 그리고 주변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관병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
낭패였다.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들킨 것은 둘째치고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부터 관병들까지.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청이, 또 사람을 둘이나 매고 있는 데다가 청이를 두고 갈 수도 없어 난처해진 미미가 당황해 서로만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문을 열어 청이와 미미를 확인하고 눈을 끔뻑거리던 남자가 관병의 소리에 얼른 자기 집 문을 크게 열고는 둘에게 나직이 외쳤다.
[부인! 이쪽으로!]
[예!?]
[얼른 이리로! 곧 관병들이 들이닥칩니다.]
청이와 미미는 일단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양쪽 어깨에 둘러멘 채 호의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집으로 재빠르게 들어섰다.
-끼이익. 쿵!
그렇게 문이 닫히자 남자가 둘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도부행(挑夫行)의 수장 조풍 어른 밑에 있는 위보헌이라 합니다. 저번처럼 그, 나쁜 놈들인 것 같은데, 이거 그것이지요? 그 뭐더라? 수연(水燕)? 수수연(水手燕)?”
도부행의 수장 조풍이라면 노공인 류청운과 친분이 있는 사람.
그 밑에서 일은 보는 자인 모양인데, 수연, 수수연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노공께서 가르쳐주신 물수제비? 수제비? 뭐 그것을 하려고 이 나쁜 놈들을 잡아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청이가 이미 들통나버린 정체에 얼굴의 천을 내리고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아, 위대협이셨군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예, 그, 그렇습니다. 저희 반점 주변을 기웃거리기에 잡아가 대체 왜 그랬는지 알아볼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물음에 입을 가린 천을 내리며 청이가 재빨리 대답하자, 청이의 말에 그걸 다 말하면 어쩌냐고 미미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들켜버렸으니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것.
그런데 미미의 걱정과는 다르게 의외로 뻔뻔한 것은 잘 먹혔다.
청이의 말에 위보현이라는 남자가 분노했으니까 말이다.
“류가반점을 기웃거렸단 말입니까? 이런 나쁜 놈들을 봤나!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아, 그리고 대협은요. 그냥 위가라 부르십시오. 그나저나 이거 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겠군요? 이번에는 얼마나 멀리 던지시려나. 크헤헤.”
다행스럽게 그간 노공께서 베푸신 일 때문에, 청이나 미미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위보현.
청이와 미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그러나 안심한 것도 잠깐.
둘의 마음을 다시금 어지럽히는 시끄러운 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소,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다 일어났는데, 창은 박살이 나고, 안에 묵던 손님 둘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제법 부유해 보이는 손님들이었는데···.”
“뭐라!? 아(牙 인신매매꾼) 놈들인가!? 듣거라! 소리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봐라! 사람을 끌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
“예, 아장 어른!”
그리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등롱이 움직이는 불빛이 보이고, 쿵쾅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관병이니 문을 열어라! 근처에서 사람이 없어졌다니 안을 살피겠다!”
“어, 어쩌죠 미미 언니?”
“나,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보통 이러기 전에 내빼는데···.”
확 터진 곳이라면 유인이라도 해보겠지만, 집 안으로 들어와 사방이 막힌 상태.
잡아 온 놈도 둘이나 되는지라 청이와 둘이 몸을 뺄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들을 도우려던 위보헌이라는 자가 모든 일을 뒤집어쓸 테니까.
-쿵쿵쿵!
-찰박. 찰박.
그렇게 점점 다가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
물 밟는 소리.
결국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더니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결국 관병들이 위보헌의 집으로 들이닥친 것.
-쾅쾅쾅!
“문을 열어라 관병이다! 문을 열어라!”
관병들의 목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청이과 미미가 다시금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