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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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장거리 외출에 들뜬 영영이의 목소리.
하지만 그것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미미가 빠르게 움직이는 통에 미미의 등에 찰싹 엎드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
그렇게 가련이와 나는 첫날부터 한 마리의 매미가 되어, 가련이는 청이의 등에 나는 미미의 등에 업혀 관도 옆을 날아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
“휴···. 힘들다.”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는 것이 힘든지 쉬는 시간 풀밭에 드러누워 버린 영영이.
같은 나이의 무인 중에서는 손에 꼽는다는 영영이도 다른 세 명의 부인에 비하면 가냘프고 가녀린 포지션.
영영이가 아무래도 무력이 제일 빠지니 영약이라도 좀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허약한 무림인에게 보약 같은 존재가 영약이니까 말이다.
‘허약한 자식 둔 부모님의 마음이 이럴까? 아무래도 넷 중에 제일 허약(?)하니까.’
“영영아, 힘들면 내가 영약이라도 좀 구해볼까? 처가에 좀 보내달라 해볼까?”
“영약요?”
“그래, 내공이 부족해서 힘든 것 같은데, 내공이 부족하면 영약을 좀 먹으면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내 말에 배시시 웃은 영영이가 대답했다.
“저도 같은 나이대의 무림인에 비하면 약한 건 아닌데, 청이나 소소, 미미 언니가 너무 대단해서 그래요. 그리고 말씀은 고마운데 저희 당문은 영약 효과 보기 좀 힘들어요.”
“응?”
“영약보다는 독약이 더 내공을 많이 올려주거든요. 정 힘들면 본가에 가서 그걸 해야 하는데···.”
“그거?”
그거라는 말에 되묻자 영영이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거 있잖아요. 아버지가 하시던 거. 독물로 목욕하고···.”
“아, 개소주?”
“개소주?”
당문에서 실력을 올리려면 예전에 당가 장인이 했던 것처럼 인간 개소주를 달여야 한다는 대답.
무심코 튀어나온 개소주라는 말을 주워 담았다.
“아, 아니다. 그 독물에 목욕하는 그것을 말하는구나?”
“네, 그걸 하면 내공도 많이 늘어나고 입문만 해도, 살기 대신 독기가 조금씩 흘러나오며 또 대성하면 독인(毒人)이 될 수도 있다는데···.”
아무래도 당문이다 보니 영약보다는 독이 더 효과가 좋고, 극성에 이르면 무협 소설에서처럼 독인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좀 꺼려진다는 말투.
왜 꺼려 하나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 아니었다.
‘화낼 때마다 독기라니. 그거 완전···. 방구차잖아?. 아무리 무공도 좋다지만 방구차는 아니지. 아무렴.’
당문의 무공을 더 심화하면 영영이가 방구차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
마음속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할 때 영영이의 대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프고, 힘들기도 그런 걸 다 떠나서 또 독기를 막 뿜어내면 가가한테도 좋지 않고···. 극성에 이르면 된다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뭐···. 그냥 이렇게 살아야죠.”
무가의 여인답게 무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닌데, 결론은 그런 문제를 다 떠나서 내 생각에 배우지 않겠다는 대답.
‘영영이 너도 다 생각이 있었구나?’
영영이가 저런 속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단무지’로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맛있는 거만 먹여주고 예뻐해 주면 그냥 신이 나는 아이인 줄 알았으니까.
“그, 그렇구나?”
“네. 당가가 데릴사위만 받는 것도 당문의 비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당가 여식의 독기를 받아 사위가 단명(短命)할까 봐 그런 것도 있다고요. 그래서 당문의 독에 견딜 당문의 무공을 사위한테도 가르쳐주는 거고···. 하지만 가가는 그게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고맙구나. 영영아.”
속 깊은 영영이의 배려심.
허약한(?) 영영이를 잘 돌봐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풀밭에 누운 영영이의 이마를 쓸어주자 영영이가 다시 한번 배시시 웃었다.
***
우리의 여정은 복건 중앙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남평(南平)에 위치한 광동, 강서, 절강으로 향하는 교차로에 놓인 도시 남건주(南唐州)를 시작으로 닷새를 더 서북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목포로 했던 길주 여릉(廬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정이 조금 늦어진 이유는 역시나 영영이 때문.
무한 내공 청이와 미미의 조합으로 가는 기간을 최대 사흘로 잡았는데, 허약한 영영이가 끼었으니 더 속도를 낼 수는 없었던 것.
영영이의 내공과 경공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 짜증을 내거나 그러지는 못했다.
날 위해 무공도 더 배우지 않겠다는 녀석의 마음에 좀 감동해버렸기 때문.
저 멀리 성문이 보이기에 내 등에 업힌 영영이에게 물었다.
“영영아, 다 도착했으니 내려보겠느냐? 저 멀리 성문이 보이는구나.”
영영이가 내 등에 업혀 있는 이유는 도착을 얼마 안 남기고 힘들다고 했기 때문.
등 뒤에서 영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요?”
그리고는 내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영영이.
“휴···. 드디어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리느라 힘들었었네. 어서 쉬고 싶어요. 가가.”
“그래, 어디 한번 괜찮은 객잔을 찾아보자꾸나.”
“향수행도요!”
“그래. 알겠으니 가보자꾸나.”
여릉은 내가 첫 객잔을 열었던 심우현과 같은 현급의 도시였는데, 산 아래 흐르는 강을 낀 아주 고즈넉한 도시였다.
그러나 성문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여릉은 아주 많은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자, 게 사세요. 복주에서 들어온 싱싱한 게입니다.”
“남호해(南湖蟹)에서 들여온 게가 아주 쌉니다!”
“소흥하해(紹興河蟹)를 바로 세수해로 만들어드립니다!”
게 요리 대회가 열려서 그런지 성 입구부터 수많은 노점이 여러 가지의 게들을 팔고 있었으며, 구경을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마을 내부가 아주 바글바글했다.
“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가가.”
“그렇구나. 다들 흩어지지 않게 꼭 붙어서 움직이자꾸나.”
“네, 노공.”
그렇게 한참을 이동할 때였다.
저자 한쪽에서 노오란 열매를 파는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응? 저건.’
“감귤(柑橘) 팔아요! 감귤이 아주 쌉니다!”
감귤이라는 말에 전생에 먹던 귤이 생각났다.
전생의 귤이란 추운 겨울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은 채 까먹는 것이 국룰인 과일이 아니던가?
추운 겨울 박스로 사다 둔 감귤이 없으면 겨울을 날 수 없는 법.
지금이 겨울은 아니지만 예전 생각이 나 그쪽으로 일행들을 끌고 다가갔다.
긴 여행으로 지쳤을 때는 비타민만큼 좋은 것이 없기도 하고.
“객잔을 찾기 전에 저쪽으로 가봅시다.”
“아! 감귤이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과 동시에 영영이의 코에 감귤의 냄새가 흘러들었는지 영영이가 기쁜 목소리로 반응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드러나는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노란 몸통.
‘응? 뭐냐?’
그런데 감귤(柑橘)은 내가 생각했던 귤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감귤이 아니라 난데없이 오렌지였던 것.
감귤이라니 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대의 감귤이라는 명칭은 오렌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것 같았다.
전생의 오렌지는 등자(橙子)라 불렀지만, 송 시대의 감귤은 오렌지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었던 느낌.
귤과 오렌지의 원산지가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대로 알려져 있고 재배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니, 송 시대에도 당연히 오렌지가 있을 수 있는 법.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감귤 얼마요 주인장?”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한 개에 철 전 다섯 개입니다. 무척 싸지 않습니까?”
‘싸기는 이 새끼가? 아이고 더럽게 비싸구나.’
송 시대 자연재해나 기근으로 관에서 구휼을 베풀 때, 4인 가족을 대상으로 정해져 있는 구휼(救恤) 비용이 철전 스무 개.
이건 정말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생활비로 밥만 두 끼 먹는 것을 기준으로 하니. 보통 사오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가 철전 마흔 개 정도라고 보는데, 오렌지 한 개에 철전 5개면 과일치고는 엄청난 가격.
그 가격에 움찔하자 옆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귀(貴)!”
‘영영이 너란 아이는···.’
단순하지만 역시 단순해서 그런지 한결같은 영영이.
영영이가 주인장에게 비싸다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가, 아까 보니깐 조기 앞에서 철전 3개에 팔더라고요. 거기로 가봐요···.”
“영영, 그런 곳이 있었나요? 윽.”
미미가 눈치 없이 물었다가 청이의 팔꿈치에 찔리고, 우리가 뒤로 돌자마자 주인이 허겁지겁 외쳤다.
“여, 열 개사면 저도 철전 세 개 그러니까 모두 철전 서른 개에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미소를 지으며 뒤로 돈 영영이가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말했다.
“스무 개.”
***
오렌지를 까먹으며 객잔을 찾아 돌아다닌 우리는 얼마 안 돼 꽤 괜찮은 객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객잔에 자리를 잡은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향수행에서의 목욕.
그리고 목욕을 끝마치고 저녁때가 되기 전 제갈각 숙부께서 보내주신 추천서를 들고 먼저 구양수 어른의 본가를 찾아뵙기로 했다.
대회는 아직 열흘 정도 남았다지만, 가서 인사도 박고 샤바샤바도 하고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뭐 반쯤 내가 내정자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인사는 해야지.’
그렇게 추천서와 추천서를 써주신 제갈각 숙부님의 조카인 청이를 대동하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주인장, 구양문충공 댁이 어디요?”
객잔을 나서며 주인에게 구양문충공 댁이 어디인지를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경연 구경을 오셨나 보군요? 아직 경연은 열흘 정도 남았는데 그날은 사람이 많아질 테니 지금 구경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를 지나 북쪽에 가장 큰 집이고, 사당은 그 뒤에 있습니다.”
“아, 고맙소.”
그렇게 위치를 알아내 저자를 지날 때였다.
“노공, 선물은 아까 샀던 감귤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선물?”
갑자기 선물을 사자는 청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청이가 입을 살짝 가리고 전음을 보내왔다.
[고관대작들 댁에 갈 때는 보통 과일을 많이 선물하거든요. 회뢰(贿赂)로 과일이 제일 좋은 선물입니다. 잘 보아달라는 그런 의미로···.]
희뢰는 뇌물을 뜻하는 중원어.
‘아, 추천장을 받고 가긴 하지만, 고관대작의 집에 갈 때는 와이루가 예의이니, 감귤을 사 가자 이런 건가?’
뇌물에 대해서 잘 아는 청이의 모습에 ‘설마 제갈각 숙부님도?’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뭐 그 정도는 사람 사는 데 다 필요한 급행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소. 그러면 감귤을 사서 갑시다.”
“네, 노공.”
그렇게 바구니를 하나 사서 아까 영영이가 탈탈 털어버린 감귤 장사에게 감귤을 다시 구매했다.
그리고 그 바구니들 든 채 구양문충공의 댁을 찾았다.
구양문충공의 댁은 연성공형님 댁처럼 손님이 끊이질 않았는데, 사당에 참배하러 오는 참배객들과 요리 경연 때문에 몰려든 식객들로 세가 내부가 북적북적했던 것.
경비를 서던 무인에게 동경 제갈각 어른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며 안쪽에 기별을 넣어달라 부탁하자 우리는 곧 접객당으로 안내되었고, 그 안에서 제갈각 숙부 또래의 남자 하나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나 구양발(歐陽發)이라 하네, 자네가 류청운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류청운이라 합니다. 이쪽은 제 부인인 제갈청이고요. 여기 이건 선물을 조금 준비했습니다.”
“처음 뵙겠어요. 제갈청이라 합니다.”
“그래, 반갑네. 둘 다. 내 친우인 각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그리 요리를 잘한다고? 부디 아버지의 제에 올릴 좋은 게 요리를 부탁하네. 그러면 내 손님들로 바빠서 그럼 이만.”
“예? 어 저기···.”
제갈각 숙부의 친구라면서 뭔가 바로 끝나버린 대면.
당황스러운 모습에 그를 잡으려 했지만, 구양발이라는 사람은 횡 하니 사라져버렸다.
내가 사 온 감귤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고, 문전박대나 마찬가지인 상황.
“뭐지?”
“그, 그러게요? 노공.”
아무래도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느낌.
그 모습에 나와 청이가 당황할 때 문이 다시 열리며 누군가가 접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청운이!”
“어!? 어르신!”
나를 향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한 사람은 소식.
소동파 그 양반이었다.
“이 사람 잘 있었는가? 청이도 잘 있었느냐?”
난데없는 소동파의 등장.
지금이라면 동경의 황제 밑에서 구르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의외의 장소에 나타나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