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7화 (327/344)

천일취(天日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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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들 나가 보세요.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으니.”

“예, 비연님.”

“알겠습니다. 비연님.”

싸늘한 비연의 음성에 천검자의 옆에서 수발을 들던 네 기녀들이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자 방안에 남은 것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천검자와 똑같이 비연의 옆에서 정신이 혼미해져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운 류청운 둘뿐.

둘에게 백일취를 가장한 천일취(天日取))를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먹였으니,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일취를 가장한 천일취(天日取))를 마시게 했을 때는 얼마나 떨리던지···.

“어, 어르신 백일취랍니다. 한번 드셔보시지요.”

“어허 백일취! 여기 백일취가 있었나!? 사람대접할 줄 아는 곳이구먼. 어서 줘보게!”

-쭈욱.

-꼴깍.

“응!?”

비연이 따라준 백일취, 그러니까 실제로 천일취 한잔 입에 머금은 천검자.

술맛을 본 천검자가 멈칫하며 비연을 바라봤다.

왠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시선.

‘거, 걸렸나?’

그 시선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때 천검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백일취. 좋구만! 이상하게 술이 더 달아.”

‘휴···. 안 걸렸구나···.’

처음에는 걸릴 줄 알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천검자는 술을 즐기는지 주독을 내공으로 빼내지 않고 술을 즐겼고, 거기에 옆에 앉혀둔 기녀들에 빠져 정신이 없었기에 백일취를 가장한 천일취 의심 없이 받아마셨다.

그렇게 비연의 모험은 성공적이었고, 천일취에 취한 천검자를 바라보며, 비연이 이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검자 어르신? 저는 정말 혼례를 못 올리나요?”

그렇다, 비연이 류청운과 천검자에게 큰 위험을 무릅쓰고 천일취를 먹인 이유.

그것은 바로 아까 천검자가 봐준 점 때문이었다.

혼례를 올리지 못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는데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어르신, 정말 제가 혼례를···.”

“으헤헤. 그래 초월이라고? 자자 한잔 더 따라보거라. 아이고 안주를 입에 넣어주니 더 달구나. 아이야 천기는 너무 누설하면 큰일이 나는 것이니 더는 묻지 말거라.”

해서 술자리에서 몇 번 답변을 유도했으나 천기가 어쩌고 하면서 말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물어보려 모험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연이 아까의 질문을 다시 하자, 식탁 앞에서 해롱거리던 천검자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푸히히. 너는 첩실이나 되면 모를까···. 네게는 혼례가 허락되지 않았느니라, 헤헤···.”

“왜! 나만!”

그 소리에 비연은 너무 억울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지금 모든 기녀들의 대모님이신 그분의 눈에 들에 어린 나이부터 기녀가 되었고, 기녀라는 신분에 거의 포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좋아하는 사람과 혼례를 꿈꿨었는데 이건 그런 꿈에 내려진 절망적인 선고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비연은 이대로 절망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성품상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던 것.

“아냐. 그래, 이건 점일 뿐이잖아? 당사자들 생각이 중요하지! 나도 바보같이 점에나 매달리다니. 내가 언제 점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원하는 건 모두 노력으로 얻어냈는데 말이야.”

그렇다.

그녀는 그 수많은 기녀 사이에서 자신의 노력만으로 어린 나이에 이 자리에 오른 자.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인데 점 따위에 의존하다니.

그런 이유로 그녀의 다음 선택은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남녀의 일이라는 것은 당사자들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동안 기루에서 배운 것이 그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시 아니더라도 그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비연은 류청운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회가 있으면 확인하고 싶었던 말인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으니.

“처, 청운님, 청운님은 제가 좋으세요. 싫으세요?”

-두근두근.

비연은 터질 것같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물었다.

언니들 몰래 이러는 것이 왠지 도둑질하는 것도 같았고, 그가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연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다리에 누워 얄밉게 바로 대답하는 류청운.

“크헤헤. 실엉.”

“뭐!?”

싫다는 빠른 대답.

비연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싫다고 했던 사내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 사내가 자신이 몰래 마음에 품은 사내였으니까.

“네!? 왜, 왜요! 제가 왜 싫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저 그···. 나쁘지 않잖아요? 서, 설마 기녀라서 싫어요? 그래요? 하지만 저 기녀라도 아직 수, 순백지신이에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많이 도와드렸는데?”

혼례도 못 드린다는데 마음에 품었던 류청운도 자신을 싫어한다는 재빠른 대답.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비연이 질문을 와다다 쏟아내자, 류청운 다시금 피식거리며 말했다.

“우헤헤, 기녀라서 싫지는 않은데, 헤에···.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푸헤헤···.”

“스, 스타일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왜 싫은데요!? 정확하게 이유를 말해봐요. 이상한 소리 말고!”

다리에 누운 그의 머리를 흔들며 말하자 다시금 들려오는 대답.

그런데 대답이 뭔가 이상했다.

“헤헤···. 나는 그러니까 그 가슴 아니, 마음이 크고 넓은 사람이 좋은데···. 헤···. 비연은 그 마음이 좀 작고 좁다고 하까?”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넓고 큰데 자신을 매도하는 류청운.

비연은 화가 났다.

절대 자신의 마음 씀씀이가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특히 그에게만큼은.

“아, 아니 저도 마음 넓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작고 좁다니!”

-척.

그렇기에 분노한 표정으로 외치자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

비연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한 류청운에게 화를 내며 다그치자, 해롱거리는 류청운이 손을 들어 비연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행동인 줄 알 수 없었으나, 그 손가락이 묘하게 한곳을 가리키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잘 살펴보자 특정 부위를 가리키는 손가락.

그 의미를 알게 되자 비연이 절망했다.

“이, 이건!”

노력으로 뭐든지 이루어낸 그녀지만, 이건 노력이 불가능 했으니까 말이다.

“흐아아아아아아아!”

그런 이유로 기녀가 되고 한 번도 진심으로 울어본 적 없다는 비연의 울음이 한밤중 화화루 사 층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끄응···.”

머리를 뭔가로 처맞은 느낌.

묵직한 목덜미와 지끈거리는 두통은 덤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머리로 침상에서 일어서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자, 식탁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던 미미가 얼른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낭군님, 괜찮으세요?”

“으으···. 내가 어제 어떻게 찾아왔더라?”

어제 비연의 가게인 화화루에서 천검자 어르신과 술을 마시던 게 마지막 기억이니 아마도 필름이 끊긴 느낌.

어찌 된 일인지를 묻자 미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술에 취해 화화루 교송지의 등에 업혀 오셨어요.” 

“크으···. 그랬나? 미안하오. 미미. 천검자 어르신이 술을 계속해서 주시는 바람에···.”

-꼴꼴꼴.

“낭군님 여기 물이요.”

“크으···. 고맙소.”

주전자에서 미미가 따라준 시원한 우물물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나 말고 다른 한 사람이 궁금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천검자 어르신은?”

“아, 그···. 기루에서 주무신다고···.”

“크흠···. 그렇소?”

‘정말 노인네 적당히 할 것이지.’

잠까지 기루에서 자고 있다는 천검자.

아주 기루를 야무지게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시진이 어떻게 되오?”

“미시쯤 되었어요. 낭군님.”

“헐! 장사를 잊었구만!”

벌써 오후 한 시가 넘었다는 미미의 대답.

헐레벌떡 일어서 의관을 갖추려 하자 옆에서 미미가 옆에서 옷을 입혀 주며 말했다.

“남궁현 공자께서 가련이 그리고 소소와 함께 일하고 계시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아, 이거 형님에게 또 신세를 졌구만···.”

일단 형님이 알아서 하고 계신다니 조금은 안심.

하인들이 떠다 둔 물로 천천히 세수를 하고 막 밖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하인의 목소리.

“청운님, 화화루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화화루에서?” 

“예, 급한 일이니 화화루로 급하게 와주셨으면 한다고···.”

비연의 화화루에서 급한 일로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

미미가 나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무슨 일일까요?”

‘설마 기침하셨으니 해장이나 하자는 것인가? 아니지, 급한 일이라고 했지. 일단 빨리 가봐야겠군.’

“글세? 아마 천검자 어르신 때문 아니겠소? ”

“아아.”

“일단 내 금방 다녀오리다.”

“알겠습니다. 낭군님.”

그렇게 찾은 화화루. 

화화루 입구에 도착하자 뭔가 긴장된 표정으로 자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비연.

“비연, 무슨 일이요!?”

“아! 청운님! 아, 아니지. 흫! 에휴···. 나는 마음이 작은 여인···.”

비연이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가 갑자기 획 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 ‘완전히 삐졌어’라는 표정.

뭔가 이상했다.

비연이 아무리 서운한 게 있어도 나한테 이럴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

더군다나 급한 일이 있다고 불러놓고?

‘뭐지? 내가 어제 술 취해서 무슨 실수라도 했나?’

내가 어제 술에 취해 뭔가를 실수한 것이 분명한 느낌.

그러나 어제 기억을 더듬었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는 어젯밤의 일.

일단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급한 일이 있다고 했으니 그것부터 확인하려고 말이다.

“비연, 그런데 급한 일이 있다고?”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크, 큰일이에요. 처, 천검자 어르신이!”

“어르신이?”

당황한 얼굴을 한 비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4층의 방 안에 누워계신 천검자 어르신.

“끄응···.”

앓는 소리에 가까이 다가가자 어제 술자리에 날아다니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반송장이 되어있었다.

학질에라도 걸렸는지 덜덜 떨고 계신 어르신.

근처에 다가가자 후끈한 것이 열이 어르신의 몸에서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 어르신!? 괘, 괜찮으십니까?”

“아, 아이고 나 죽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림 고수는 어지간하면 잔병치레는 안 하는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그러자 뭔가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는 어르신.

“끄응···. 내 어, 어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못 할 말을 한 것 같구만. 시, 신병(神病)이···.”

“예? 신병?”

처음 듣는 단어에 옆을 바라보자 다시금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비연.

“이게 무슨 말이요. 비연? 비연은 뭐 아는 거 없소?”

비연에게 뭔가 아는 것이 있냐 물었지만, 비연은 새파랗게 질려 맹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뭔가 잘못한 걸 숨기는 듯한 느낌.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 정말이에요. 아, 아무것도 안 했어요! 무, 물어보지도 않았고요!”

‘뭐지? 설마!? 저번에 노인 둘의 목숨을 빼앗은 신메뉴인 육성환 세트 메뉴라도 대접했나?’

신병이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비연은 아마 자신의 접대로 병이 났다고 생각하는지 꽤 놀란 모양. 

일단 비연을 진정시키고 의원을 부르기로 했다.

“일단 장의문에 사람을 보내 약왕 어르신을 모셔야겠소. 진이에게 사람을 보내 천검자 어르신이 누워있다 알리시오. 내가 보냈다고 하고.”

“아, 알겠습니다. 교송지! 교송지!”

그렇게 장의문에 사람을 보내자 약왕 어르신이 허겁지겁 달려왔고, 천검자 어르신은 약왕의 손에 이끌려 장의문 입원행이 결정되었다.

“이분이 왜 이런 곳에서···. 에이. 일단 장의문에서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으니, 이분은 내가 모시고 가겠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부탁은 중원 무림의 어른이신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럼 나중에 보세.”

“나중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천검자를 등에 업은 약왕 어르신이 장의문 쪽으로 사라지고, 그렇게 어떻게든 처리된 소동.

멀리 사라지는 어르신을 배웅하다가 옆을 바라보니 아직 파리하게 질려있는 비연.

송장도 그냥 송장이 아니라 무당파 장문인의 송장을 치르는지 알고 놀란 모양이기에 비연을 안심시키기 위해 위로했다.

“뭐 그냥 나이가 많아 병이 나신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비연 탓이 아닐 테니.”

그러자 뭔가 생각에 빠져있다가 깜짝 놀라는 비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 그럴까요!?”

“그럼 저 정도 나이면 어찌 입선하셔도 다 자연사라고 할 수 있지. 아무렴.”

원래 저 정도 나이면 어찌 돌아가셔도 다 호상에 자연사.

비연은 무림에 높은 분이라고 서비스를 많이 했던 모양이고, 그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느낌인데, 그건 비연 잘못이 아니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 그런가? 그, 그럼 다행이긴 한데···. 아, 왜 자꾸! 이게 아닌데!”

비연은 뭔가 혼란스러운지 혼잣말하다가 나에게 또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 흥! 제가 뭐 걱정하든 말든 청운님께서 무슨 상관인가요? 저 같은 가슴 아니, 마음이 좁디 아, 작고 작은 여인이 걱정하든 말든 청운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조금 안심했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쏘아붙이는 비연.

뭔가 나에게 앙금이 생긴 느낌.

‘대체 뭐지? 무슨 자꾸 마음 타령이야?’

자꾸 자신은 마음이 작은 여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비연.

내가 어제 뭔가 실수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뭔가를 잘못한 것 같지만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상황.

무작정 사과하기보다는 그녀가 기분 좋아질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엉겁결에 사과했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세요?’ 패턴으로 나가면 사과 안 한만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거 우리 정점주님이 아무래도 뭔가 많이 놀라고 서운하신 모양이구만. 그러면 그 서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내 오늘 경연에 다녀오면 만들어주기로 했던 요리 두 가지를 만들어줄 테니 들어갑시다.”

그러자 아직 화가 덜 풀렸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비연.

“흥. 뭐 제가 그러면 어, 얼른 가자고 그럴 줄 아나요? 쳇. 제가 뭐 매번 기루 장사만 생각하는 줄 아시나.”

“아, 그럼 그냥 갈까나?”

“아니, 가라는 말은 아니고요!”

한번 살짝 겁을 주자 비연은 투덜거리면 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고, 아무래도 오늘 묵혀놨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쉬운 여자라니까? 기루 요리 2탄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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