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5화 (335/344)

상원절(上元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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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 하악···. 하악···.

가련이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침상 옆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물병을 손에 쥐었다.

-부들부들.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

떨림에 물이 가득한 물병의 물이 넘칠 것 같아 다른 손으로 물병을 같이 틀어쥐고서야 그 떨림이 잦아들었다.

“어, 어째서···.”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다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일이 꿈속에서 떠오르다니.

그것도 이리 선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이함 속에 무심코 다시 한번 꿈의 내용을 떠올리자 곧바로 떨려오는 몸.

가련이는 그 끔찍한 기억을 털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몸을 떨며 다시 물병을 손에 쥐어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음이 진정되자 다시는 그 꿈을 꾸지 않기를 빌며 침상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꿈의 여파로 잠은 오지 않았고, 다시 잠들기 위해서 한쪽에 조심스레 품어둔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렇지! 하나 더 있었지! 어디 있나 했구나. 너도 ‘진짜’니라 모든 복의 중심을 잡아 균형을 잡아주는 복! 이도 천생연분이로다!‘

도사님이 사모들의 점을 봐주시다가 자신을 스승님의 처가 될 것이라고 해주셨던 기억을 말이다.

도사님이 뭔가를 오해한 것 같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련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볼을 붉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설레는 기억이라 가슴이 뛰는 통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고,

다시 잠드는 데 한참의 시진이 필요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련아, 일어나야지? 가련아? 어전 가야지? 피곤한가?”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다, 당 사모!? 큰일이야!’

가련이는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인 당사모를 향해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사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도사님이 하신 실수에 눈치가 보이는데, 늦잠까지 자버려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흐아아. 다, 당 사모! 죄, 죄송해요.”

“아니야. 천천히 해. 피곤해서 못 일어났나 보네. 응? 땀? 이 땀 봐? 가련아, 어디 아파? 몸이 안 좋으면 가가에게 좀 쉬게 해달라고 말해줄까?”

“아, 아니에요! 더, 더워서 그래요. 바, 바로 준비할게요!”

새벽에 장을 보시는 당 사모에게 생선을 고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어전을 따라가기로 했었는데, 밤에 나쁜 꿈을 꾸다 보니 늦잠을 자버린 모양.

간밤에 한참 몸을 뒤척거린 후에야 진정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취할 수 있었지만, 좋은 기억을 꺼냈음에도 다시든 잠 속에서도 이런저런 이상한 꿈들로 밤새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아? 아픈 거 아니지?”

“예, 당 사모. 괜찮아요. 저, 정말이에요.”

“그래, 알았어. 어디가 크게 아프면 꼭 이야기해야 해? 내가 꼭 구해줄 테니까?”

“예? 크게? 구해?”

“아, 아냐 내가 꼭 도와준다고.”

오늘따라 좀 자신을 과하게 챙기는 당 사모.

가련이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얼른 얼굴을 씻고 당사모를 따라 어둠을 헤치고 저자로 향했다.

그렇게 모처럼 당 사모를 따라 새벽 어전에서 생선을 산 것을 제외하면, 오늘도 어제와 다음 없는 하루였다.

당 사모와 어전에 가서 황어를 사오고, 되돌아와 번을 서는 하녀들이 끓이고 있던 우육면을 확인했다. 

그 후에는 새벽부터 스승님의 명을 따라 요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오시쯤 쉬는 틈에 월희와 후원을 잠시 걸은 정도.

오늘도 하루가 어제와 같이 그렇게 저물어가나 싶었다.

“후, 힘들었다.”

스승님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말씀하셨다.

이제 마지막 손님의 마지막 요리 두 그릇만이 남은 상황.

재빨리 우육면의 면을 삶아 찬물에 헹궈 면기에 담아 남궁현 어르신에게 건넸다.

“어르신 면이 준비되었습니다.”

“아, 그래, 고맙다. 가련아.”

가련이에게 받아든, 면 위에 육수를 퍼 올리고 고기와 쪽파를 살짝 뿌린 남궁현 어르신.

가련이는 그사이 일곱의 어환을 그릇에 담아 육수를 적당히 부은 후 쪽파를 살짝 뿌려 멋을 냈다.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한치 틀림도 없이 완벽하게.

그때 남궁현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되었느냐?”

“예, 저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매부, 우육면 하나. 칠성어환 하나 완성되었네. 나가면 될 것 같네.”

두 그릇이 모두 준비되자 스승님을 부르는 남궁현 어르신.

“밖에 누구···.”

남궁현 어른에게 받은 쟁반을 요리를 내는 구멍에 올려둔 스승님께서 밖에 하인들을 부르려 하셨다.

그러나 스승님이 음식을 내는 구멍을 통해 밖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말을 멈추고 쟁반을 직접 드셨다.

아무래도 밖에 하인들이 모두 바쁜 모양.

가끔 이런 일이 있어 스승님이 직접 나가시곤 했는데, 가련이는 얼른 나서 스승님이 잡고 있던 쟁반을 반대편에서 마주 잡았다.

스승님이 이런 허드렛일까지 하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스승님, 직접 가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지금 하인들이 모두 바쁜 것 같아 내가 직접 가려고 하는데···.”

“그럼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스승님께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나?

이런 일은 제자인 자신이 해야지.

그렇게 가련이가 나서자 그 가슴 떨리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스승님.

“그래, 그러면 그래 주겠느냐?”

“예, 스승님. 제자가 그리하겠습니다. 스승님은 좀 쉬셔요.”

스승님의 미소를 볼 수 있었으니 나서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련이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띈 채, 혼자서 요리를 기다리는 손님의 테이블로 향할 때였다.

중간에 빈자리에 앉아 부엌 쪽을 바라보고 있던 손님.

가련이가 요리를 들고 가까워져 오자, 손님이 얼굴에 미소를 떠올랐다.

그리고 오른손 손바닥으로 자기의 옆머리를 슥하고 쓸어 넘겼다.

그 순간이었다.

어젯밤 꾸었던 꿈속의 장면과 지금 남자의 모습이 기묘하게 일치했다.

저 머릿속 어딘가에 꼭꼭 숨겨두고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 모숩.

저 뭔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미소와 손바닥 가장 안쪽으로 자기 옆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이 말이다.

스승님의 미소 덕분에 가련이의 얼굴에 떠올랐던 잔잔한 미소가 점점 변해 공포로 일그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아···? 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손부터 다리까지 그대로 풀리는 힘.

-와장창! 쨍그렁!

가련이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이 가슴과 손목을 타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기묘한 일이었다.

펄펄 끓는 국물을 퍼와 분명 델만큼 뜨거운 국물이었는데, 그것이 손목과 가슴 그리고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가련이는 그것이 너무도 시리고 차게 느껴졌다.

마치 한겨울 얼음이 언 강물을 깨고 빨래할 때와 같이 차디차게.

그리고 그와 함께 고드름으로 만든 것 같은 차가운 무엇인가가 가련이의 가슴에 깊이 틀어박히는 것 같았다. 

***

홍등의 피처럼 붉은 불빛이 시야에 가득했다.

밤의 거리와 골목은 수많은 등롱과 꽃 줄로 수놓아졌고, 관가님 칙령으로 올해도 상원절(上元節)이 사흘로 연장되었기에, 관청 근처는 화희(火戲)를 구경하고 여러 가지 화려한 등롱의 빛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누님, 정말 멋있어요!”

“대단해요. 누님. 저기 저 등롱은 마치 용 같습니다!”

“그래, 정말 예쁘구나.”

가련이는 송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등불 축제인 상원절을 맞아 동생들과 함께 관청 근처에 등불 구경을 나온 참이었다.

심우현이 그리 큰 곳은 아니라지만, 관가께서 사신다는 저 동경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등불들과 현령께서 베풀어 주신 화희가 대단한 볼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축제 기간에는 새벽까지 장사가 바빠 짬이 없었지만, 부모님께서 동생들과 구경하고 오라고 가련이와 동생들을 내보내 주셨기 때문이었다.

손에 철전까지 제법 쥐여서 말이다.

삼국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는 이야기꾼들과 불로 된 봉을 돌리며 아름다운 재주를 선보이는 여인들.

가련이와 동생들은 순식간에 시선을 뺏겨버렸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오래가진 못했다.

동생들과 화희를 구경하면서도 가련이의 마음 한편이 계속해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원소절은 사흘간 밤새 열리는 큰 축제인지라 부모님의 요리 집도 온종일 바쁘기에, 가련이가 빠져나옴으로 부모님은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돌아가야지.’

가련이는 부모님 걱정에 축제를 마음껏 즐길 수 없었고, 결국 부모님께서 주셨던 철전 열 개를 다섯 개씩 동생들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너희들 여기서 구경 잘하고 이것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어 알겠지?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해 알겠지?”

그러자 가련이를 올려다보고 묻는 동생들.

“응? 누님은?”

“누님은요?”

“누님은 이제 가서 부모님 도와드려야지. 오늘처럼 바쁜 날은 아무래도 부모님을 도와야 하니까 말이야.”

“그럼 우리도 돌아갈래요.”

“그래, 형 가자.”

착한 동생들은 남아서 더 구경하라는 가련이의 권유에도 막무가내로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아, 아니야. 너희들은 좀 더 구경해야지.”

“아니, 그냥 갈래. 누님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

“맞아. 상원절은 내년에도 열리니까. 그럼 우리도 가서 부모님 도울래.”

‘이거 어쩌지···.’

마음은 돌아가고 싶은데, 동생들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 같아서 슬퍼진 가련이.

가련이는 한가지 꾀를 내기로 했다.

“아! 그럼 이렇게 하자. 아까 나오면서 물어보니까 화희가 끝나면 관청에서 현령님이 아이들에게 수당을 나눠준다고 하셨거든? 너희가 기다렸다가 그걸 받아오면 좋겠어. 어때? 누님도 현령님이 나눠주는 수당 꼭 먹어보고 싶거든.”

불놀이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 짐승 모양의 수당.

달콤한 수당 이야기에 두 동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냐하면 수당은 동생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자 역시나 두 동생이 수당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못이기는 척 대답했다.

“그, 그럼 누님이 그렇게 먹고 싶다면 우리가 여기서 기다렸다가 받아 갈게요. 누님은 호랑이 모양 호당을 좋아하셨지?”

“마, 맞아. 누님이 좋아한다면 우리가 꼭 기다렸다가 받아 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요. 누님.”

가련이는 귀여운 두 동생을 꼭 안아주고 얼른 부모님의 요리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불행이면서 다행이라면 사람들이 많아 뛸 수가 없다는 것.

부모님에게 가는 것은 좀 늦어지고 있지만, 뛸 수 없어서 어쩌면 다행이었다.

요즘 부쩍 가슴이 커지고 있어 무심코 뛰면 그날 겨드랑이가 아파 잠을 자기 힘들었기 때문.

그렇게 빠른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약간 저자의 외각에 위치한 부모님의 요릿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저 앞에 보이는 부모님의 요릿집에서 나갈 때와 다른 이상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뭐지?”

뭔가가 다른지 잠깐 생각한 가련이는 나갈 때와 뭐가 다른지를 곧 발견해낼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등롱.

입구에 장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치자 모양의 등롱이 둘 다 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안에 불도 켜져 있고, 가게 문이 열려있어 일찍 문을 닫고 두 분이 상원절 구경을 나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치자 등만 꺼진 상태.

치자등에 기름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닌가 걱정하며 막 가게로 들어서는 좁은 길 앞에 섰을 때였다.

가게 안에서 입구로 걸어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 

네 명의 사람이 무리를 지어 걸어 나오기에 가련이는 일단 옆으로 물러섰다.

좁은 길이라서 나오는 손님을 막아서지 않으려 자리를 피해준 것.

그러자 남자들이 성큼성큼 걸어 가련이를 지나쳤다. 

그 순간이었다.

남자들이 가련이의 앞을 막 지나는 그때.

제일 앞에 선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손바닥 제일 안쪽으로 옆머리의 붉게 흘러내린 무엇을 쓸어 넘긴 것은.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 가련이의 머릿속에 그 모습이 틀어박혔고, 몰려나온 손님들이 사라진 요릿집 입구로 쭈뼛쭈뼛 들어선 가련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는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 아아···. 흐아아아아아아···.”

저자에 수없이 걸려있는 화려한 붉은 홍등만큼이나 참혹하게 붉게 물든 가련이의 상원절이었다.

*** 

가련이의 찢어지는 울음소리에 평소에 친분 있던 근처의 노점 주인이 가게를 살피러 왔고, 그 참혹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가련아? 왜 이리 우누? 부모님께 혼나기라도 한···. 으, 으허어어억! 사, 살인이다! 살인이야!”

그리고 그 소란에 원소절을 맞아 혹시 일어날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주변을 돌던 관병들이 뛰어와 붉게 물든 요릿집 내부와 그 한가운데 망연하게 앉은 가련이를 보고 기겁했다.

“이, 이건! 우, 우욱···. 혀, 현령께 알려라!”

황제의 명으로 사흘간 이어지는 심우현의 원소절 축제를 하루 만에 끝내게 하고, 그 참혹함에 조정에까지 보고 된 사건.

심우현 추가 부부 살해사건.

축제 속으로 사라진 범인들을 잡지 못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포대륜이 조정의 문책을 받고 장기간 한직인 심우현에서 머물러야 했던 사건.

그것이 가련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은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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