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운(命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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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큰일이구나. 내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내 삶의 첫 제자이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여쁜 아이였는데, 엉덩이를 맞고 자진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가슴이 답답했다.
애지중지 키운 내 아바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게임에서 가슴 크고 예쁘장한 여캐를 만들어서 열심히 키우고 있는데, 게임 내에서 엔피씨 좀 죽이려 했다고 지엠이 캐삭을 해버린다는 결말과 비슷했으니까.
‘원래 캐릭터 중 근본은 여캐이기에, 아무리 힘든 노가다라도 내가 만든 여캐를 보면 힘이 솟으며. 게임을 접을 수밖에 없는 꼬접하는 순간이 와도 내가 키운 캐릭을 보면 힘이 솟아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인데···.’
이건 정말 곤란한 이야기였다.
가련이는 예전에 청이의 오해로 인해 나의 소처로 들어오기로 했다가 그것이 오해라고 알려지자 수치심에 우물로 다이빙하려고 했던 아이.
알궁둥이를 맞기도 전에 옷이 벗겨지는 순간 수치심에 혀를 깨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련이의 가녀린 멘탈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사람이 엉덩이 몇 대에 죽는다니, 전생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거참···.’
학교 다닐 때 엉덩이 좀 맞아본 내 처지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긴 했는데, 유교 사회이니 어쩔 수 있나?
가련이를 살릴 다른 좋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형님이나 연성공 형님도 뭔가를 돕기 힘드시고. 거리 때문에 아내들의 처가에서도 나서기 힘들다는 말인데···. 결국 아내들과 나의 힘으로 풀어 가야 한다는 말이네.
거 참···. 대신 맞아줄 수도 없고 젠장.’
짜증스러운 상황에 전생이라면 그깟 엉덩이 대신 맞아줄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머리를 스치는 벼락.
‘잠깐만? 대신? 어쩌면 이거?’
이곳은 유교 근본의 사회.
가련이는 내 제자.
그리고 나는 그의 스승.
생각해보니 나는 아버지 같은 존재이니 가련이가 잘못 행동한 것은 곧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 되는 것이기에 내가 흑기사를 자처할 명분이 충분했다.
형님이 어느 정도 여론을 걱정하는 모양이신데, 내가 멋있게 나서서 ‘제자의 잘못은 곧 사부의 잘못! 그 장형 내가 맞겠소!’ 이러면 이게 나는 멋진 사람이 되는 과 동시에 가련이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천검자 어르신이 강조했던 말대로 우리가 선생과 학생이라도 내가 가르침을 내리는 처지이니 유교 사회에서 충분히 납득 가능한 전개라 할 수 있었고 말이다.
흑기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디 가거나 우러름을 받는 존재니 가련이의 실수를 커버치면서 나의 인품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빠들에게 우러러 칭송받으며 까들을 아가리를 틀어막는 방법.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여자에게 흑기사를 자처하는 것은 바보짓이지만, 제자인 가련이에게라면 쌉 가능한 부분이지.’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니 곧바로 형님에게 내 의견을 말했다.
“그렇지! 흑기사! 아니, 그게 아니고. 형님! 그 장형 대신 맞아줄 수는 없는 일입니까? 제자의 잘못은 곧 스승의 잘못. 잘못 가르친 제 죄이니 제가 대신 맞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형님이 당황한 얼굴로 물으셨다.
“아, 아니, 대신 맞는다고? 국법으로 대신 맞을 자를 구할 수 있긴 한데···.
피붙이와 또는 대신 맞아줄 이유가 합당한 자면 가능한 일이나···.
하긴 자네가 그 아이의 스승이니 괜찮기는 한데. 괘, 괜찮겠나?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드러내야 하는데?”
국법으로 흑기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나는 가련이의 스승으로 맞을 이유가 합당했으니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말에 미소가 솟아올랐다.
남중 남고를 나온 나에게 엉덩이 좀 맞는 것 정도야 아주 누워 떡 먹기.
어찌 맞으면 아프지 않고 어찌 힘을 주어야 하는지 정도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까짓 뭐 엉덩이 정도야.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내가 뭐 엉덩이에···.”
그러자 뒤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아, 안 돼요! 가가!”
“안 됩니다. 은공!”
“낭군님, 어찌 그런 수모를 감당하려 하시나요?”
아내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아내들 처지에서는 내가 다른 여자를 대신해 엉덩이를 맞으며 수모를 견뎌야 하는 것이니, 반대할만하구나.’
일단 넷을 설득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아내들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던 것.
또 이제 이게 내 엉덩이이긴 해도 이제 아내들의 지분이 없다 할 수 없으니, 허락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혼례를 치르면 상대방에 몸에 대한 지분이 생긴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엉덩이 같은 부분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는 것.
나도 넷의 엉덩이는 내 것으로 생각하니까.
‘아무렴 아내의 엉덩이는 남편의 것이 아니겠나.’
그렇기에 간곡한 어조로 설명했다.
감동 팔십 퍼센트와 팩트 이십 퍼센트를 섞어서.
“자, 잘 들어보시오. 내 넷이 위험에 빠진다면 엉덩이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목숨이라도 내어 구할 것이오. 넷 중 하나라도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허니 제자를 위해 쓸모없는 엉덩이 잠시 내어주는 것이니 허락해주면 좋겠소. 넷보다 소중하지는 않지만, 하나뿐인 제자인 저 아이를 저리 보낼 수는 없지 않겠소?”
내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넷.
나의 감격스러운 말에 대놓고 반대하기 힘들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메인요리는 모두 아내들의 것이고, 스끼다시 조금 나눠주자는 의견이었으니까 말이다.
‘먹히나?’
내 말에 잠시 정적이 찾아온 형님의 집무실.
넷이 서로를 바라보고 잠깐 전음으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것 같더니 청이가 대표로 나서 말했다.
“노공, 그러면 저희가 천검자 어른을 찾아뵙고 혹시나 다른 방도가 없는지 확인하고 온 후에 결정하도록 하죠.”
“천검자 어르신을?”
“예,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괜찮겠소?”
앓아누운 천검자 어르신을 찾아뵙겠다는 넷의 말에, 지금 찾아봬서 뵐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띄웠지만, 만나지 못한다면 내 의견을 따르겠다는 대답.
“혹 의견을 구할 수 없으면 노공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러면 그리합시다.”
마음이 불편해 점이라도 보겠다는 말인 것 같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십자 형님이 든든하니 점 따위는 믿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그래서 아내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내가 양보할밖에.
그렇게 합의가 끝나고 말미.
청이가 나를 보고는 아주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노, 노공의 어, 엉덩이 쓸모없지 않습니다.”
내 엉덩이 생각보다 청이에게 어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
“아이고 형수님들 다들 이 장의문에는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해가 지고 장의문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청이와, 영영이, 미미와 소소에게 장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넷의 노공이신 청운형님과 함께 가 아니고서는 넷만 찾아올 리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청운형님을 제외하고 넷만이 장의문을 찾은 것이 신기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 놀란 장진의 시선을 받으며 찾아온 연유에 관해 설명하는 청이.
“천검자 어르신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렇게 천검자 어르신을 만나러 왔다는 설명을 하자 장진이 깍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문병을 오신 모양이군요? 이리로 오시지요. 저 장진이 안내하겠습니다. 형수님들.”
그렇게 장신을 따라 도착한 전각.
전각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이제 살만하오. 다 약왕 덕뿐이오. 내 정말 이번에는 염라대왕 만나는 줄 알았다니까.”
“허허허, 아직 할 일이 많으신데 염라대왕이라뇨.”
넷은 장의문을 찾으면서도 혹시나 천검자의 상세가 나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정신을 차리신 모양.
넷이 기뻐하는 표정으로 장진을 향해 말했다.
“어서 안쪽에 기별을 넣어주세요.”
“장 소숙자 뭐해요. 얼른 안에 기별을 넣어주세요.”
“예? 예. 형수님. 할아버지. 저, 장진입니다.”
넷의 성화에 안쪽에 기별이 들어가고, 열린 문으로 넷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에 누운 약왕과 천검자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넷을 맞았다.
“응? 너희들이 전부 어쩐 일이더냐?”
“응? 너희들은?”
“““천검자 어르신과 약왕 어른을 뵈옵니다.”””
합격진이라도 익힌 듯 넷의 한 동작으로 인사를 하자 당황한 천검자와 약왕.
“어, 그, 그래.”
“그, 그래. 넷이 인사하는 것도 어찌 저리 절도가 있는지. 그래 어쩐 일이더냐? 문병이라도 온 것이냐?”
천검자의 물음에 청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해서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청이의 말에 서로를 바라본 약왕과 천검자.
약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거 내 집에서 내가 축객령을 당할 줄이야. 하하. 진아, 나가보자. 천검자 어르신이 오늘 또 점이라도 봐주셔야 할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니야. 이야기들 나누시게. 천검자 어른을 잡아두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하.”
천검자가 가는 곳에 여인들이 몰려들어 점을 봐달라는 이야기는, 이미 중원에서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약왕은 웃으며 장진과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전각 안에 남겨진 천검자와 청, 영영, 미미, 소소.
둘이 밖으로 사라지자 천검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그의 물음에 청이가 대표로 설명했다.
“내, 점은 그때 다 봐주었는데, 무슨 일이더냐?”
“어르신, 어르신께서 노공의 참 아내가 맞는다고 하신 마지막 아이 기억하십니까?”
“어, 그래, 그, 가슴이 무척이나 큰. 크흠. 아무튼 그 아이. 그래 그 아이가 왜? 응? 설마!? 정말 청운이가 그 아이를 부인으로 들어 앉힌 것이냐!? 그렇더냐!? 그렇다면 내 근심이···.”
청이의 설명에 반색하며 묻는 천검자.
청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그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아마도 내일 죽을 운명인가 봅니다.”
“뭐!? 뭐라!? 대체 무슨 말이더냐? 자세히 설명해보거라! 아, 아니지. 차, 창을 열어보거라!”
창을 열어달라는 말에 미미가 천검자가 누운 침상 근처의 창문을 얼른 열어주자, 침상에서 몸을 돌려 창밖 하늘을 바라보는 천검자.
하늘을 올려다본 천검자가 경악하는 얼굴로 외쳤다.
“이, 무슨! 붉게 빛나던 별이 비, 빛을 잃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이야기해 보거라!”
역시나 뭔가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느낌.
천검자의 경악에 청이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르신. 해서 저희가 어르신을 찾은 이유는 솔직히 저희 처지에서는 그 아이가 그대로 죽어 노공의 부인이 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잃고 실망하실 노공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저희의 사사로운 욕심에 그 아이를 이대로 죽게 놓아둘 수는 없어서, 그 아이를 살릴 방도를 찾기 위해 어르신을 찾은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백도에 몸을 담은 여인이니, 사사로운 욕심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이의 말이 끝나자 영영이, 소소, 미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넷이 이렇게 천검자를 찾은 이유는 모두 가련이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류청운 생각해낸 가련이를 구할 방법을 제외하고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이 천검자의 도움을 받아 가련이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청이의 생각대로라면 그러면 가련이가 노공의 부인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공의 방법 이외에 자신들이 가련이를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진실을 숨기긴 했지만 가련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진실이니까.
그러자 청이의 이야기를 듣고 한탄하는 천검자.
“허허, 그러면 빛을 잃은 저것은 갈림길이구나. 이 망할 땡초!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닌데! 기루와 백일취 한 번에 반년이면 수지가 맞지 않는구나···.”
그가 한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명운(命運)이 무엇인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