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신권(爆風神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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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아내들은 가련이를 구하는 일로 천검자 어르신에게 점이라도 봐야겠다며 외출했고, 해시쯤 되어 밤이 깊어가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지는 느낌.
나는 그사이 홀로 영업을 끝낸 반점 일 층에 앉아 근심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물론 내 근심은 아내들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사이쯤 되는 야심한 시간이지만, 아내들이야 오밤중에 돌아다녀도 아내들이 아니라 만나는 나쁜 놈들을 걱정해야 할 무림 고수들이니까.
오늘 내 마음의 근심은 온전히 가련이로 인한 것.
-쪼르륵.
“크으···. 인생처럼 쓰구나.”
달달한 황주가 오늘만큼은 쓰디쓰게 느꼈다.
당장 이틀 후로 다가온 가련이의 판결.
장이야 내가 맞아주면 끝날 일이지만 형님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련이의 기구한 삶이 참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열여섯쯤 되는 나이에 참혹하게 부모님이 살해된 장면을 목격한 녀석.
그래도 동생들을 챙기며 그렇게 살아왔다니···.
스승으로서 그런 사실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니, 생각해보니 스승 실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련이 같이 착한 아이가 직접 칼까지 들고 뒤를 쫓았다니.
가련이는 놈을 쫓으며, 나에게 유서를 쓰며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청이와 형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감히 가련이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가련이를 데리고 스승 놀이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천검자 그 양반이 나보고 스승이나 사부가 아니라 선생이라고 했구만···.’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고 무릇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 받는 자를 원만한 인격자로 길러내야 하는 것인데, 요리 기술만 가르치고 가련이라는 아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니 확실히 나는 선생이 맞았다.
그리고 자괴감과 함께 한편으로 분노도 솟아올랐다.
가련이 같은 아이에게 칼을 들게 만들고, 결국 생각해보면 내가 가련이 대신 엉덩이 열대를 맞아야 하는 것도 다 그 새끼들 때문.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들 내 꼭 잡아 죽인다!’
지금은 어찌 도망쳤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복수란 허무한 것이라지만, 그건 원한이 있어 보지 않은 놈들이 하는 뭘 모르는 소리.
원통함과 원한이 사무친 가련한 가련이 같은 영혼을 구제하는 것은 정의뿐이니까 말이다.
가련이를 원한의 족쇄에서 풀어주어 그 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이 새끼들은 반드시 어떻게든 잡아 죽이는 것이 맞았다.
-쪼르륵.
-턱.
한잔을 더 따라 마시려 했는데 내 손을 붙잡는 손길.
고개를 돌리자 내 손을 붙잡은 월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류 대인 어르신, 근심으로 인한 술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가련이도 슬퍼할 것이고요.”
막잔이었는데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지만 월희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자지 않고?”
“가련이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서···.”
둘이 친구가 되었다더니 가련이가 장형을 당한다는 말에 아마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대신 맞아준다는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미리 알려지면 가련이가 난리를 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가련이라면 자기가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나에게 그것을 허락할 아이가 아니었던 것.
“가련이는 잘 있더냐?”
둘이 친구라고 하인들과 같이 가련이 옥바라지해주는 월희 이기에 가련이의 안부를 물었다.
“예, 류 대인. 아마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이지만···.”
“아···. 그런가?”
별로 잘해준 것도 없었고, 그 아이를 잘 살피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가련이는 내가 스승이라고 보고 싶다는 모양이었다.
월희에게 다시 물었다.
“가련이에게 장형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했느냐?”
“아뇨. 차마 하지 못했어요. 혹시라도 말했다가 자진이라도 할까 해서···.”
가련이의 멘탈을 생각하면 잘했다 싶었다.
아직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가련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느낌.
월희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하지 말거라. 그리고 장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느니라. 그 아이 구할 방법은 생각해두었으니.”
“지, 진짠가요?”
“그래, 그러니 옥에서 아이가 상하지 않게 잘 돌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류대인!”
아무래도 흑기사에 나선다는 것은 내가 직접 말해야 할 터.
월희를 안심시키고, 기뻐하는 월희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들려오는 월희의 물음.
“류 대인 밤이 깊었는데 어딜?”
내 발걸음이 반점의 밖으로 향하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비연을 만나고 올 테니 들어가 쉬거라.”
“화화루에 가시려고요? 음···. 확실히 근심으로 인한 술이라도 비연님이라면 그 마음을 위로해주시겠죠. 그러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밤이 깊었으니까요.”
“그럼 그럴까?”
월희도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보디가드를 해주겠다는 느낌.
고개를 끄덕여 월희의 동행을 허락했다.
잠시 후 손님들로 북적이는 화화루 일 층.
“이런 시진에 어쩐 일이세요. 청운님?”
월희와 함께 화화루를 찾자 날 듯이 달려 내려온 비연.
저번에 만들어준 요리에 기분이 어느 정도 풀어졌는지 비연이 나를 반색하며 맞았고, 그녀와 계단을 오르며 오늘 왜 찾아왔는지를 설명했다.
“내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소.”
“하긴 부탁하실 것이 있어야 저를 찾으시···. 응? 그, 그래요. 위로 오르시지요.”
평소처럼 부탁이 있을 때만 찾아오고 서운하다고 말하려고 한 것 같지만, 눈치가 빠른 여자인지라 오늘 내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비연이 얼른 나를 위층으로 인도했다.
‘나 좀 오늘 센치한가?’
그렇게 비연을 따라 오른 오 층에서 열린 창으로 저 밖에 달이 뜬 해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가련이 이야기는 들었소?”
“예? 예. 청운님. 원수를 갚으려다 옥에 갇혔다 들었습니다. 혹 그로 인해 근심이 크신가요?”
아마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지만, 대략적인 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는 비연.
그녀에게 찾아온 연유에 관해 설명했다.
“실은 그 때문에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소. 내 그 일을 포 형님과 가련이의 입을 통해 자세히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했다니 선생으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소?”
“세, 세상에 그, 그놈들이 그렇게까지 했다고요!? 마, 맙소사! 어쩐지 그 순한 아이가 직접 칼을 들었다더니···.”
내 설명에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어보는 비연도 경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푸줏간의 돼지고기도 그렇게 다루지는 않았을 테니까.
“너무 참혹해 조정에 보고까지 되었었다니 기록이 좀 있을 것이요. 조정의 기록이 필요하면 개봉의 제갈가에 내 이름을 대고 이야기해 보고···.
그리고 열흘 전에 가련이에게 칼을 맞아 도망친 놈이, 반점의 하인들에게 사천의 장사치라고 했다니. 그쪽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오.”
이야기가 너무 참혹했는지 분노한 비연이 목숨만 붙여 데려오겠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알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겠습니다. 아니, 잡아들일까요!?”
하지만 놈들의 생사여탈(生死與奪)권은 오롯이 가련이의 몫.
다른 이가 가련이 대신 그들의 운명은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고 사치였다.
“아니, 일단 어떤 놈들인지 찾아만 봅시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 이름을 대고 개봉의 거지들에게도 도움을 받으시오. 초개 걸륜이라는 자에게 말하면 내가 진 빚이 있어 한번은 반드시 도와줄 것이오.”
걸륜이 준 개방 자유이용권이 한 장 정도 남았던 것으로 기억이 되어 그것을 이야기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비연.
거기에 하오문이 사천에서 움직이자면 당가의 도움이 없이는 운신이 불편할 터.
사람을 많이 풀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하오문이 당가의 나와바리에서 너무 티 나게 움직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사천의 당가에 내 이름을 대고 도움을 구하시오. 혹시라도 은밀히 사천에서 움직이다가 당가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제갈가나 남궁가, 모용가에도 필요하면 도움을 청해도 좋소. 팽가도 내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이라 이야기하면 도와줄 것이오.
아, 화산이나 종남파도 아마 거절치 않겠지···.
비용과 값은 내가 치를 테니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놈들을 찾아내 주시오.”
오늘 내 시크하고 단호한 모습이 멋졌는지 비연이 자기 납작한 가슴에 손을 올리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아···. 저, 비연 청운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
비연과 이야기를 끝내고 월희와 함께 부엌과 연결된 반점의 뒷문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부엌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를 만들고 있는 식모와 형님.
야식이라도 만드나 싶어 물었다.
“응? 두 분은 주무시지 않고 부엌에서 무슨 일을?”
“아! 매부 잘 왔네. 어디 갔었는가? 지금 아버지가 손님을 모시고 오셨네.”
“예? 장인께서 말입니까?”
남궁 장인이 손님을 모시고 왔다는 말에 얼른 발걸음을 서둘러 홀로 향했다.
그렇게 일 층의 홀에 도착하자 한쪽 테이블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손님이 아니라 내가 익히 아는 사람들.
거기에는 나의 네 명의 아내들과 당가의 독왕 처조부와 검왕 남궁 장인, 북해빙궁주 제갈 장모, 그리고 모르는 노인이 하나 앉아있었다.
나이는 처조부인 독왕 어르신 정도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특이한 것이라면 그가 정상인이 아닌 불구라는 것.
아랫배가 기아를 겪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같이 불룩 나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양쪽 팔 중 오른팔만이 이상하게 가늘었다.
마치 배와 그 오른팔만이 기아를 겪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단 스캔을 끝내고 세 분에게 인사했다.
“처조부님. 장인어른, 장모님. 이 밤중에 세분이 이곳을 어찌 찾으셨습니까?”
“오! 청운이 왔구나! 에잉. 녀석 어딜 그리 싸돌아다닌 것이냐 한참을 기다렸느니라.”
“사위, 이 밤중에 어딜 다녀오는가? 내 걱정했네.”
“우리 사위 잘 계셨나요?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데 무슨 일입니까?”
청이를 슬쩍 바라보자 고개를 젓는 청이.
아마 가련이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뜻인 듯했다.
마침 비연이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서찰을 보내두려 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실은 제 제자···. 아니, 학생이 지금 관아에 사람을 찌른 일로 잡혀있습니다. 해서 그 일 때문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차마 이젠 가련이를 제자라고 누구에게 소개할 수도 없었기에 학생이라고 말하자, 내 설명에 가련이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가련이가 사람을 찔렀다는 말에 다들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응? 청운이 네 학생? 저번 객잔에서 보았던, 네 제자라 말했던 그 가슴 큰 아이 말이냐?”
“사위, 사위 제자는 무림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아이가 사람을 찔렀단 말인가?”
“사위님, 그 예쁘장하고 순한 아이 말입니까?”
다른 분들도 역시나 가련이를 얌전한 아이로 기억하는 듯했고, 장모님은 아무래도 러시아 분이라 그런지 가련이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 그렇지 않아도 세 분께 도움을 부탁하려 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게 어찌 된 일이냐 하면······.”
내가 한참의 설명 끝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역시나 분개하시는 세분.
살기가 풀풀 날리는 세분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 그런 악인이 있단 말인가! 어찌 그런 참혹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알겠네. 당연히 도와야지. 사위의 제자, 그 부모를 해친 놈들을 이대로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사위의 제자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다니! 이건 저희 가문들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군요! 그래요. 사위님 무엇을 도우면 됩니까?”
“몇 년 전쯤 떠들썩했던 심우현 추가 부부 살해사건의 딸이 청운이, 네 제자였다니···. 그때 당문에서도 무사들을 뿌려 놈들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는데, 행적이 드러났다니 잘됐느니라. 내 이번에는 이놈들을 잡아서 그 염통을 씹을 것이니라.”
세 분에게 이번 일은 하오문이 조사할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개방 무료 이용권과 네 가문의 힘 그리고 나의 모든 꽌시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할 것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이 다 끝나자 한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독왕, 그런데 저 아이인가? 몸보다는 머리를 잘 쓰는 아이로 보이는데, 굳이 무공을 익혀야 하나 싶긴 한데?”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는 것은, 아까 자리에 앉기 전에 보았던 노인.
처조부께 반말하는 것으로 보아 배분이 같은 느낌.
누구인지 소개해 달라는 뜻으로 처조부인 독왕을 바라보자, 독왕께서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깜빡했군. 청운이 제자 일 때문에 소개가 늦었구나. 미안하네. 권왕. 인사드리거라 청운아 네 몸을 봐주시고, 네게 무공을 가르쳐줄 분이신. 권왕(拳王) 폭풍신권(爆風神拳) 황보세극이라고 하느니라.”
“예? 궈, 권왕? 황보?”
무림 최고의 헬창 가문 황보가의 권왕이 내 무공 스승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