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58화 (58/175)

[Episode 12] 구원자 (6)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거나 미소 짓는 이들이 없었다. 하동건 파티는 그저 조용히 전후 정리를 한 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했다.

아파트 단지 내부의 광경은 처참했다.

특히 저층 부근은 베란다 창문이 박살이 나 엉망이 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유리 조각과 엉망이 되어버린 실내, 그리고 그곳에 있는 핏자국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묘한 것은 아파트 베란다 창문 중에 멀쩡한 것들이 없다는 점이다.

'한 층씩 창문을 깨면서 올라간 건가'

그나마 철로된 현관문이 있어서 희망을 가졌는데, 고블린 보다도 신장이 훨씬 큰 오크들이 아파트 벽을 타고 베란다 창가 쪽으로 침입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동건은 그것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투둑툭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여 날씨가 심상치 않다 했는데, 이내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아무도 말이 없었다.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조용히 하동건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가 106동에 진입했다.

찰칵찰칵

처참하게 박살난 아파트 정문 안으로 들어가니 깨진 유리 밟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댔다.

오크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현관문이 아예 없어진 1층 세대만 보아도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동건은 그것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비상구 계단을 묵묵히 올라갔다.

그렇게 10층에 도달했을 때, 하동건은 엉망진창인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1001호의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잡이가 있는 부분이 우그러지고, 박살이 나 있었다. 그것은 문으로서의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상태였다.

끼이익

그저 손으로 잡아끄는 것만으로도 쉽게 열리는 문.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문이 부서지는 동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지.

"동건아."

김가영이 하동건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하동건은 천천히 뿌리치며 기어코 집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발자국.

바닥 곳곳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붉은 발자국들은 블랙 오크들의 것이 분명했다.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거실 한 쪽에는 핏자국이 존재했다.

저항의 흔적인지 거실 중앙에 식칼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한동안 그것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하동건은 붉은 발자국들을 따라 안방으로, 작은 방으로, 화장실로 천천히 걸어 다녔다. 집 전체를 돌아봤고, 무표정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말했다.

"나가자."

여기가 누구의 집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체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거실과 방 곳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동건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건아...."

"난 괜찮아."

그가 울지 않기 때문일까, 김가영이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울어 이 바보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야."

하동건은 자신의 품에 안긴 김가영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가자."

다른 곳의 상황도 그리 다르진 않았다.

강덕수의 집도, 김 건의 집도 현관문이 열려 있는 채였다.

세대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아파트단지이기 때문일까, 예외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의 경우 집안에 핏자국은 없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을 확인한 김 건이 입을 열었다.

---

"그렇죠. 이게 현실이죠, 보통은.”

하동건은 무표정했고, 강덕수와 김 건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김가영 때와는 달리 함께 슬퍼할 가족조차도 없었다.

철저하게 세상에 혼자로 남겨진 것이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김 건과 강덕수를 향해 하동건이 말했다.

"아직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어. 어딘가에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하동건이었기에,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희망이라도 있는 그들의 상황이, 하동건의 상황보다는 나았으니까.

김건이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동건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도 살아야겠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찾았다.

"재현님. 혹시 계십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들 좀 불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조금... 쉬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가신 소환을 사용해 그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지이잉—

하동건 파티의 등장과 동시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보기만 했던 것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왔다.

그나마 가족이 무사한 문병호와 김가영은 죄인처럼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너무 늦은 게 아니었을까.

만약에 조금만 더 일찍 그들의 가족들을 구하러 갔었다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그럼 쉬러 가보겠습니다."

하동건이 내게 대표로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던 그때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하자 하동건 파티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됐다.

"제 탓입니다.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 탓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렇게까지 발버둥 칠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능력으로 알아서 이곳으로 찾아오셨고, 할아버지도 좋은 능력을 타고나서 충분히 잘 버티고 계셨으니까.

내가 찾으러 가지 않았더라도 모두 무사히 잘 계셨을 것이란 소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가족들의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때문에.."

"재현님 탓이 아닙니다."

하동건이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재현님께서는 저희들의 구원자이십니다."

"..네?"

“저희들을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현님의 능력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동건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먹을 것 걱정 없이, 마실 물 걱정 없이, 몬스터 걱정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재현님의 힘 덕분입니다. 저희가 처음에 병호네 할머님을 구하러 갈 수 있었던 것도, 가영이네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던 것도 재현님이 내려주신 축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리고....."

순간 하동건의 목소리가 약간 흐트러졌다.

그 작은 틈에서, 그가 얼마나 깊게 슬퍼하는지, 그가 지금 멀쩡해 보이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것인지가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하동건은 다시금 아무렇지 않다는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저희들이 가족들의 생사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일도 없었겠지요. 놈들에게 복수를 할 기회도 없었을 겁니다. 거기 있던 몬스터들의 수준은 평범한 저희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요."

하동건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 슬픔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누군가를 노리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흩뿌려진 물처럼 아무렇게나 뿌려진 것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재현님이 책임 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잘못한 것이지, 재현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너무 많이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재현님은 그저 거대한 나무처럼 그 자리에 버텨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할아버님의 능력처럼이요.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감사드립니다."

위로를 해야 할 입장은 나인데, 오히려 그에게서 위로를 받을 줄이야.

분명 따뜻하고 친절한 말인데, 어째선지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시민 하동건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하동건의 신뢰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던지기'를 획득합니다.]

이상했다.

내가 하동건을 신뢰하는 마음이 100이 된 것 같은 타이밍에, 하동건의 신뢰도가 100이 되다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동건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떠나갔다.

"파이팅!"

강덕수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나를 응원했고,

---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건이 감사인사를 남겼으며,

“힘내세요, 재현님.”

"재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할머니를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김가영과 문병호가 나를 응원했고.

"저도 재현님이 구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때 집안에서 죽었을 거예요. 방금 화살에 맞았을 때도 재현님이 저를 구해주셨던 거죠? 제 목숨은 이미 재현님 것이랍니다."

[시민 김다정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민 김다정은 이미 가신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가신 보유 한계치가 늘어납니다.]

김다정의 진심이 담긴 말을 받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현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미쳐버렸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오언주의 한 마디까지.

그들은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떠나갔다.

"하하."

저 사람들과 만나서, 좋은 인연을 맺게 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원자...'

하동건은 나를 구원자라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거창한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위해서 움직였을 뿐인데.'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고,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가신들의 가족을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것은, 단순히 기브앤테이크일 뿐이었다.

그들이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그들을 도와준다는 그런 개념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평범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나와 같은 선택을 하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 내가 구원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큰 나무가 되어달라고 했지!'

우연일지 모르지만, 마침 내 이름도 비슷한 뜻이었다.

심을 재, 나타날 현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으라는 뜻에서 지어 주신 이름이라고 하셨다.

'그래'

사실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나는 길을 잃은 상태였다.

그 뒤에 만들어낸 우리나라를 구해보자는 결심은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세운 목표였다. 그냥, 내게 주어진 힘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그 정도는 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절실하게 원하는 목표도 아니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릴 자신도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스킬 레벨을 올리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전략적으로 별채를 배치하고 영역을 늘려 가면 언젠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 돼 보자!'

하동건이 원하는 큰 나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드는 그런 나무가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처럼!'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벌써 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나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강인해서, 자기들끼리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중이었다.

의료팀이 필요하지 않냐며 의사들이 찾아오고, 구호팀에 소속된 이들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모여 가족들을 구하러 가려하며,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본다.

그저 몬스터를 사냥하고 실적을 올리는 것만이 용감하고 능력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일수록 저마다 특기를 활용하여 자신이 할 일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니?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거창하게 대한민국을 모두 구하겠다는 목표는 버린다.'

아직 부산도 모두 구하지 못한 주제에 대한민국을 구한다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현실감 없었다.

'목표를 수정한다'

대신 커다란 나무가 되어 내 그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더욱 확실하게 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내실을 다지는 것부터 집중해야 해!'

지금 필요한건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무작정 레벨업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게 중요했다.

'김다빈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해!'

[Episode 12] 구원자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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