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84화 (85/175)

〈[Episode 18] 알박기 (2) >

박새롬의 말에 의하면 생존자 그룹은 크게 종합운동장 그룹, 중앙동 그룹, 공업지대 그룹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고 한다.

"저희가 속해 있는 곳은 종합운동장 그룹이에요."

온순해진 박새롬의 설명을 듣던 김 건이 질문했다.

"여기는 마트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룹명이 종합운동장이지?"

마침 나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곧바로 박새롬이 대답했다.

"여긴 저희 그룹의 본진이 아니거든요. 본진이 종합운동장 쪽에 있어서 종합운동장 그룹이라고 불러요. 그 근처에 있는 경찰서가 저희 그룹 본진이거든요."

"경찰서?"

"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경찰서가 아니라 그 근처 땅 전체를 본진이라고 해야 하긴 하는데..., 어쨌든 저희 그룹 대표가 거기 경찰서장이거든요. 그래서 다들 경찰서를 본진이라고 생각해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마트에 있는 천 명이 다가 아니었을 줄이야.'

울산에 남아 있는 생존자 그룹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큰 것 같았다.

"저희는 보급 부대예요. 보급 3팀. 그래서 여기에 자리 잡은 거죠."

보급 3팀이라는 것은 이와 비슷한 규모의 조직이 적어도 2개는 더 있다는 소리였다.

1팀과 2팀 모두 3팀과 같은 규모라고 가정하면 보급팀만 3천여명이 되는 것이다.

'그럼 전체 규모가 얼마나 된다는 거지?'

김건을 향해 말했다.

[종합운동장 그룹의 조직 구조와 전체 인구수를 물어봐 주시겠어요?]

박새롬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보급 부대는 세 팀, 전투 부대 세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전체 인구는... 대충 일만 명을 조금 넘는 정도인 것 같아요.”

"다른 그룹도 그 정도인가?"

"규모는 저희 그룹이 제일 크지만, 다른 두 곳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지역에만 약 3만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이 있다는 거였다.

"세 그룹에 속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도 꽤 있어요. 대부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뭉친 시민들인데, 그분들 숫자도 꽤 될 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 있지??'

이상했다.

내 능력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민들의 숫자가 현재 약 5만 명이었다.

이것도 서면에 있는 사람들과 자갈치 시장 쪽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모두 합한 인구수였다.

그런데 별도의 보호를 받고 있지도 않은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의 숫자가 수만 명에 달하다니.

'더군다나 이쪽에는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흡혈귀들이 있는데...?'

특히나 상급 흡혈귀들의 강력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와 비슷한 급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시민들을 보호해준 게 아니고서야 이런 생존률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각성자들의 비율이 너무 많은 것도 그렇고, 이곳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박새롬은 열심히 자신이 아는 정보를 토해내고 있었다.

"중앙동 그룹은 태화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흡혈귀들을 막아주는 고마운 존재죠. 저희 쪽에서도 전투 부대를 파견해서 힘을 합쳐 흡혈귀들의 북상을 막아내고 있어요. 문제는...."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업지대 그룹이에요. 이놈들은 대놓고 약탈과 범죄를 일삼고 있어요. 흡혈귀보다 더 한 놈들이죠. 제가 인간이 더 위험하다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놈들 때문이에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다른 몬스터들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

주변을 돌아다니는 고블린이나 오크가 아니라 '인간'이 무섭다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김 건에게 지시했다.

[김건씨. 고블린이나 오크에 대해서 좀 물어봐 주시겠어요?]

김건은 내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고, 박새롬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블린? 오크? 농담하시는 거예요?"

박새롬은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넌 오크 본 적 있냐?"

"아니, 고블린도 본 적 없는데.”

"저 형이 저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 보면 진짜 있는 거 같은데.”

다른 이들도 고블린이나 오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김 건의 눈치를 보면서 박새롬이 말했다.

"가, 가끔 괴물처럼 큰 거대 멧돼지가 나타나기는 해요. 괜찮은 식량 공급원이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흠흠, 보급 3팀 팀장 얼굴이나 보러 가실래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때였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음??'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개체가 집구석 근처에 접근하였습니다.]

[시민권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여자는...?'

아까 시민권 제안을 거절했었던 날개 달린 여자였다.

김건이 뒤를 쫓았던 그 상급 흡혈귀말이다.

분명 울산에 도착했던 것을 절대자의 눈으로 확인했건만,

'어느 틈에?'

이번에도 여자 흡혈귀가 나타난 곳은 본가가 있는 자갈치 시장 쪽이었다.

절대자의 눈을 확장하여 그곳의 시야를 공유하려는 순간,

"크으윽!"

갑작스레 격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여러 개의 알림이 연속해서 나타났다.

뜨겁게 달군 인두가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레벨업 때마다 이보다 몇 배는 더 심한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정도 고통에는 익숙했다.

절대자의 눈!'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였기에 금세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절대자의 눈 시야에 날개를 펄럭이며 멀어지는 여자 흡혈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한 명 더 있다고?'

허공을 유영하듯 나아가고 있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놈은 뭐야?'

시스템이 인식한 개체는 분명 여자 흡혈귀 하나였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웬 남자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 흡혈귀처럼 피막의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화르륵!

검붉은 기운이 투명 장벽 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확히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구멍?'

누군가 칼집이라도 낸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아물어가더니 이내 검붉은 불꽃이 사라지며 완전히 깨끗이 사라졌다.

'무슨...??'

투명 장벽 너머로 멀어지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진조(眞) (Lv. 62)」

......

놈은 잠시 이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여자 흡혈귀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괴물이다.'

이것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울산을 공략하지 못한 게 아니야'

저놈이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울산 전역을 쓸어버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일부러 놔둔 거다.'

놈의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일부러 생존자들을 살려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기해야 하나?'

저런 괴물이 존재하는 도시를 건든다는 것 자체가 불안으로 다가왔다.

괜히 놈을 자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이다.'

투명 장벽이 뚫렸다.

그것의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장벽을 뚫고 영역 안으로 강제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리다.'

시민권 없이 영역에 발을 들이는 고렙의 몬스터.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적의를 가질 시 그대로 머리가 날아가는 시스템의 힘이 놈에게 적용될지 조차 미지수였다.

'만약에 놈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

'죽겠지.'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안전지대 안에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면서 망각하고 있던 근원적인 공포감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언제 또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울산과 부산은 너무 가까웠다.

놈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결국 위험을 방치하는 꼴이었다.

'그눈'

그것은 포기하고 떠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의 눈빛이었다.

놈은 반드시 다시 부산을 찾을 것이다.

'언젠가 부딪혀야만 하는 거라면'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가져와야만 했다.

'우선 흡혈귀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는 거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머리부터 들이대려는 게 아니었다.

흡혈귀들의 피해를 극대화시킬 방안이 한 가지 있었다.

'이렇게 써먹을 일이 오네.'

전초기지 건설.

나는 울산에 알박기를 할 생각이었다.

'전초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전초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땅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 이상의 칭호를 가진 가신이 세 명 이상이 필요했다.

'사람이야 하동건 파티를 보내면 해결되지만.....'

땅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전초기지 건설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특정 지역에 자리 잡은 보스급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역이나 건물에 자리 잡은 오크 족장 정도면 딱 적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는 고블린이고 오크고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거지.'

대신 흡혈귀들은 많았다.

결국 전초기지를 짓기 위해서는 태화강 남쪽에 있는 흡혈귀들의 구역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이 경우 흡혈귀들의 우두머리인 그 놈이 개입할 가능성이 지나치게 올라간다.

자그마한 구멍에 불과했지만, 투명 장벽을 뚫는 힘을 가진 놈이 개입하게 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될 수 있으면 놈의 개입은 최대한 늦춰야만 한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박새롬이 안내해준 그 홈플러스가 여러모로 전초기지로 삼기 좋은 장소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

갑작스러운 고통에 꺼졌던 김건을 향한 절대자의 눈을 다시 활성화시켰을 때였다.

박새롬이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신정민이라고 합니다."

"야! 3팀장 좀 더 허리 숙여!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아?!"

"아하하, 새롬이가 경어를 쓰다니. 이거, 꽤나 귀하신 분인가 보군요.”

작은 키의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김 건을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나는 그놈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 봐라?’

놈의 정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중급 흡혈귀(Lv. 33)」

***********

서누리는 울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누리가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힘은 도대체.....'

어린 세계수를 발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도 충분히 불태우거나, 잘하면 침식시켜 세계수의 권능의 일부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계수에 다가가려는 순간 미지의 힘이 담긴 장벽이 자신을 막아섰다.

위대하신 분의 축복으로 그것을 뚫으려 시도해 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분명 세계수의 권능은 아니었다.'

세계수를 보호하고 있던 그 장벽은 전혀 다른 존재의 권능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흉측하게 불타오른 오른손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겨우 작은 구멍을 만들어낸 게 다였다.

그 대가가 이 정도로 가혹하다니.

'억지로 진입했다가는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떠올렸다.

세계수를 보호하던 장벽의 거대한 규모와 영역 안에서 느껴지던 밀도 높은 권능의 존재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기운이었다.'

두려웠다.

동시에 경이로웠다.

'현세에 강림한 신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남자는 몸을 옅게 떨었다.

'곧 만월의 밤이 다가온다.'

만월의 밤,

피를 머금은 땅은 위대하신 분의 축복이 깃든 대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위대하신 분의 축복은 빠르게 영역을 넓혀갈 것이고 이내 그 경이로운 권능조차도 침식시키고 말 것이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겠군.'

남자의 입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Episode 18] 알박기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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