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알박기 (4) 〉
우리는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홈플러스를 장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흡혈귀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과 가신들이 그것들을 손쉽게 제압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가신들의 통제에 따라 홈플러스 건물을 나와 드넓은 사거리에 모였고, 그들의 중심에는 열아홉 마리의 흡혈귀들이 무릎 꿇은 채 짐승처럼 으르 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영역이 구축되지 않은 홈플러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에, 옥상에 올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 상태로 메가폰을 들어 올린 내가 입을 열었다.
[아- 아-]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옥상을 향해 모여들었다.
마이크 테스트를 끝낸 내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메가폰을 통해 내 목소리가 사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흡혈귀들을 향해 있던 나머지 시민들의 시선들도 모두 나를 향했다.
[알아차리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들은 여러분 사이에 숨어든 흡혈귀들입니다.]
실제로 흡혈귀에게 당할 뻔했던 사람과, 근처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이들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기본적으로 흡혈귀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 중 대부분이 가족이나 지인들이 흡혈귀의 손에 죽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흡혈귀들이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옆에서 동료인 척하고 있었다고 하니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 배신자 놈들!"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마!”
"죽여!"
몇몇 이들이 사나운 기세로 흡혈귀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장성준의 염력에 모두 저지당했다.
그동안 숙련도가 대폭 늘어난 A등급 염력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손쉽게 막아냈다.
“김씨가 흡혈귀라고? 진짜야?"
“저 반응을 보면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옆에 있던 사람들을 물려고 했었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어! 저번에.."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열댓 마리의 흡혈귀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생존자 무리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말이라니까! 그땐 내가 착각했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저 자식이 흡혈귀라면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져!"
“...씨-발."
“왜 그래? 너도 짐작가는 게 있는 거야?”
“...혹시 흡혈귀랑 자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
44
"옮는 건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증언에 사람들은 흡혈귀들의 정체가 조금씩 더 확고해졌다.
“팀장님은 어디 가셨대?”
“그 소문 들었어? 팀장님도 흡혈귀였대.”
“신정민 팀장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모든 사정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셔?"
"몰라. 본부에서 오신 분들 아닌가?"
"하긴. 본부 소속이 아니면 어떻게 저 많은 총을 가지고 있겠어?"
“본부 분들은 엄청나구나. 어떻게 단번에 흡혈귀들을 찝어 낸 거지?”
어느새 사람들의 인식 속에 우리는 종합운동장 그룹 본부 소속이 되어 있었다.
[저들은 영악하게도 앞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을 연기하며 조직에 스며들었고, 뒤로는 본색을 드러내어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분노한 대중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저희는 저들의 죄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벌하기 위해 왔습니다.]
눈치빠른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깨닫고는 흡혈귀들의 처형을 원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들이 주도 아래 흡혈귀들의 죽음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의 피를 먹고 사는 흡혈귀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만큼 감성이 충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많은 죽음을 겪어왔다.
바로 흡혈귀들 때문에 말이다.
'흡혈귀 열아홉 마리, 퇴출.'
굳이 홈플러스 내부가 아닌 바깥에 저들을 끌고 간 이유는 이것이었다.
시민권을 박탈시키자 고통에서 해방된 흡혈귀들이 잠시동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흡혈귀들을 제압하고 있는 가신들을 향해 명령했다.
[처형하세요.]
메가폰을 통과하며 광장 전체로 내 목소리가 전달된 직후.
타앙-!탕-!
총성이 울리고 탄두가 흡혈귀들의 심장을 헤집었다.
[하급 흡혈귀(Lv. 22)를 사냥하셨습니다.]
[하급 흡혈귀(Lv. 26)를 사냥하셨습니다.]
[중급 흡혈귀(Lv. 31)를 사냥하셨습니다.]
"와아아아!"
흡혈귀들이 총살당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환호했다.
[시민 김주원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정국일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시민 임채은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사람들의 함성에서는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의 울분과 흡혈귀들을 향한 분노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살짝 미치지 않고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절대자의 눈.'
박새롬과 서예진이 대기하고 있는 방을 바라보면서 스킬을 사용했다.
'텔레포트.'
문병호의 신뢰도가 100이 되며 얻은 텔레포트 스킬은 이렇게 절대자의 눈과 연동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많은 정신력을 요구한다지만, 아직까지 사용하면서 무리가 온 적은 없었다.
"오, 오셨습니까.”
박새롬이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저・・・ 그런데 앞으로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외네요."
“네?”
"새롬씨와 처음 만나면 반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박새롬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변명했다.
“그것은... 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긴장을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는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박새롬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의도가 잘못 전달이 된 것 같았다.
오히려 더욱 경직된 분위기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보급 3팀의 본래 업무가 중앙동 그룹과 파견 나간 차리 부대에 물자를 공급하는 거라고 했었나요?"
중앙동 그룹은 태화강 바로 위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강을 건너오려는 흡혈귀들과 매일 혈투를 벌이는 곳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종합운동장 그룹은 전투 부대인 차리를 파견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던 일 계속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필요한만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이곳 보급 3팀의 팀장은 박새롬씨, 당신입니다.”
“네, 알겠습니・・・네?"
박새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지금, 뭐라고 하셨?”
"박새롬씨가 이곳의 리더 역할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박새롬은 딸꾹질을 몇 차례 하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시민 박새롬의 신뢰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박새롬은 생각보다 팀장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진 이들도 나왔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박새롬의 뒤에서 내가 지원해 주는 무한한 물자들 때문이었다.
당장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던 팔자에서 오늘은 어떤 것을 먹을까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에게 반감을 가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쨌든 박새롬이 보급 3팀의 팀장 역할을 꾸역꾸역 수행해내는 동안 나와 가신들은 이곳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바빴던 것은 서예진이었다.
그녀가 길들인 생쥐들이 울산 전역에 퍼져 정찰병 역할을 수행했다.
서예진의 감각 공유와 절대자의 눈을 연계하여 생존자 집단이 자리 잡은 태화강 북쪽의 사정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조직의 윗대가리들이 죄다 흡혈귀 투성이라니.'
종합운동장 그룹, 중앙동 그룹, 공업지대 그룹.
이 세 개의 커다란 생존자 집단의 중심에 모두 흡혈귀들이 있었다.
심지어 세 그룹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놈들이 전원 상급 흡혈귀였다.
흡혈귀들이 없는 청정구역은 아파트 단지나 작은 마을 단위로 뭉친 소규모 생존자 그룹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울산 전체가 흡혈귀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생존자 집단과 흡혈귀들이 간신히 힘의 균형을 이루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완벽하게 흡혈귀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로 꼭두각시처럼 춤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마치....'
거대한 사육장.
울산은 현재 흡혈귀들이 운영하는 거대 인간 사육장과도 같았다.
'나름대로 안전한 위치라고 생각했건만.'
이건 적진의 한 가운데에 전초기지를 펼친 것과 다름없었다.
"어떡한다."
원래 계획은 생존자 그룹을 하나로 규합하려고 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물자를 활용하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놈이 눈치채기 전에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발급하여 완벽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전원이 총으로 무장한 전투 부대를 만들어 흡혈귀들과 전쟁을 벌여 나갈 생각이었는데.
"망했군.”
시작부터 조졌다.
생존자 집단의 주요 보직이란 곳은 죄다 흡혈귀들이 꿰차고 있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놈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상태에서 내가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중 가장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딱 하나.
'깽판을 치는 수밖에'
중급 흡혈귀 정현석은 싱글벙글 웃으며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제법 고층까지 올라간 이후 비상구 계단 전체를 둘러보며 혹시나 뒤따라온 인간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비상구 계단을 열고 들어갔다.
곧바로 1004호의 앞에 도달한 정현석은 모스 부호를 치듯 리듬감 있게 문을 두드렸다.
툭- 투둑- 툭툭
그리고 잠시 후.
철컥.
“오셨습니까.”
“그래.”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정현석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자.”
앞으로 있을 행위에 몰두해 있었던 그들은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먼지 쌓인 주방을 지나 안방에 도착하자 또 다른 남자가 정현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왔다.
안방은 거실과는 다르게 먼지 한 톨 없이 아주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는 정현석을 비롯한 남자 흡혈귀 세 명 말고도 한 명이 더 존재했다.
세탁까지 마친 것인지 깔끔한 침대 위로 약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자가 발가벗은 채 놓여 있었다.
정현석은 그녀의 나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윗입술을 핥으며 침대로 다가간 정현석은 여자의 팔에 작은 상처를 낸 다음 혀로 핥았다. 그리고는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대기하고 있는 다른 하급 흡혈귀들을 향해 물었다.
“약은 얼마나 주사한 거지?"
“3회분 주사했습니다.”
정현석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몸집이 작은 경우에는 2회만 주사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변명했다.
"160 이하인 경우에만 2회분을 주사하라고..."
"멍청아. 이 여자는 너무 말랐잖아. 알아서 양을 조절했어야지.”
"...죄송합니다.”
흡혈귀가 된 이후로 혈관에 직접 주사를 놓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약이 주입된 피를 마시는 것이 더욱 황홀했다.
그런데 마약이 너무 짙어지면 피의 맛이 옅어지곤 했기 때문에 불만이었던 것이다.
입맛을 다시던 정현석이 인상을 풀더니 말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그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정현석이 여자의 목선을 향해 입을 가져가던 그때.
타앙-
별안간 커다란 총성과 함께 옆에서 대기하던 흡혈귀가 쓰러졌다.
"응?"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탕-
두 번째 총성과 함께 다른 하급 흡혈귀마저 쓰러졌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현석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사방을 경계했다.
“뭐, 뭐야?"
그러나.
탕-!
등 뒤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그의 심장이 박살 나 버렸다.
세 마리의 흡혈귀가 모두 쓰러진 이후.
스르륵
허공에서 나타난 문병호가 이불보를 이용해 여자를 감싸고 들어 올렸다.
그 상태로 베란다 창밖을 바라본 순간.
슈슉-
문병호와 여자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방 안에 남아 있던 흡혈귀의 시체 세 구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Episode 18] 알박기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