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98화 (99/175)

<[Episode 21] 정비 (4) >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곧장 안방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고?"

"저예요."

"재현이가?"

"네, 할아버지.”

안방에 들어가니 여느 때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고 돌침대에 누워계신 할머니와 그 옆에 앉아서 말없이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요?”

그때였다.

“아들~? 아들 왔어?"

부엌 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지금 밥 하고 있다. 밥 안 뭇제?"

"네."

"난중에 같이 묵자."

“네, 할아버지.”

나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할머니의 이불 위에는 페어리(fairy)가 몸을 웅크리고는 졸고 있었다.

살짝 건드리니 몽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나도 반갑다.”

현재 페어리의 레벨은 13.

까미가 벌써 20레벨을 넘은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느린 성장 속도였다.

그래도 10레벨을 달성하며 영역 내에서 모든 시민들의 자연 회복율이 900% 증가한 상태였다.

페어리의 존재 덕분에 가벼운 부상 정도는 영역 안으로만 들어와도 순식간에 치유가 가능했다.

어깨에 착지한 페어리에게 손등을 가까이 가져가자 두 팔로 내 손을 끌어안으며 손등에 볼을 부벼왔다.

그렇게 잠시 페어리와 놀아준 뒤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할머니는 좀 어때요?"

"평소랑 똑같지."

할아버지가 직접 초록빛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고, 엄마의 지극 정성의 간호가 있었기에 할머니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살이 조금 빠지신 거 같은데....'

아무리 할아버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벌써 몇 달 째 제대로 된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처음에는 페어리의 능력으로 눈을 뜨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

시간은 짧았어도 페어리의 레벨이 꾸준히 높아진다면 언젠가 완전히 깨어나게 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 페어리의 성장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전에 할머니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겠어.'

그럴 수는 없었다.

무언가 방법을 강구해 내야만 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힘을 사용했다.

우우웅

할아버지의 손에서 빠져나와 할머니의 몸으로 스며드는 초록빛 생명력을 본 순간.

'저 힘은?'

일전에 봤을 때는 그저 다양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결이 달랐다.

저 힘은 내가 가진 검은 기운이나 흡혈귀가 가지고 있던 붉은 기운과 비슷한 결을 가진 힘이었다.

그리고.

지이잉-

힘을 제대로 인지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습관적으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하여 할머니의 몸으로 흡수되는 초록빛 에너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맨눈으로 봤을 때는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이잉-

초록빛 에너지가 할머니의 신체에 스며들며 조금씩 옅어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머니의 몸 내부에 존재하던 어떤 기운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뿜어내고 있는 초록빛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먹어치우고 남은 초록빛 기운이 간신히 할머니의 몸에 남아 생명력을 북돋을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힘을 먹어치우는 그것의 정체는.

'투명한 기운?'

그제야 할머니의 몸속에서 투명한 기운이 불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거 때문이다.’

할머니가 눈을 뜨지 못하고 계신 것은 분명 저 힘 때문이라는 것을.

'저 힘만 어떻게 하면.....'

투명한 기운이 특히 가득 차 있는 곳은 할머니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곳으로 손을 가져간 순간.

번쩍-!

"!!"

내 손에 닿은 투명한 기운이 발작하듯 번쩍이며 퍼져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드넓은 숲과 그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

지평선을 울긋불긋하게 장식하는 장엄한 산의 모습까지.

파아앗-

투명한 기운에서 손을 떼며 나는 다시 현실로 귀환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재현아! 와그라노?"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당황한 할아버지가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몸에서 나온 초록빛 기운이 몸을 감싸자 따스한 느낌과 함께 빠르게 호흡이 진정됐다.

"스읍. 하아. 전 괜찮아요."

"무슨 일이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방금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저 투명한 기운이 연관되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때였다.

화륵-

검은 불꽃이 일어나며 곧장 할머니의 머리를 차지한 투명한 기운을 불태워버리려 했다.

그 기운이 감히 내 영역 안에서 나에게 적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막아 세웠다.

'섣불리 저 기운을 불태웠다가는 할머니가 무사하지 못한다.'

불태우려 하면 얼마든지 불태울 수 있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고 할머니 몸에 깃든 투명한 기운은 사면초가인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투명한 기운은 내가 이곳에 별채를 설치하기 전부터 할머니의 몸에 기생한 놈이었고, 할머니의 머리 안에 자신만의 작은 영역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저 기생충 같은 기운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할머니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할머니의 안전을 지키며 저 힘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언제 깨우실 거예요?"

"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할미한테?”

"네."

“밥 다 먹고, 가족들 다 모였을 때 깨울 거다.”

페어리가 할머니를 깨울 수 있는 것은 겨우 사흘에 한 번 정도.

그것도 한 번에 10분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가족이 모두 모여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대에 할머니를 깨우는 것이다.

"할미가 좋아하겠구만. 저번에 일어났을 때 재현이 니는 어디 갔냐고 노래를 불렀다. 아나?"

"아빠한테 들었어요."

그때 부엌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재현아! 밥 먹자!"

부엌에는 엄마가 정성껏 차린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된장찌개와 여러 가지 반찬, 그리고 고등어 찜과 볼락 구이가 식탁에 올라 식욕을 자극해 왔다.

할아버지가 상석에 앉으며 농담했다.

“귀한 아들내미 왔다고 비싼 아까모찌를 구웠네?”

"아빠도 좋아하잖아. 그리고 상점에서 얼마하지도 않아."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된 만큼 고등어나 명태부터 참치까지 여러 가지 횟감이 되는 고기들을 전부 상점에 등록시켜 놓은 상태였다.

품목화가 된 탓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어를 구입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볼락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엄마는 얼마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정도 크기라면 객관적으로도 비싼 가격에 구입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 걱정 따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김 서방은 어디 갔노?"

“일하러 갔죠. 이제 곧 도착할 거예요."

아빠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금액만 해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혈족 칭호로 인해 아빠가 사냥하는 몬스터는 온전히 아빠에게 정산이 되는데, 몬스터 사냥으로 아빠가 벌어들이는 돈은 기본이 억 단위였다.

벌이가 워낙 엄청나다보니 먹을 것에 쓰는 돈은 푼돈에 불과한 것이다.

'요즘은 더 늘었겠지.'

진조를 잡고 부산 대부분을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는 사냥을 위해서는 상당한 거리를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대문을 이용해 울산의 전초기지로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두었다.

투명장벽에 설치해야 되는 남대문의 특성 탓에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전포역을 전초기지로 만들어야만 했지만, 그 정도 투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역 안에 전초기지를 만드는 것은 반값 할인이 들어가고, [기사]급 칭호를 가진 가신이 없어도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운용하기도 편했다.

띠띠띠띠 - 띠로리~!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아빠가 들어왔다.

“음~ 맛있는 냄새. 아까모찌네?”

엄마가 구워준 볼락은 살이 탱탱하고 맛있었다.

대어인만큼 굉장히 살이 많이 있었지만, 네 사람이 달려들어 젓가락질을 해대니 금방 뼈를 드러냈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있는 1층 안방으로 모였다.

엄마가 잠들어 있는 할머니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엄마. 오래 기다렸지? 이제 곧 깨워줄게."

그 말과 함께 할아버지가 페어리를 향해 초록빛 기운을 방출했다.

페어리는 초록빛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위에서 이리저리 날갯짓하며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렸다.

그 순간.

스르륵-

절대자의 눈으로 투명한 기운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머리에 있는 자신의 영역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던 투명한 기운이 머릿속에 있는 좁은 영역 안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때,

"으음.”

할머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몸은 좀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고?"

할머니는 몽롱한 눈빛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마 여기 좀 봐. 재현이가 왔어.”

“재현이...?”

엄마의 말에 할머니는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네... 우리 손주 왔네."

"네, 할머니. 저예요."

“엄마, 목마르지? 여기 물."

할머니는 좀처럼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지 못하셨다.

‘시간이 길어졌어도 그건 마찬가지 인건가.’

일전에 내가 찾아 왔을 때에는 겨우 3분 정도 깨어나실 수 있으셨다.

그때는 금방 다시 잠에 드시니 계속 몽롱한 정신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10분 이상으로 늘어난 지금, 깨어나신지 벌써 5분이 다 되어 가도록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할머니."

"응...?"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향해 내가 물었다.

“혹시 거대한 나무와 숲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거대한 나무...?"

"네, 거대한 나무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울창한 수림과 거대한 나무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마치 세계수 같은...."

어쩌면 할머니의 잠이 세계수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한 생각 말이다.

"세계.. 수...?"

그때였다.

우우웅-

자신의 영역 안에서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투명한 기운이 갑자기 급작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이윽고 그것은 빠르게 할머니의 전신을 집어삼켰고,

"어, 엄마!"

할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다.

그리고.

파아아앗-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집구석 절대자의 정신이 공격을 차단합니다.]

시스템 알림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풀썩-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Episode21] 정비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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