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100화 (101/175)

< [Episode 22] 세계수 (2) >

백룡은 바다 속에서 투명장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갑작스레 나타났던 백룡은 자신이 지켜주겠다며 계약을 운운했었다는 게 기억났다.

할아버지 손등에서 빛나고 있는 저 문신이 그때 맺은 계약의 증거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그때 투명한 기운에 닿았을 때 보였던 울창한 숲과 거대한 나무의 모습을 떠올리면, 투명한 기운과 세계수는 반드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처음에는 세계수의 짓이 아닌가 생각했었지만, 세계수의 수호자인 할아버지가 당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더군다나 할아버지가 사용하는 세계수의 힘과 할머니의 머리에 자리 잡은 투명한 기운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세계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으나, 수호자인 할아버지까지 공격한 것을 보면 그리 좋지 않은 관계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백룡은 세계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었지.'

자신의 새끼를 맡겼던 것을 생각하면, 새끼의 부화에 세계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겠네.'

나는 경계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지만, 마침 백룡이 투명 장벽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으니 내가 가기만 하면 됐다.

‘동대문을 열면 되겠네.’

동대문은 나름 심플한 기능이었는데, 영역 안이라면 '어디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기능이었다.

일반적인 문이 아닌 허공에 문을 생성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자의 문의 발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상 북대문의 하위호환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대문은 영역 안이 아니더라도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개방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써 먹을 때가 오긴 하는구나.'

현재 이곳은 본가 바로 앞에 있는 병원의 4인 병실이었다.

이곳에서 영역의 끄트머리까지 거리가 10km나 되는 만큼 이동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텔레포트를 쓴다고 해도 지금의 내 정신력으로는 2km 정도의 거리를 두세 번 이동하는 게 한계였고, 게다가 현재 백룡이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를 헤엄쳐가야 했다.

하지만.

'동대문 개방'

영역 어디든지 문을 생성할 수 있는 동대문을 활용하면 그런 생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백룡과 대화가 가능했다.

지이잉-

허공에 생성된 둥근 문이 점점 영역을 넓혀 갔다.

문 너머로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병실에서 문 안으로 뻗어나간 불빛이 바다 속을 훤히 비추었다.

다행히 병실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지거나 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었으니까.

백룡은 건너편에서 이곳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굳이 건너갈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놈을 향해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동대문 너머로 백룡의 기운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이 말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어째서 세계수를 노리는 것인가?]

“....네?”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아무리 초월자라 해도 그릇에 맞지 않는 신격을 탐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

아무래도 백룡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맥락은 이해했다.'

우선은 오해를 풀어야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세계수의 힘을 노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동대문의 크기를 늘렸다.

문 너머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노출되자 날카롭던 백룡의 기운이 한층 누그러졌다.

"제 할아버지 되시는 분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이렇게 쭉 잠들어 계십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제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잠들어 있는 상황입니다. 혹시 이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동대문 너머로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상태를 바라보던 백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빼미의 짓이군.]

"올빼미요?"

[세계수에 기생하며 연명하는 벌레 같은 존재지]

다행히 백룡은 이 사태의 원홍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희망을 가지고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룡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내용이었다.

[감염된 자들을 모두 불태워라.]

나는 잠시 백룡이 말한 '감염된 자'가 누구인지를 가늠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한 번 올빼미에게 수집 당한 영혼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올빼미의 힘이 퍼지기 전에 감염자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불태워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세계수는 무사할 것이다. 수호자의 힘도 혈육인 그대에게 전해지게 되겠지.]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백룡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화를 참으며 덤덤하게 말하는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올빼미라는 놈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과 잠에 드는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이라면 본체의 나무줄기나 뿌리에 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먹어야 할 것이다.

주변에 있는 애꿎은 인간에게 들러붙는 것이 어째서 세계수에 기생하는 것이 된단 말인가.

침묵하는 백룡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대답해. 세계수 뿌리에 있는 네 알이 산 채로 불타는 꼴이 보기 싫다면."

백룡은 잠시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대의 눈에 보이는 세계수는 그저 큰 나무에 불과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지?"

[초월자라 하더라도 결국 필멸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세계수의 본체는 차원의 틈새에 존재한다. 올빼미는 인 간의 정신을 매개체로 하여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차원의 틈새에 접속하여 힘을 빨아먹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몇 번 더 질문을 해 봤지만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 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동대문을 닫아버린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성민 병원장을 향해 말했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병원 옥상으로 이동한 나는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웬만한 아파트보다도 키가 커진 세계수가 거기 있었다.

‘우선 저것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때였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허가 받지 않은 대상이 출입을 시도합니다.]

먼 바다에서 백룡이 투명장벽을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놈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냉기가 바다를 온통 얼리고 투명 장벽을 두들겨댔지만, 투명장벽은 그 모든 충격을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제법 살벌해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애쓰는 군.’

진조 보다도 레벨이 높아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던 듯 했다.

'놈에게서는 내 검은 기운과 같은 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내 허락이 없다면 백룡이 영역 안으로 진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놈에게서 신경을 끄고 세계수의 꼭대기로 이동했다.

쩌저적-

반경 수백 미터가 얼어붙은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룡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어째서?'

자신의 공격이 필멸자에 불과한 존재가 만들어낸 장벽에 보기 좋게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막는 장벽은 힘으로 뚫어버리고 올빼미에게 오염된 존재들을 직접 지워버리려 했다. 방금 만났던 어린 인간은 세계수보다도 자신의 혈육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다음 세대의 수호자에게 조금 미움을 받더라도, 그로인해 자신의 새끼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불태워진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막힌 것이다.

'불가능해.'

백룡의 숨결에 얼어붙은 바다의 모습과 공격 직후에 흔들리는 것으로 투명 장벽의 크기를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능했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투명 장벽은 거짓말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넓이로 보나 높이로 보나 투명 장벽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는데, 이런 거대한 장벽이 자신의 숨결을 자그마한 흠집 하나도 없이 막아낼 정도로 단단한 강도를 지니려면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저 단단한 투명 장벽에서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이런 짓이 가능한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 자그마한 인간이 신격을 갖추고 있다고?'

눈앞에 보이는 투명 장벽이 한 차원 높은 힘이라면 말이 된다.

신격을 침범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같은 격을 지닌 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됐다.

‘신격을 갖춘 존재가 현세에 존재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 인간이 화신이라고 하여도 이 정도 힘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세상이었다면, 이 세상은 온통 신격이 깃든 힘으로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남은 가능성은 딱 하나.

'새로운 신이 탄생하려 하는가.'

오직 신화의 탄생에서만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지금 이곳에서 신화가 시작하고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세계수의 크기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겨우 수십 미터였던 초창기와는 달리 지금은 수백 미터 하는 아파트들보다도 더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란다면 바로 옆에 있는 천마산조차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하군. 이게 본체가 아니라는 거지?'

백룡은 필멸자의 눈으로는 세계수의 본체를 감히 볼 수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인간의 눈이 아닌, 절대자의 권위가 깃들어 있는 눈은 어떨까?

나는 세계수 가지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절대자의 눈.'

조금이라도 세계수의 본질에 대해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다른 가신들의 상황이나 영역 내를 순찰하듯 돌아다니던 시야도 모두 꺼트리고 오롯이 세계수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의 꼭대기, 세계수의 줄기, 세계수의 뿌리.

총 열두 개의 시야가 세계수 전체를 훑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비춰질 뿐이었다.

'포기할 수 없어.'

지금 이 일에는 가족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절대자의 눈으로 세계 전체를 훑은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곳은 차원의 틈새라고 했었지?”

그곳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절대자의 시야를 겹쳐도 보고 한 가지의 시야에 집중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우웅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의 가지에서부터 무언가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초록빛갈의 그것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세계수의 생명력이 담긴 기운이었다.

내 몸을 천천히 감싸는 그 기운이 나를 자극했고, 그것은 한 가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검은 기운.

최근에 다루기 시작한 그 힘은 내 모든 스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품위 유지 스킬로 만들어내는 전기, 가스, 물이 그러했으며 공간을 잇는 문과 내 몸에서 뽑아져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이 그러했다.

모두가 검은 기운에서 태어나는 힘이었고, 지금 사용하는 절대자의 눈 또한 그랬다.

그러므로.

화륵

허공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절대자의 눈을 사용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더니 한 가지 형태로 굳어졌다.

그것은 검은 눈.

그것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아!'

그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세계수 나뭇가지에서 초록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은 눈이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확장된다.

세계수의 전체적인 모습과 함께 그것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흐르고 있는 초록빛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순히 생명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틀렸다는 것을 알 아 차렸다.

'보인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고 있는 초록빛 기운은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진짜 세계수의 모습이 그곳에 존재했다.

<[Episode 22] 세계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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