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2] 세계수 (3) >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본체는 하나의 거대한 나무 같기도 했고, 동시에 수만 그루가 모인 드넓은 숲처럼 보이기도 했다.
넘쳐나는 생명력이 꿈틀거리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세계수의 본 모습.'
감탄이 절로 쏟아지는 절경이었다.
'아름답다.'
한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족들이 누워있는 병실로 시야를 옮겼다.
검은 눈으로 바라본 병실은 온통 세계수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래서 기생한다고 표현한 건가.'
가족들의 정신을 잠식한 투명한 기운을 향해 세계수의 생명력이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뿌리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먹어대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생충이라고 해서 저 투명한 기운의 격이 엄청나게 낮은 것은 아니었다.
'저 힘도 내 검은 기운이나 세계수의 생명력처럼 기본적으로는 결이 같은 힘이다.’
백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격'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내 허락 없이 영역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대충 이해가 가는군.’
신격을 갖춘 데다 세계수의 본체가 존재하는 차원의 틈새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직접적인 부딪힘 없이 내 영역 안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것들이 잡아먹은 세계수의 힘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세계수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만큼 덩치가 커진다거나, 더 농도 짙은 힘을 품거나 해야 정상인데 투명한 기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그것이 빨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해.'
처음에는 단지 생명력을 흡수하는 효율이 나쁜 것인가 했으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자세히 들여다 본 결과 그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생명력이 투명한 기운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계수의 본체에 기생하고 있는 이 투명한 기운들은 자신들이 빨아들인 세계수의 생명력을 어디론가 보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기운을 먹이로 던져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병실로 이동했다.
"재현님 오셨습니까."
그때까지 뜬 눈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던 이성민 병원장이 곧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특이사항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내가 세계수에 온 신경을 쏟는 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병실 허공에 떠 있는 검은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병원장님. 혹시 저게 보이십니까?"
이성민은 내가 가리킨 허공을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냉장고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성민에게는 검은 눈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괜히 검은 눈을 사용할 때마다 시선을 모으게 된다면 조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병상에 누워 계신 할머니 앞에 섰다.
검은 눈을 통해 바라본 할머니의 머리는 투명한 기운에 완벽하게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검은 기운을 생성해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검은 기운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투명한 기운이 폭주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리스크는 있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시도해야만 했다.
'할머니, 꼭 구해드릴게요.'
우웅-
내 손에서 솟아오른 검은 기운이 서서히 할머니의 머리 쪽을 향해 움직였다.
차원의 틈에 들러붙어 세계수의 생명력을 먹어치우던 투명한 기운은 자연스럽게 내 검은 기운을 함께 집어삼켰고.
우우웅!
투명한 기운의 중심부로 빨려 든 검은 기운이 전송되는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부족해.'
그러나 그 양이 너무 적어 그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조금 더.'
이에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검은 기운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우우웅-
‘좀 더.’
그렇게 조금씩 양을 늘려간 덕분에 이제는 투명한 기운이 집어삼키는 에너지의 8할 이상이 내 검은 기운이 되었다.
그쯤 되자.
'여기다.'
에너지의 움직임을 확연히 인지할 수 있었다.
어딘가로 이동한 검은 기운들이 한 데 뭉치는 순간.
‘동대문 개방.’
동대문.
영역 안이라면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하게 해주는 문이었다.
집구석 선포가 되어 있는 내 영역 또한 기본적으로는 검은 기운의 힘에서 오는 것.
투명한 기운이 전송하는 알 수 없는 장소에 충분한 양의 기운을 쏟아 부은 결과 일시적으로 영역이 생겼고,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지이이잉-
동대문 너머로 울창한 숲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이성민은 또 다시 김재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묵묵히 일을 시작했다.
병실에서 대기하며 위급 상황 발생 시 곧바로 대처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김재현의 가족들의 안위가 걸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들로만 팀을 구성하여 간호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별 의미가 없긴 했지만.’
최고의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진찰하고 간호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MRI도 CT촬영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나오질 않았다.
이 현상이 병의 문제가 아닌 괴력난신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간호 정도인가.’
그러나 이 마저도 딱히 쓸모가 없는 느낌이었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만큼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몸을 뒤집어준다거나 하는 행위가 필요했겠지만, 지금 이곳에 누워 있는 이들은 할머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인이었다.
몸의 내구도가 일반인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우리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번쩍-!
김재현의 할머님에게서부터 쏟아져 나온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털썩-
이성민은 자신이 쓰러지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정신을 잃었고.
“으음??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뭐, 뭐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여긴 어디야?'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전신의 감각은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액체? 물인가?'
덕분에 자신이 현재 어떤 액체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냥 물은 아니야. 끈적끈적하다.'
의사답게 최대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해나가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우웅
‘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자신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느낀 이성민은 패닉에 빠졌다.
'사, 살려주세요. 재현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당장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이성민 병원장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병실에서 퍼져나간 빚은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근처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성민과 같은 처지에 놓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성민은 다른 이들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재현의 어머니인 이지숙으로부터 종속의 계약을 통해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각성과 함께 확 올라간 레벨 덕분에 이런 상황을 버틸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평범한 시민들의 경우에는 달랐다.
레벨 10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극심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가 적은 어린 아이들은 이틀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침묵 속에서 절망의 전조곡이 흐르고 있었다.
동대문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그곳으로 넘어간 순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검은 기운이 내게로 뭉쳐들었다.
그리고.
지이잉-
내 주변으로 익숙한 장벽이 생겨났다.
‘집구석 영역과는 조금 다르군.’
가장 큰 차이점은 장벽의 위치였다.
현재 내 영역은 나를 중심으로 반경 10m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나를 보호하는 장벽은 내 몸에 딱 달라붙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강림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야.'
그때도 장벽은 내 주변을 보호하고 영역은 사방으로 넓게 퍼진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역시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역이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태는 오래지속하지 못 한다.'
최대한 빠르게 목적을 달성해야만 했다.
곧바로 탐색을 시작했다.
'절대자의 눈.'
이곳에서는 검은 기운을 불어넣어 검은 눈을 활성화 시킬 필요도 없었다.
우우웅
주변이 온통 투명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거 완전히 반대 입장이 되어버렸군.’
기생충이라고 해서 얕잡아 볼 놈이 아니었다.
놈은 신격을 갖추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 넓은 숲은 온전히 놈의 영역이었고, 나는 현재 적진의 중간에 자진해서 들어온 꼴이었다.
겨우 반경 10m 정도의 좁은 영역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들어오기 전에 좀 더 많은 힘을 쏟을 걸 그랬나.'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번에는 탐색만 하고 동대문의 쿨타임이 돌아오면 다시 밖으로 나가면 돼.'
그리고 다음에 들어올 때는 내가 뽑아낼 수 있는 검은 기운을 최대한 뽑아내서 이곳으로 보낸 다음 들어올 계획이었다.
'숲이라.'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곳의 환경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무언가 이질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숲이라면 들려와야 할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벌레가 날아다니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심지어는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초자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한 고요함이 숲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마치 숲 전체가 죽어버린 것 같군.'
숲을 채우고 있는 수풀과 나무들도 어딘가 꺼림칙한 모습이었다.
'저건 뭐지?'
이곳에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 혹처럼 생긴 이상한 것을 달고 있었다.
어쨌든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들여다보는 게 가능했으므로 절대자의 눈을 사용해 내용물을 살펴봤다.
대부분의 혹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는데, 다섯 번째 탐색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이건.'
그곳에 있는 것은 끈적끈적한 액체 속에 빠져 있는 말라비틀어진 시체 한 구였다.
'인간은 아니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그 시체는 인간을 닮아 있었지만, 특유의 뾰족한 귀가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움찔-
말라비틀어진 시체인 줄 알았던 그것이 몸을 움찔 떨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해 혹을 뜯어내려 했지만,
스르르륵-
이내 이종족의 몸이 신기루처럼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뿌득!
뒤늦게 뜯어낸 혹 주머니 안에는 끈적끈적한 소화액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설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무 곳곳에 크고 작은 혹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광경이 보였다.
'텔레포트.'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나무 꼭대기로 이동했다.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무줄기를 잡아 중심을 잡은 뒤 주변을 살펴보았다.
끊임없이 이어진 나무의 바다가 나에게는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허.”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터무니없이 넓은 숲의 어딘가에 가족들의 정신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방금 사라져버렸던 이종족처럼 저 이상한 혹에 갇힌 채.
‘이 넓은 지역을 죄다 뒤지는 건 불가능 하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나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머리를 치는 것.'
이렇게 된 이상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신 소환'
지이잉-
모든 전투 병력을 소환했다.
<[Episode22] 세계수 (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