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3] Lilith (4) >
계약을 맺기 직전 릴리트는 속에서부터 새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이거 완전 바보 아니야?'
가진 힘에 비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아무래도 신격을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출내기인 것 같았는데, 이런 이들은 그야말로 토실토실한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계약이란, 구속력이 있는 약속을 의미한다.
신격을 획득한 자들 간의 계약이 구속력을 가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구속력의 주체는 계약 당사자들 중 더 격이 높은 쪽에게 주어진다.
사실상 격이 더 높은 쪽에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이제 막 신격을 획득한 애송이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네?'
릴리트. 그녀가 세계수의 힘을 빨아먹으며 기생충처럼 신격을 키운 입장이기는 해도 그 격이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차원으로 뻗어나가는 세계수의 뿌리에 빌붙어 그 힘을 빨아먹으며 키운 자신만의 차원이 바로 이곳이었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불가능한 저급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한 차원의 주인으로서 군림하는 자인 것이다.
'맛있게 먹어 줄게.'
눈앞에 있는 애송이가 가진 힘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격은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날아오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대가로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꾸게 될 거야.'
본격적으로 계약을 맺기 전, 애송이에게 한 가지 사전 작업을 해 놓을 작정이었다.
계약을 위해서는 서로의 힘이 뒤섞여야 하는데 그 순간 필연적으로 서로의 일부분을 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빈틈을 노리면 돼.'
한낱 몽마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온 그녀였기에 꿈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주특기였다.
'너는 그저 꿈 속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격의 차이를 이용해 계약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애송이의 힘을 온전하게 흡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순종적이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시작할게."
“알겠습니다.”
릴리트의 주도 아래 서로의 힘이 얽혀들었을 때.
'지금이니?'
그녀의 힘이 빈틈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파직-
따끔거리는 감각과 함께 자신의 힘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고,
"어라...?"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직후.
화아아악-
애송이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에너지가 쏟아져나와 릴리트를 덮쳤다.
"꺄아아아악!"
산 채로 불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에서 엄습해왔다.
'이게, 이게 뭐야?'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던 그 순간.
오싹
눈앞에 공포가 현신해 있었다.
전신을 엄습해오던 고통마저도 한순간 망각하고 그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이미 절반 정도 잡아먹힌 이후였다.
느릿느릿하게, 조금씩.
그것은 릴리트의 존재 그 자체를 씹어 삼키고 있었다.
‘아, 안 돼-!’
절망으로 얼룩진 그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그녀의 욕망과 함께 침몰하는 중이었다.
그 속에서 릴리트는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완전히 자신에게 속해 있는 이 몽환의 숲에 마음대로 침입해 들어온 저자가 자신보다 격이 낮을 리가 없다는 것.
그 간단한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우매함을 저주하며, 침묵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발동합니다.]
릴리트의 신격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직전에 있었던 레벨업 효과와 더불어 당연하다는 듯이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건 명경지수의 효과인가?'
아프긴 더럽게 아팠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육체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유체이탈하여 고통을 느끼는 육체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이성이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절대자의 눈.'
내가 고통을 겪는 것과는 별개로 절대자의 눈을 운용하여 다른 곳의 상황을 살피거나.
'상점 오픈. 물 구입.’
가신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지원해주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면 레벨업 때문에 공백이 생기는 일도 없겠네.’
아예 고통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레벨업의 성장통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고, 딱히 줄어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성을 유지하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장점이었다.
게다가.
[다빈씨, 제 말 들리나요?]
[네, 재현님. 잘 들립니다.]
소통의 반지도 문제없이 사용 가능했다.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지시하신 대로 현재 남포동 쪽으로 향하는 통행을 모두 차단했으며, 만약의 경우 언제든지 투입 가능한 인력들을 대비시켜 놓은 상황입니다.]
[좋습니다. 지금은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릴리트의 힘을 흡수했음에도 구조팀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아직은 무엇하나 확실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구조대를 투입시켰다가 그들까지 이곳으로 오게 될 수 있다.'
일단은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았다.
'영역의 크기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현실 세계 쪽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쪽 세계에서의 내 영역이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영역이 넓어진다는 표현보다는 원래 릴리트의 영역이었던 곳이 내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절대자의 눈으로 넓어진 영역을 전체적으로 훑고 있던 그때, 동굴 안쪽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김 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건씨. 정신 차리세요.]
"...으음.”
[김건씨.]
반복되는 내 부름에 김 건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재, 재현님!"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 이름을 크게 불러댔다.
[왜 그러시죠?]
"아까 분명 동굴 안쪽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다급하게 내 안전을 걱정하는 그를 향해 말해주었다.
[안심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밖으로 나가서 다른 분들 좀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림자 괴물들과의 전투를 각오한 것 같았지만, 릴리트가 제압된 이후로 그림자 괴물들의 생산은 완전히 정지된 상태였다.
지금 가신들은 사람들의 구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김건이 할아버지와 가신들에게 합류하며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을 확인하며 몇 시간이 흐른 뒤.
'끝났군.'
드디어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
"후우."
그와 함께 명경지수의 스킬 효과가 사라지며 전신의 감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몸을 살피던 그때, 눈앞에서 자그마한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끄으응."
짜리몽땅한 신체에 어울리지 않는 섹시 컨셉의 옷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짧고 굵은 팔다리 탓에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절대자의 눈에 그녀에 대한 정보가 나타나 있었으니까.
「몽마 릴리트(Lilith) (Lv. 1)」
꿈의 악마.
그와 동시에.
[새로운 환수가 등록되었습니다.]
경쾌한 알림과 함께 릴리트가 환수 목록에 등록되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문득 하나의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이건...'
그것은 이 차원의 구조였다.
이 숲은 세계수의 힘에 철저하게 기생하여 탄생한 불완전한 세상이었다.
다차원에 존재하는 세계수 근처에 존재하는 지성체를 매개체로 세계수의 본체에 접근한다.
이를 위해 지성체의 정신을 지배하고 꿈이라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지성체의 정신을 소환해 내는 것이다.
릴리트가 '초대'라고 말했던 과정의 실체였다.
초대받은 생명체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박제되어 세계수의 힘을 끌어다 오는 촉매로 활용된다.
'역겹군.'
이 숲 전체가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기반을 다져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과 다를 게 없었다.
비단 지구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었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수많은 차원들 속에서 죄 없는 생명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산 채로 생매장당했고, 그들의 고통을 전제 조건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수천, 수만에 달하는 이들이 착취당하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곳은 사라져야 해.'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초대를 받고 이 세상에 넘어온 이들을 모두 강제로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얻은 힘의 상당한 손실이 예상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였다.
"지,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이냐!"
옆에서 작고 하찮은 목소리로 빽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세상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예상대로 하찮은 목소리의 주인은 릴리트였다.
아무래도 이 세상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만큼 지금 내가 벌이는 행동을 함께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러려고 하는 거야."
"무, 무슨...! 어째서......!"
옆에서 떡떡대는 릴리트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가신들과 함께 구출 작업을 진행하던 할아버지와 아빠도, 아직 혹 속에 갇혀 있던 할머니와 엄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구구구구궁-!!
세상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더니 실시간으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생명력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기형적인 구조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자마자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신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가신 소환.'
모두를 현실 세상으로 역소환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콰과과과-
숲이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멀리 있는 공간이 부서지며 지반과 그 위로 자라난 나무, 그 위로 쭉 뻗은 하늘이 동시에 무너져 내린다.
절대자의 눈을 통해 지켜본 그 광경은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듯 했다.
쩌적-
이윽고 그 여파는 중심부의 거대 나무에게까지 닿았다.
갈라진 틈 사이로 숲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안 돼애애!"
릴리트가 절규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에 미친 듯이 울부짖는 릴리트를 향해 말했다.
“지금 그 감정을 잘 기억해. 네 알량한 욕심에 희생되어 이곳에 초대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일 테니까.”
난데없이 이 세상으로 불려와 혹 속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겪었을 절망은 좀 더 끔찍했을 것이다.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곧이어 스스로의 생명까지 바쳐야 하는 이들이었으니까.
쿠구구구
세상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파괴할 것만 같던 종말의 파도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그러나 장엄했던 크기의 숲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푸른 하늘은 사라지고, 숲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거대 나무는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다.
이제 이곳은 반경 수백 미터 정도의 자그마한 공간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릴리트는 멍하니 눈물 흘리며 남아 있는 세상을 두 눈 속에 박아 넣고 있었다.
'부디 이 세상과 함께 고통스럽게 말라 죽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초대되었던 그 누구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기도하면서.
'동대문 개방'
작아진 세상 속에 릴리트를 버려둔 채로 동대문을 넘어 본래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흐으윽. 엄마아. 깨어나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다 큰 기 와이라노."
"크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나까지.
정말로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됐다.
<[Episode 23] Lilith (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