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4] 연구 (3) >
서누리는 상급 흡혈귀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블라드 체페슈가 의식을 위해 모든 상급 흡혈귀들의 힘을 흡수하던 때, 그녀만큼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세계수・・・ 세계수의 힘을}
블라드 체페슈는 죽었지만, 그의 피가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누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가야 해.."
처음에는 그저 환청처럼 울리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중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몸속에 남아 있는 피가 아예 그녀를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채로 부산을 찾아온 것이다.
투웅
그러나 세계수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투명 장벽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세계수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전보다 배는 넓어진 김재현의 영역 때문이었다.
투우웅-
멍한 얼굴로 날갯짓하며 몇 번을 더 부딪친 뒤에야 서누리는 투명 장벽의 존재를 인지했다.
"막지 마... 가야 해.."
그녀의 몸속에 똬리를 튼 체페슈의 피가 반응했다.
우웅-
블라드 체페슈가 벌였던 의식으로 인해 한층 더 강력한 축복을 품게 된 피가 힘을 내뿜었다.
그러자.
꾸르륵
투명 장벽이 부풀어 오르더니 풍선 터지듯 터져버렸다.
입을 벌린 채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누리는 구멍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화르륵-!
영역 안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검은 기운이 그녀를 위협했지만, 체페슈의 피에서 나온 붉은 기운이 그녀를 보호했다.
끔찍한 고통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이미 정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인 서누리는 그저 멍하니 날갯짓할 뿐이었다.
그 순간.
지이잉-
자신의 앞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벌어진 공간 속에서 김재현의 모습과 마주했다.
그를 보자마자 몸속의 피가 거칠게 반응했다.
“큭, 너는...?"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아.’
검은 불꽃이 자신의 심장을 불태우는 것을 느끼며, 서누리는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드디어......'
해방이었다.
검은 불길 속에 휩싸인 서누리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상급 흡혈귀를 불태운 자리에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붉은 액체였다.
화르륵!
붉은 슬라임 같은 그것을 중심으로 거칠게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은 놈이 거세게 저항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 검은 기운에 저항하는 붉은 기운은 릴리트나 세계수가 품고 있는 기운과 마찬가지로 신격을 품고 있는 기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건 흡수되지 않는 거지?'
릴리트의 경우 영역 안으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신격을 흡수당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붉은 슬라임은 분명 내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 있었다.
'절대자의 눈.'
검은 기운을 활용하여 강화한 절대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니 그 이유가 보였다.
‘본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서 허공에 떠다니고 있는 핏덩이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잠들어 있던 할머니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투명한 기운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러니까 저 핏덩이가 뿜어내고 있는 붉은 기운은.
'다른 차원에서 전해져오는 힘이다.'
그 순간.
싸아아아-!
"!!"
붉은 기운에서부터 어떤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이건?'
검은 기운이 덧씌워진 절대자의 눈을 통해 찰나의 순간 연결된 차원의 모습이 보였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그 속에 관 하나가 존재했다.
사방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이 칭칭 휘감아져 있는 관 속에 어떠한 존재가 감금되어 있었다.
철그럭!
분노와 증오가 점철된 감정이 그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우우우웅-
눈앞의 핏덩이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나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손을 휘둘러 핏덩이를 박살 냈다.
화르륵!
보이지 않는 손의 손톱에 깃든 검은 기운이 무서운 기세로 핏덩이를 불살랐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그마한 조각 하나가 남게 되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그것이 눈앞에서 폭발하며 수백 조각들로 나누어졌고,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영역 전체에 새로운 던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던전의 위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곧바로 그 중 한 곳으로 절대자의 시야를 옮겨 정보를 확인해봤다.
「C등급 던전」
-중급 흡혈귀의 도시 (0/20)
중급 흡혈귀가 등장한다는 던전.
그것을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개이득 아닌가?'
차원 너머의 존재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느낌이어서 긴장했는데, 결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중급 흡혈귀가 등장하는 던전이라니.'
중급 흡혈귀들은 통상적으로 30레벨이 넘어가는 몬스터였다.
당연히 그 높은 레벨만큼이나 경험치와 정산금도 푸짐하게 챙겨주는 놈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새로운 던전은 공략하면 크리스탈까지 퍼준다.
‘완전 대박이잖아?'
그야말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분.]
수금할 시간이었다.
이준혁은 흡혈귀들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좋지 못한 편이었다.
놈들의 손에 신아영과 김지태를 잃었기 때문이다.
흡혈귀들을 상대할 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지는 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캬아아악!"
흡혈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가 단신으로 던전 안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동료들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수십 마리의 흡혈귀들이 그를 향해 달려드는 중에도 이준혁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지닌 능력이, 흡혈귀들의 천적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워터밤.'
그의 머리 위에 생겨난 물 폭탄이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수천 조각의 물방울로 터져나갔다.
엄청난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물방울은 굉장히 위력적이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살상력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푸슉!
몰려드는 흡혈귀들의 몸에 자잘한 상처 정도는 손쉽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컨트롤 워터'
상처가 생긴 채로 이준혁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흡혈귀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상처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는 주성분이 물이었고, 이준혁의 컨트롤 워터 스킬은 일정 반경 안에 있는 모든 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게 가능했다.
“크아아악!"
“캬아아아-!"
사방에서 흡혈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들의 몸속에서 모든 피가 반대 방향으로 역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쇼크사 하고도 남을 고통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흡혈귀들은 평범한 인간보다도 전체적인 내구도가 뛰어났으며 일정 수준의 재생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죽지 못하는 것은 이준혁이 그들의 심장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놈들의 혈액에 대한 권한을 획득한 순간부터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흡혈귀들의 심장을 터뜨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이준혁의 의지였다.
“커헉, 컥!"
흡혈귀들은 역류하며 전신의 혈관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핏발선 눈으로 신음하고 있는 흡혈귀들을 한 번 훑어보던 이준혁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퍼억!
그가 한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가장 멀리 있던 흡혈귀들의 심장이 터져나갔다.
이준혁이 자신의 힘이 닿지 않는 범위를 벗어나기 직전에 흡혈귀들의 심장을 터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억! 퍽!
심장이 폭발하며 쓰러지고, 이내 시체가 되어 사라지는 동료의 모습을 보며 흡혈귀들은 공포에 떨었다.
현재 별의 힘의 최대치인 3성까지 강화된 이준혁은 이전보다도 배는 강해져 있었다.
스킬의 숙련도와 위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것이다.
이준혁은 그 모든 과정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압도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음에도 이준혁의 눈은 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런 감정 없이 힘을 휘두르던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되살아 난 것은 던전의 보스인 상급 흡혈귀와 마주했을 때였다.
철컥
핏빛 갑옷을 입고 투핸드소드를 들고 있는 놈의 모습은 그때 마주했던 놈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신아영의 목을 베고, 김지태의 심장을 꿰뚫었던 상급 흡혈귀와 완전히 똑같은 모양새였다.
"...찾았다."
그동안 미친 듯이 흡혈귀 던전을 공략했던 이유.
눈앞에 있는 저놈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크레이트 워터.”
이준혁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금세 반경 수십 미터에 이르는 범위가 물에 잠겼다.
그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첨벙! 첨벙!
갑옷을 입은 흡혈귀가 빠른 속도로 이준혁을 향해 돌진해왔다.
처음에는 찰팍거리던 물이 이준혁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릎 바로 밑에까지 잠길 정도로 깊은 수위가 되었다.
흡혈귀는 사소한 것들을 무시한 채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휘익!
그러나 흡혈귀의 검은 이준혁에게 닿지 못했다.
어느새 흡혈귀의 전신을 타고 올라온 물들이 촉수처럼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촤아아-
다리를 타고 올라온 물은 점점 기세를 불려나가더니 아예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 흡혈귀를 그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워터 밤."
이준혁이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흡혈귀의 전신을 박살 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 번 심장이 박살 난 흡혈귀는 되살아날 수 없었으니까.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시스템이 직접 던전 공략 완료를 선언했음에도 이준혁은 놈이 죽은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도 이렇게 흡혈귀의 심장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몇 번이나 놈의 심장을 박살냈었다.
그러나 놈은 죽지 않았고,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서 신아영과 김지태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때 내가 지금처럼 강했었다면.'
지금 이 힘이 김재현의 능력 덕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부분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좀 더 노력했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 전투에 활용한 기술들은 그날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연구하고 시험해본 결과물이었으니까.
이준혁은 눈앞에 생성된 던전 출구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더 강해져야 해.'
그는 던전 출구로 나서며 비틀린 미소 지었다.
'아직 9번 더 남았다.'
던전의 특성상 똑같은 구조와 똑같은 보스몹이 등장한다.
‘이번엔 쉽게 죽지 못할 거야.'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건설 가능 항목에 'D급 인스턴트 던전하급 흡혈귀 동굴', 'C급 인스턴트 던전중급 흡혈귀의 집', 'B급 인스턴트 던전상급 흡혈귀 저택'이 추가됩니다.]
영역 안에 있는 흡혈귀 던전을 모두 처리하니 새로운 인스턴트 던전이 추가됐다.
'흡혈귀 던전이라.'
종류는 다르지만 신격을 흡수당한 릴리트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신격을 흡수당한 릴리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시스템에 예속당했다.
아예 릴리트 자신이 환수가 되어 버렸으니 모든 것을 흡수당했다고 할 수 있었다.
흡혈귀의 경우에도 인스턴트 던전의 형식으로 시스템에 흡수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스템은 다른 신격을 잡아먹는 게 가능한 건가?”
원래 신격을 가진 존재끼리 그러한 포식 행위가 가능한 것인지, 시스템만이 가진 특별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때였다.
[재현님. 계십니까?]
드물게 김다빈 쪽에서 먼저 텔레파시를 전해왔다.
[무슨 일이시죠?]
<[Episode 24] 연구 (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