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25] 휴가 (2) >
김다빈은 갑자기 주어진 휴식에 당황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자신의 빈 자리를 유혜린이 대신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유혜린이라고 해도 모든 업무에 관해서 알진 못했다.
당장이라도 텔레파시를 보내 업무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무실에 가지 말라는 김재현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노트북이라도 보내달라고 할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업무 관련 자료는 사무실 노트북에 꽂혀 있는 USB에 모두 저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에게 가져와달라고 부탁하거나, 거래소를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수도 있었다.
'그냥 진행 상황 체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건 일하는 게 아니라 쉬는 거니까.'
얼마나 뇌가 업무에 절여져 있는 것인지 김다빈은 업무 상황을 체크하는 것을 독서를 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일 중독 증세가 심각할 정도였던 김다빈은 업무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결론을 내린 김다빈은 그녀가 평소 가장 신뢰하는 팀원인 유혜린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혜린씨. 시간 되시면 퇴근하실 때 사무실에 있는 제 노트북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업무 외적인 사적인 지시였지만, 이 정도 부탁은 할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얼마 뒤, 머릿속에서 김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빈씨. 노트북은 왜 필요하신 건가요?]
김다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시간 날 때 업무 관련 서류나 잠깐 읽어볼까 하고...]
자기합리화를 하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도 결국 업무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없었다.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단호한 대답이었기에 살짝 한숨을 쉬며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김다빈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일주일... 뭘 해야 하지?'
일을 하지 않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정확하게는.
‘어떻게 쉬어야 하는 거야?'
쉬는 법을 까먹어 버린 상태였다.
휴식이라고 해 봤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게 떠오르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내린 결론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집안일이나 할까.'
가만히 있기에는 몸이 너무 근질근질했다.
청소기를 꺼내 드는 김다빈을 향해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다빈아? 왜? 뭐 흘렸어?"
“아니요. 가볍게 청소나 하게요.”
"갑자기 웬 청소?"
"그냥 심심해서요."
위이이잉-
그러나 청소는 생각보다 할 게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박상미 여사께서 아끼시는 로봇청소기들이 정기적으로 청소하며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 몇 올을 빨아들이고 나니 바닥에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흐음...."
그나마 가장 더러운 곳은 동생인 김민호의 방이었다.
‘어우 냄새.’
어떻게 들어올 때마다 홀아비 냄새가 나는 것인지.
창문부터 열고 청소기를 돌리려는데 문득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살짝 확인이나 해 볼까.’
최근에 발견된 인트라넷은 이곳 아파트 단지에 국한되어 있는 연결망이었다.
서버를 만든 사람이 아파트 내부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였다.
김다빈은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작성했던 게시글을 확인했다.
서버 관리자와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아직까지 관리자로 보이는 이의 답변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쉽네.'
이 서버를 만든 사람 혹은 사람들이 합류하게 되면 통신망 관련 프로젝트에 커다란 진척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좀처럼 만나주질 않으니 답답한 심경이었다.
처음에는 영양가 없는 글만 쏟아지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정보가 적힌 게시글도 많아진 상태였다.
그런 글들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베스트 게시글이 되었고,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BEST} 헬스장을 이용해야 하는 이유(123)]
[{BEST} 고블린 던전 완전 공략 (87)]
[{BEST} 거래소 활용 꿀팁 (66)]
여러 가지 베스트 게시글 중에서도 김다빈의 눈에 들어오는 특이한 글이 하나 있었다.
[{BEST} 서면 디저트 맛집 추천 (33)]
‘디저트?'
멸망이 찾아오기 전의 김다빈은 디저트라면 환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사무실 책상 한쪽은 사탕과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을 만큼 단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하루 2시간 운동도 감내할 만큼 디저트를 사랑했다.
그러나 몬스터가 등장하고 맛있는 디저트를 팔던 카페들은 모두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과자 같은 것들은 상점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었지만,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먹는 케이크 한 조각과 그것들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김다빈은 제대로 된 디저트에 목말라하던 중이었고, 이름 모를 누군가가 올린 저 게시글의 제목은 그녀의 마음을 저격했다.
[[BEST} 서면 디저트 맛집 추천 (33)]
지금 장사하는 곳 중에 딱 세 곳만 추천함.
넉아웃 ★★★★☆
다양한 디저트. 전체적으로 상타.
커피나 마실 것도 전부 먹을만함.
카뉴
빵이나 디저트보다는 생딸기가 맛있음.
몰레 ★★★★★
존맛... 세 곳 중 유일하게 거래소에서 판매 중. 근데 케이크만 있어서 카페에서 직접 먹는 걸 추천.
게시글에는 카페 세 군데의 자세한 위치와 장점 그리고 추천 메뉴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 두 곳은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곳들이었다.
'넉아웃이랑 몰레!'
평소 자주 가던 카페의 이름을 들으니 어찌나 반갑던지.
"거래소에서 판다고?"
곧바로 거래소를 활성화시켜 몰레 케이크를 찾아낸 김다빈은 8개 남아 있던 케이크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구, 구입!'
케이크가 품절 되기 직전, 기적처럼 마지막 하나를 구입할 수 있었다.
지이잉-
구입과 동시에 종이 상자에 담긴 예쁜 조각 케이크 하나가 허공에서 출력되었다.
"헐."
세상이 변하기 전에 보았던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는 케이크의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종이 상자 안에 놓인 플라스틱 포크를 이용해 살짝 떠먹는 순간.
“...”
도파민이 머릿속 가득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한입 떠먹을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던 김다빈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깨닫고 말았다.
케이크를 깔끔하게 먹은 뒤 10분 만에 샤워를 끝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대충 말린 젖은 머리가 옷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런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제일 가까운 곳부터'
편한 옷과 운동화를 신은 김다빈은 가볍게 달리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건...'
그곳에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신호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잘 정비된 도로에서 차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멀찍이 장사를 하고있는 가게와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가 등장하기 이전의 일상적인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지난 몇 달간 김다빈의 행동반경은 이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무실이 아파트 단지 내부에 존재했기 때문에 사실상 최근 몇 달간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아파트 단지 밖의 풍경을 목격했던 것은 싸이클롭스가 찾아왔을 때였다.
압도적인 덩치로 모든 것을 파괴하던 그 무지막지한 거인이 도시를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인의 발길질에 뭉개졌던 집들도, 도로 한가운데에 깊게 패여 있던 발자국도, 곳곳에 방치되어 있던 몬스터와 사람들의 시체도.
그것들이 모두 하룻밤의 악몽 속의 풍경이었다는 듯, 눈앞에는 멀쩡한 도시의 풍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나 바뀌었구나.’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업무를 처리하며, 서류상의 수치를 보며 어느 정도로 개선되었는지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글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으로 깨닫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예쁘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 평범한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끔 밖으로 나와서 이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어질 만큼.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던 디저트마저 잊고 그 일상적인 풍경에 넋이 나가 있던 그때.
"지금 다빈씨 표정이 어떤지 아세요?"
"네?"
돌아본 그곳에는 김재현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밖에서 고생하시다가 처음 시민권을 얻어서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때 짓는 표정이랑 똑같아요.”
"아..."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처음 이곳에 찾아오신 분들이 짓는 표정이요."
"요즘에는 그런 표정을 볼 일이 거의 없었죠. 그런데 다빈씨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김다빈은 김재현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봤다.
'전쟁....'
그랬다.
문자 그대로 자신은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일까.
만족스러운 디저트를 먹은 탓일까, 그동안 비정상적이었던 자신의 일상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는 게 가능해졌다.
'나는.......'
사람들이 죽는 게 싫었다.
모든 보고가 들어오는 위치에 섰을 때, 이 세상의 잔혹함에 대해서 알게 됐다.
구호팀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지 알게 됐다.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보고로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몬스터에게 죽고, 식량이 없어서 죽고, 물이 없어서 죽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조금 더 빠르게 일하지 않으면, 조금 더 많이 일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사람이 죽었다.
그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을 계속해서 몰아붙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망한 이후의 자신은 전쟁터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잠겨 있었던 그녀의 눈물샘이 터졌다.
"흐윽."
“...다빈씨?”
김다빈은 당황스러워하는 김재현을 향해 물었다.
"재현님. 이제 이제 다 괜찮은 거지요?"
"...네?"
“다들, 다들 이제 괜찮은 거죠? 저 때문에 죽는 사람들은 없는... 거죠?”
그녀의 울음이 점점 거칠어지던 어느 순간 김재현이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빈씨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없어요.”
김다빈은 눈물을 닦아내며 김재현을 바라봤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오히려 다빈씨가 직접 살린 생명이 수백, 수천 명이에요. 이 평온한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낸 것도 당신이고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울고만 있는 김다빈에게, 김재현이 확신을 담아서 말해주었다.
"다빈씨는 최선을 다했어요.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그 말에 눈물이 터졌다.
그동안의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말이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빈씨가 지켜낸 이 풍경, 오래 보고 싶으면 건강하게 살아야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적당히 쉬면서 더 오래 일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뒤에 이어진 그의 진심에 피식 웃음이 피어 나왔다.
"그러니까 되도록 오래 부려 먹고 싶어서 휴가를 보내셨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할 수 있으면 평생 부려 먹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김다빈은 옅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대답했다.
“네, 기꺼이.”
<[Episode 25] 휴가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