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sode 27] 방사능 유출 (1) >
산복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아파트 단지.
이곳에 둥지를 튼 켈리칸들의 숫자만 해도 세 자릿수에 달했다.
박살난 창문의 흔적들만 봐도 이곳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가 펼쳐졌을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켈리칸에게 집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빼앗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생존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했다.
"아빠, 배고파....”
배고픔에 칭얼거리는 어린 딸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오병헌은 자신의 딸을 향해 말했다.
“아빠가 오늘은 꼭 맛있는 걸로 구해올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줄래?”
딸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할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예슬이, 착하다. 조금만 자고 있을래?”
"...."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최대한 움직임을 제한하고, 틈만 나면 잠을 잤기에 잠이 오지 않을 테지만 오예슬은 억지로라도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아빠 금방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위태로운 촛불처럼 일렁거리는 듯한 딸 아이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가 몸을 낮추어 바닥에 몸을 대자.
스르륵-
오병헌의 몸이 바닥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이내 그의 눈에 콘크리트 더미 안쪽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고, 금세 아래층의 모습이 보였다.
으득-
아래층의 거실에는 켈리칸 한 마리가 잡아온 사냥감을 뜯고 있었다.
고블린으로 보이는 것의 머리를 통째로 집어 삼키는 켈리칸의 모습을 보며 오병헌은 고민했다.
'어떡한다.'
지금까지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운과 오병헌의 능력 덕분이었다.
벽을 통과할 수 있는 그의 능력 덕분에 아파트 전체에 숨어 있는 식량들을 구할 수 있었고, 식수는 물탱크로 해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능력도 만능은 아니었다.
오병헌의 능력으로 벽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정도였고, 벽 안에서 움직이는 속도도 답답하리만치 느렸다.
게다가 10분을 다 쓰면 하루 정도는 기다려야 다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최대한 전략적으로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은 움직이자.'
오병헌은 천장에서 슬라임처럼 떨어져 나왔고,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그러자.
-?
켈리칸이 곧바로 반응했다.
식사를 멈추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봤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끼익?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켈리칸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식으로 빠르게 1층까지 이동한 오병헌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후욱."
이곳도 박살이 난 채로 엉망진창이었지만, 다행히 몬스터는 없었다.
켈리칸의 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올 만큼 간이 큰 몬스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간 다음, 바로 옆 동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지하 주차장을 이용한다면 켈리칸들의 눈에는 안 뛸 수 있었지만, 빌어먹게도 그곳에는 다른 괴물이 살고 있어서 갈 수 없었다.
지금 이 방식이 그나마 제일 안전한 것이다.
잠시잠깐 켈리칸들의 눈에 노출된다고 해도 금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몬스터들이 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라 그런지 심장이 떨렸다.
며칠간 고심하며 정한 포인트에 손을 대고 심호흡을 몇 번 내쉰 오병헌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능력을 사용하자 그의 몸이 벽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내 바깥 풍경이 보였다.
아무런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수풀.
그리고 중간에 서 있는 나무 하나가 시야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그렇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 그가 옆동을 향해 달려가던 그 순간.
투두두두-!
갑작스럽게 들려온 굉음에 그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허억!”
다급하게 달려간 그는 빠르게 능력을 사용해 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성공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온 오병헌은 굉음이 들려왔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였지?'
그 순간.
투두두두-!
다시 한 번 굉음이 들려왔고, 이번에는 그것이 어떤 소리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총 소리?"
군대에서나 들었던 그 친숙한 소리가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가 왔다고?'
그러나 그는 이내 희망을 버렸다.
‘군대가 온 것 치고는 총 소리가 너무 적다.’
기껏해야 몇 명이서 총을 쏴 갈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운 좋게 총을 구한 놈들이 멋모르고 이곳에 들어 왔나보군.'
이곳이 켈리칸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저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얼마나 많은 켈리칸들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겠지.
그들이 맞이할 결과는 뻔했다.
잠시 후, 계속해서 들려오던 총소리가 한순간에 멎어버렸다.
굳이 두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들이 어떻게 됐을 지는 뻔했다.
괴물새 놈들에게 잡아먹혔겠지.
‘역시 이렇게 되는군.'
약간이나마 기대했었던 오병헌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는 원래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벽으로 스며들어 능력을 사용해 위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돌아갈 때 힘이 부족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계단을 이용해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무런 몬스터도 만나지 않은 그는 10층에서 처음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너무 위로는 갈 필요 없겠지.'
켈리칸들은 대체로 고층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확인해본 결과 꼭대기 층에는 반드시 켈리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둥지를 트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고층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오병헌과 오예슬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상대적으로 저층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켈리칸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덕분에 지금까지 놈들의 침입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없어라.'
켈리칸이 있다면 탐색은 포기해야 한다.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목숨을 헌납할 순 없었으니까.
스르륵-
다행히 1001호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괴물새의 배설물이다.”
거실 한쪽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괴물새의 배설물을 볼 때, 이곳은 둥지로 활용되고 있는 장소였다.
그저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이라는 소리다.
‘기회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놈들은 사냥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둥지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그러니 켈리칸의 둥지를 뒤질 수 있는 기회는 웬만해서는 잘 찾아오지 않는 천우일우의 기회였다.
그리고.
부스럭 -
‘심봤다!’
이곳에 살던 사람이 라면을 좋아했던 것인지, 주방 선반에 라면 봉지가 가득했다.
게다가 햇반, 참치캔과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과 콜라, 그리고 맥주로 가득했다.
미리 준비해온 가방 안에 최대한 물품을 욱여넣은 오병헌은 아쉬운 표정으로 남아 있는 물품들을 바라봤다.
맥주가 굉장히 아쉬웠지만,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콜라를 하나 더 챙겼다.
'가자.'
오늘은 더 이상 다른 곳을 뒤질 필요도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능력을 사용해서 바닥을 통과하는 게 아닌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돌아온 그는 무사히 원래 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제는 집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운이 좋았어.'
처음부터 대박을 찾아낸 것도 기뻤지만, 그 과정에서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남은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벽 안에 스며든 채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엄청 좋아하겠지?'
비록 미지근한 콜라지만, 딸이 행복해할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천천히 집을 향해 올라가고 있던 그때.
"꺄아아아악!"
난데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이 주변에 자신과 딸을 제외하고는 생존자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지 오래였다.
그런고로 이 비명 소리는.
'예슬아!!'
오예슬의 것이란 소리였다.
'씨발!'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기 위해 가방을 벗어던져버리고는 벽을 헤엄치듯이 움직였다.
그렇게 딸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끼에에엑!
베란다 창문을 박살내고 그곳에 쌓아둔 잡동사니들을 헤집고 있는 켈리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예슬은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예슬아!"
오병헌은 곧바로 오예슬을 끌어안아 능력을 발동시켰다.
스르륵!
곧바로 바닥으로 녹아들 듯이 사라진 그들을 보며 켈리칸이 포효했다.
-끼에에에엑!
그리고 그것을 들은 켈리칸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어떡하지?'
이제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
딸과 함께 벽에 스며든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움직이는 속도도 그만큼 느려졌다.
이대로 몇 분만 지나면 힘이 바닥나며 강제로 바깥으로 튀어나가게 될 것이고, 마구잡이로 몰려든 저 켈리칸들에 의해 전신이 찢겨져 나갈 것이 다.
'예슬이만이라도 살려야....'
그러나 도무지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오랜만에 인간을 발견한 켈리칸은 포기를 몰랐다.
'안 돼!'
결국 그들은 무기력하게 다시 튀어나오게 되었고, 그들의 냄새를 맡은 켈리칸은 한층 더 흥분했다.
-끼에에엑!
그 순간.
푸욱!
어떤 파열음과 함께.
쩌적 저저적-
베란다 전체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뭐, 뭐야?'
그 속에 있었던 켈리칸은 외마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새하얗게 얼어붙은 켈리칸의 시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그 때.
“어머. 사람이네?"
부서진 베란다 너머로 얼음 활을 든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김다빈이 장호원을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저번에 분명 고리 원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죄송합니다. 확실하게 확인해 보지도 않고 고리 원전이라고 말했던 제 잘못입니다.”
예지몽을 꾼 본인의 입으로 고리 원전이라고 말했으니, 모두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원자력 발전소라고는 그것밖에 들어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고리 원전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절대자의 눈을 통해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텔레파시를 사용해 장호원을 향해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그가 꾼 예지몽에서 나온 원자력 발전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는 이상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인지한 이상 가장 가까운 곳부터 공략을 시작했겠지.’
그때도 일 순위는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고리 원전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다른 원전들도 정리하려 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대로 작전을 지속하며 한국에 있는 원전을 모두 점령할 생각이었다.
'약간의 편법을 쓰면 전초기지로 삼을 수 있는 것 같고.'
두 사람의 대화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방금 고리 원전 쪽에서 느껴졌던 미세한 진동이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이들도 있는 것 같았지만, 절대자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는 그 미세한 흔들림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지진이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 지진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월성 기지가 터진 건가?'
고리 다음으로 가까운 경주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
그곳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확률이 높았다.
<[Episode 27] 방사능 유출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