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142화 (143/175)

142화 [Episode 32] 구세주 (2)

갑작스레 나타난 물자들에 회의실에는 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학기 사령관이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상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그것을 개봉하여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회의실 내부에 있는 촛불이 위태롭게 그것의 정체를 밝혔다.

그곳에 있는 컵라면을 보고는 그가 실소했다.

“허.”

이학기 사령관은 그것을 개봉하여 내용물이 온전한 컵라면이라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문병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김재현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분의 말을 전하는 대리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것들을 만든 것입니까?”

“아니요. 이것들은 모두 재현 님이 만들어 주신 물건들입니다. 지금도 이곳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대화를 듣고 계십니다.”

“허허. 부산에서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학기 사령관은 다른 상자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내더니 포장을 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회의실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는 그것을 한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

“구세주가 따로 없군요.”

“좋은 분이십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회의실이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진짜라고? 이게 전부……?”

“정말 먹을 수 있는 겁니까?”

“독 같은 게 든 건 아니겠죠?”

“꿀꺽꿀꺽꿀꺽. 여기! 여기에 물이, 깨끗한 물이 있어!”

사람들은 흐릿한 촛불에 의지하여 정신없이 보급품들을 탐했다.

오직 제일 처음에 보급품의 상태를 확인했던 이학기 사령관만이 문병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다들 조용.”

이학기 사령관의 카리스마 담긴 목소리에 정신없이 보급품을 탐하던 간부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췄다.

다시 조용해진 회의실 속에서 사령관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지금 이 대화를 그분께서 지켜보고 있다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직접 묻고 싶네요. 저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소통의 반지를 사용해 문병호에게 말했다.

[시민권을 받아들이고, 우리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문병호는 내 말을 그대로 전했고, 사령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까? 저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상태입니다. 막말로 생존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노예가 된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령관님!”

“노예라니요!”

곳곳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학기 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네들은 살고 싶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시민들을 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

회의실의 간부들을 쏘아붙이던 사령관은 이내 안기태 대위를 향해 물었다.

“안기태 대위.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그 조직에 들어간 뒤로 ‘김재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생기지는 않았나?”

안기태 대위는 약간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감정이 생기기는 했습니다. 다만, 사령관님이 걱정하시는 쪽과는 거리가 멉니다. 순수한 제 판단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회의실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저 말은 세뇌를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아닌가?”

“어쩐지 아까부터 그 조직에 대해 너무 우호적으로 말한다 했어.”

“약간 과장이 섞인 것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이학기 사령관은 간부들의 의견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설령 세뇌를 받는다고 해도, 자네들은 눈앞에 있는 이 물자들을 포기하려고 하는 건가? 엄진수 중령. 사흘간 굶은 가족에게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아닙니다.”

“그렇군. 현명한 판단일세.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회의실의 분위기를 장악한 그가 문병호를 향해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어떤 일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궁금하긴 하군요. 혹시 귀하의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세뇌’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그가 저런 쇼를 벌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학기(Lv. 25)』

각성 능력 : 진실의 귀

귀로 들은 내용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문병호가 대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비슷한 효과는 있을 겁니다.”

어?

그는 진지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저는 처음 재현 님을 봤을 때부터 약간의 경외심과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재현 님의 힘 때문인지, 재현 님이 온 힘을 다하여 저희 할머님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재현 님이 주신 힘 덕분에 유일한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지나치게 솔직담백한 그의 답변에 이학기 사령관의 눈이 깊어졌다.

* * *

이학기 사령관은 속으로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모두 진실이다.’

자신을 ‘김재현’의 대리자라고 소개했던 의문의 남자가 한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경외심과 존경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세상은 뒤바뀌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듣고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의 대답은 세뇌당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다.’

정말로 세뇌를 당했다면, ‘우리 조직에 세뇌 같은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테니까.

‘묘하군.’

세뇌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히려 신뢰가 생길 줄이야.

이학기는 회의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박스들을 둘러봤다.

이 정도 양이라면 급한 불을 끄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안기태 대위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

김재현이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힘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몬스터가 침입을 막아 주고, 식량이 넘쳐나며, 총기와 탄약 등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고, 난민들이 대피한 장소에는 전기, 수도, 가스가 공급된다고 한다.

그 모든 말들이 진실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 같이 죽는다.

다른 선택지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세뇌를 당한다하더라도 자신은 시민들을 이끌고 그 조직에 몸을 담을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끈질기게 물어본 데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각성자 집단을 뭉쳐 놓은 특수 조직.

자기 한 몸 정도는 챙길 수 있는 이들에게는 선택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을 듣고는 모두 함께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감일 뿐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를 믿어도 괜찮겠다는 직감이 왔다.

그러나 자신을 믿어 주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단순히 감에 걸 수는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이학기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쪽 대표분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남자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수락하는 그의 모습에 약간 놀랐다.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이학기 사령관은 밖으로 나서기 전 간부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여기 있는 보급품들을 시민들에게 모두 나눠 주도록.”

“예, 사령관님.”

밖으로 나가 남자의 뒤를 다라 복도를 한참 걷던 와중에 하늘이 보이는 창문이 나타났다.

그때 그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제 손을 잡아 주세요.”

“?”

“이편이 빠르거든요.”

그의 진실함이 전해졌기에 이학기 사령관은 별생각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슈슉―

“허억!”

토할 것 같은 어지럼증과 함께 발밑이 허전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학기 사령관이 구역질을 하기도 전에,

“좀만 참으세요.”

슈슉!

두 번째 텔레포트를 경험하게 되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세 번째 텔레포트만에 이학기 사령관은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우웨에에엑!”

그와 동시에 방금 먹었던 초코바를 게워 냈다.

헛구역질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며칠간 먹은 게 그것밖에 없었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쯤.

뚜벅- 뚜벅-

지하철 역사로 통하는 계단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학기 사령관은 구역질을 멈추곤 홀린 듯이 그곳을 내려다봤다.

그곳에서는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기름기 없이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

자그마한 얼룩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옷.

무엇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맑고 잔잔한 눈.

“아…….”

이학기 사령관은 그를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지배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눈에 그가 특별하다는 것을 인지하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 존재감, 카리스마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경외심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김재현이라고 합니다.”

* * *

이학기 사령관과 직접 대면한 이후로 그의 조직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흡수되어 갔다.

그 결과.

[시민의 숫자가 500,000명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의 숫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인벤토리’를 개방합니다.]

결국, 시민의 숫자가 50만을 돌파해 버리고 말았다.

[시민들의 ‘인벤토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집구석 절대자의 창고’ 스킬 레벨이 부족합니다.]

[스킬을 올려 주십시오.]

인벤토리가 어떤 역할을 할지는 그 단어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시민에게 개인 창고가 생기는 건가?’

그 이후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에 의하면 아무래도 인벤토리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창고 스킬 레벨을 올릴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서울에 진입하기 직전, 스킬 포인트를 모두 소모해 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현재 집구석 선포의 레벨은 37에 불과했다.

새로운 스킬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는 아직 레벨을 3번이나 더 올려야 하는 것이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이미 시민 사이에서는 인벤토리와 비슷한 기능을 사용하는 방법이 유행 중이었다.

바로 거래소를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개인당 할당된 20개의 슬롯 중에서 자신이 쓸 물건을 올려 두고 24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올려 두게 될 경우 당연하게도 24시간이 지나도록 상품은 팔리지 않는다.

그렇게 유찰된 상품은 개인 보관함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상품의 경우 일주일이라는 유예 기간 동안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거래소에 등록되어 있는 동안에는 음식이 상하거나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시민, 특히나 몬스터 사냥을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니 인벤토리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스킬 포인트를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어디서 공짜 스킬 포인트라도 떨어지지 않는 이상에야…….’

그때였다.

[시민 문병호가 오늘 수행 가능한 퀘스트 횟수를 모두 소모하였습니다.]

[시민 문병호가 수행한 퀘스트들을 평가합니다.]

[…… 평가 중 ……]

이학기 사령관이 이끄는 시민들이 건대 입구 역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가신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일일퀘스트를 부여했고, 완료했을 뿐이었다.

[평가 완료.]

가신들이 늘어난 만큼 하루에도 몇십 번씩이나 보는 알림이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못했다.

그런데.

[잭팟 당첨!]

[축하드립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확이 터졌다.

‘병호야, 또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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