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구석절대자-169화 (170/175)

169화 [Episode 36] 재정비 (5)

[직업연구소에서 직업 ‘정령사’의 연구를 완료했습니다.]

‘드디어.’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총기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의 존재였다.

대부분 사건 사고가 이놈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었다.

정령사는 그런 몬스터들의 대항마가 되어 줄 직업이었다.

‘문제는 전직 난이도인데.’

모든 직업에는 나름대로의 전직 퀘스트가 존재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 신뢰도 100을 달성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령사의 연구 조건이 사제와 같은 직업연구소 5레벨이었으니, 비슷한 난이도란 뜻이겠지?’

현재 사제로 전직한 이들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신뢰도 100이라는 수치가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정령사의 전직 조건은…… 정령과의 계약?’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상태창에서도 정령 친화력과 같은 항목은 없었으니까.

‘직접 전직시켜 보면 알 수 있겠지.’

처음 정령사로 전직하게 될 사람은 이미 점찍어 둔 상태였다.

[정소라 씨. 시간 괜찮으신가요?]

합류하자마자 충성도 100, 신뢰도 100을 찍었던 신기한 여자였다.

애초에 정소라 덕분에 사대 정령왕들을 환수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정령사의 직업이 생겨난 셈이었다.

말하자면 정소라 쪽이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신이 되면서 [정령사] 칭호를 획득하기도 했으니까 직업 시너지 효과도 발동할 거고.’

여러모로 최적의 대상이었다.

“네! 시간 됩니다!”

정소라는 진중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활기차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이쪽이 훨씬 나이에 맞아 보이기도 하고.’

열여덟.

모두를 책임지려고 하던 모습보단 지금처럼 순수한 미소를 짓는 쪽이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정소라에게 전직 퀘스트를 부여했다.

《전직 퀘스트》

퀘스트 내용 : 정령과 계역을 맺으세요.

제한 시간 : 23시간 59분 57초

보상 : 직업 ‘정령사’ 전직

실패 페널티 : 전직 실패.

그녀에게 정령사 전직 퀘스트를 부여하는 순간.

화르륵―

푸른 불꽃 하나가 피어나더니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가다가 일정한 크기가 되어서 멈추었다.

‘이런 식이었군.’

정령사는 사제나 사냥꾼처럼 직업 전직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정령과의 계약을 맺으라는 건지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전직 퀘스트를 부여하면 정령계로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인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겠어요?]

“네…….”

정소라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푸른 불꽃 안으로 들어갔다.

화르르륵―

푸른 불꽃 안에는 사방이 불타고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광활한 벌판이 온통 불꽃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정면에는 커다란 불의 산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수백 개의 불덩이가 하늘을 넘실거리고 길거리에는 갖가지 동물들의 형상을 하고 있는 불의 정령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정소라를 향해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어…… 안녕?”

그녀가 인사하자 불의 정령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작은 불새들이 정소라의 몸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애교를 부렸고, 정소라는 미소 지으며 불의 정령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하하. 간지러워.”

작은 불꽃들이 그녀의 발 주변에서 춤을 추었고, 거대한 불의 정령들은 먼발치에서 그녀를 구경했다.

절대자의 눈에는 그런 이들의 등급이 간단하게 보이고 있었다.

도깨비불 형태로 작은 불꽃의 형태를 가진 것들은 대부분 「최하급 불의 정령(Lv. 8)」 이었고, 참새와 비슷한 크기를 가진 이들은 「하급 불의 정령(Lv. 16)」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소라보다도 몇 배는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불새의 경우 「상급 불의 정령(Lv. 43)」으로 보였다.

‘대체로 크기가 클수록 등급과 레벨이 높은 편이네.’

그들 모두가 정소라에게 호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중 새의 형상을 한 상급 불의 정령이 제안했다.

[이토록 흥미를 끄는 인간은 오랜만이군. 나와 계약을 맺는 것은 어떻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정소라 주변에 모여든 정령 중에서는 가장 레벨이 높은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소라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화르르륵―

무언가 압도적인 존재감이 주변을 휩쓸었다.

불의 정령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길을 터 주었고, 그곳에는 화려한 불의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최상급 불의 정령(Lv. 51)」

존재감만큼이나 높은 레벨을 가진 정령의 등장이었다.

그는 주변 정령들이 터 준 길을 따라 저벅저벅 접근하더니 정소라의 앞에 무릎 꿇었다.

기사가 말했다.

[손을…….]

그 말에 정소라가 손을 뻗자 기사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라이언 플레임하트. 이름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음. 저는 정소라라고 해요.”

[소라 님.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불의 기사는 그 말과 함께 정소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화르륵―!

정소라와 기사의 주변으로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고, 그녀가 전직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을 들을 수 있었다.

[시민 정소라가 전직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비용 50,000,000 원이 소모됩니다.]

[시민 정소라가 ‘정령사’ 직업을 획득합니다.]

계약이 끝나고 정소라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단하군.’

자신을 라이언 플레임하트라고 소개한 최상급 불의 정령.

그에게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엄청났다.

‘평소에 정소라가 다루던 정령들은 기껏해야 중급 정도 수준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서울의 한 지역의 우두머리를 해 먹은 사람이 정소라였다.

그런 그녀가 최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떤 활약을 하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불의 기사는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불의 정령들만 나타난 것은 아직 다른 정령왕의 레벨이 10이 되지 못한 탓이겠지?’

불의 정령왕인 샐리온의 레벨이 10이 되면서 나타난 직업이 바로 정령사였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애들도 부지런히 생명력을 먹여 두는 건데.’

그때였다.

“진짜 짜증 나~ 왜 자꾸 깨우는 거야~”

[잠은 밥 먹고 자면 된다.]

불의 정령왕 샐리온이 다른 정령왕을 데리고 나타났다.

농구공만 한 크기의 불덩어리.

직전에 보았던 최상급 정령왕은커녕 다른 상급 정령들과 비교하여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이딴 게 정령왕?’

위압감 넘치던 다른 불의 정령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

[……뭐지? 오늘따라 네 눈빛이 기분이 나쁘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가지고.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오늘도 고마워. 바로 시작하자.”

세계수의 생명력을 뿌리기 시작하자 다른 정령왕이 얼른 달려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밥이다­!”

[엘퀴네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영역 내의 물의 힘이 100% 증가합니다.]

[물의 힘이 최대 효율에 도달했습니다.]

레벨 업 직전인 상태였던 것인지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엘퀴네스의 레벨이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정령사’가 물의 정령과의 계약이 가능해집니다.]

또르륵

멍하니 있던 정소라의 앞에 이번에는 물웅덩이가 나타났다.

‘다시 전직퀘스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자격을 갖추는 순간 이런 식으로 정령계로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정소라는 내가 지시할 필요도 없이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풍덩!

바닷속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물방울을 닮은 물의 정령들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최하급 물의 정령(Lv. 7)」

주먹만 한 물방울 덩어리들은 대부분 최하급 정령이었고, 정소라를 더욱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었다.

갖가지 형상을 취하고 있는 물의 정령들이 정소라의 곁으로 와 춤을 추었고, 의지를 전달하는 게 가능한 몇몇 상급 정령들이 계약을 제안해 왔다.

그러나 불의 정령들과의 경험이 있던 정소라는 잠시 보류하며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계약도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급 이하의 정령들이 그녀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덕분에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깊은 심해에서 목표로 했던 최상급 정령과 만날 수 있었다.

「최상급 물의 정령(Lv. 53)」

처음 계약을 맺었던 라이언 플레임하트보다도 레벨이 높은 물의 정령이었다.

거대한 고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최상급 물의 정령.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대와는 계약을 맺기 어려울 것 같군.]

“어째서죠?”

[그대의 심장에서 불의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일세.]

고래가 거절하자 정소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상급 정령 중 일부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정말이네? 불의 기운이 느껴져.]

[불의 정령 중에서도 최상급과 계약을 맺은 모양이군. 전혀 모르고 있었어. 방금 내가 했던 계약 제안은 잊어 주길 바라오.]

[흥. 실망이야.]

절반 이상의 상급 정령들이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녀의 곁에 남아 있는 정령들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너와 계약을 맺고 싶어. 이름이 뭐야?]

“고마워. 내 이름은 정소라야.”

[나는 아쿠아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우우웅

그렇게 계약을 맺는 것과 동시에 정령계에서 빠져나온 정소라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말했다.

“……재현 님. 피곤해서 그러는데, 잠시만 쉬어도 될까요?”

아무래도 이어서 바람과 땅의 정령들과의 계약이 있을 거라고 오해한 듯했다.

아쉽게도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는 9레벨, 땅의 정령왕인 트로웰은 8레벨밖에 되지 않은 상태.

바람과 땅의 정령과 계약을 맺으려면 아직 시일이 걸릴 것이다.

[편히 쉬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정소라는 젖은 몸을 말리지도 않고 눈을 감았다.

‘정령사 전직은 트로웰까지 10레벨을 달성한 다음에 시작해야겠네.’

보아하니 정령과 계약을 하면 다른 정령들과의 계약이 어려워지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정소라여서 상급이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거겠지.’

‘사대 정령의 가호’라는 능력을 각성한 그녀였기에 최선의 결과를 냈을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계약 없이도 중급 이하는 자유롭게 다루는 정소라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보통은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동시에 계약하는 일은 어려워 보였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네 개의 선택지를 모두 활성화한 다음에 정령사 전직을 시키는 게 좋겠네.’

최상급 땅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이가 중급 물의 정령과 계약을 먼저 맺었다는 이유로 퇴짜 맞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정령들의 수준을 보니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될 것 같군.’

* * *

전라도 광주.

그곳에 파티 하나가 진입하고 있었다.

식량이나 쓸 만한 물건을 파밍하기 위해 대도시를 찾는 파티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은 화순 쪽에서 이곳 광주까지 찾아온 파티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까부터 사람도 몬스터도 아무것도 없잖아.”

파티를 이끄는 리더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확실히…….’

도시는 오싹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생존자가 없다면 고블린이나 오크라도 튀어나와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시체가 하나도 없어.’

도시가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점이다.

사람의 시체도, 몬스터의 시체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이동을 중지하고 돌아간다. 보고는…….”

그런데.

“어?”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를 잘 따라오고 있던 파티원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차르륵―

그 순간 박살 난 유리가 밟히는 소리에 바닥을 바라봤다.

이곳은 이상했다.

피나 시체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데, 이상하도록 유리 깨진 조각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부숴 놓은 듯한―

그 순간 그는 미처 부서지지 않은 차의 백미러와 눈이 마주쳤다.

백미러 안에 있는 자신의 얼굴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슈슉―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