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 한다.
오랜만에 과음을 했더니 속이 너무 불편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이불 안에서 요양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강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학습 능력이 훌륭한 인재로서 대한민국 최고 국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였을지라도, 결석으로 인한 타격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요동치는 속을 애써 다스리며 미친 듯이 강의실로 달려가야지.
숨을 헐떡이며 뛴 덕에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조금 익숙하지 않은 왕을 주제로 삼아볼까 합니다.”
엄청난 숙취로 죽을 맛이었으나, 언제 들어도 집중력을 키우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나는 청력을 집중하며 볼펜을 들었다.
교수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익숙하지 않은 왕이라.
누구를 말하는 걸까.
궁금했다.
“조선 현종.”
현종?
혹시 북벌로 유명한 효종의 아들, 환국 정치 숙종의 아버지 현종?
존재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현종?
나는 눈을 껌뻑이며 교수님을 쳐다봤다.
평소에도 깐깐한 사람이긴 한데 오늘따라 느낌이 묘하다.
싸하다고 할까?
딱 그때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이것은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기 전 나오는 시그널이다.
숙취로 고통받는 상황이었으나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현종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예송 논쟁 시기에 왕이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현종을 어떻게 평가하지?”
“음. 평가라고 할 게 있나요? 예송 논쟁 내내 정국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한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유약한 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재감이 없는 것이고요.”
다행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기에, 나는 간략하게 아는 걸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다시 강의를 이어갈 줄 알았는데, 아직 던질 질문이 남았나 보다.
우리 교수님은 문답 하나하나를 알게 모르게 학점에 반영하기 때문에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문뜩 괜히 과음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때는 맑은 정신이 제일 필요한데 말이다.
“예송 논쟁……. 유약한 왕…….”
이거, 느낌이 더 싸해졌다.
점차 교수님의 눈동자를 피하고 싶어졌다.
슬쩍 시선을 내렸다.
딱 그때 질문이 이어졌다.
“예송 논쟁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
“예송 논쟁은 크게 두 번 발생합니다.”
“1차 예송 논쟁을 기해예송이라고 하며, 2차 예송 논쟁을 갑인예송이라고 하지.”
내게 물어봐 놓고는 본인이 답한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고 공격적인 목소리로.
나는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교수님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닌가?
내가 있는 공간 자체를 보는 걸까?
그러고 보니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의 시선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 부담스러웠다.
속이 너무 울렁였다.
나는 겨우 참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1차 예송 논쟁은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로 발생했습니다. 즉, 양자인 효종의 죽음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할지, 3년 입어야 할지로 다툼이 발생한 겁니다.”
교수님은 내 대답에 설명을 보탰다.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했지.”
“그……렇습니다.”
“목소리를 더 크게 할 수 없나? 내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말하면 들리나? 그리고 왜 그렇게 인상을 쓰나?”
교수님의 목소리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눈동자에는 불쾌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직감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찍혔다.
속도 안 좋은데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당장이라도 강의실을 나가서 해장이라도 하고 심정이었다.
아니,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시원하게 F 학점이 나올 건 불 보듯 뻔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인 모를 교수님의 화를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말을 이어야 한다.
“1차 예송 논쟁 때 현종은 서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2차 예송 논쟁은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가 죽어서 발생했습니다. 이때도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시기로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서인은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했어. 결과는?”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의 편에 섭니다.”
“왜?”
내가 그걸 다 알면 교수님 강의를 왜 듣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한국 최고 대학의 학생답게 여러 서적을 읽었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예송 논쟁과 관련한 내용도 있다.
말하려던 찰나, 냉소적인 교수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 이름이 뭐였지?”
“조경국입니다.”
“그래. 조경국. 혹시 예송 논쟁이 무의미한 예법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뭐…… 물론, 자의대비가 빨리 죽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라고는 생각합니다. 하하하…….”
“…….”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농담을 슬쩍 꺼내 봤는데 더 암울해졌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로, 자의대비가 없었으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논쟁이긴 하지 않은가.
“대비 한 명의 존재는 단지 직접적인 계기일 뿐이지.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예송 논쟁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숙취로 정신이 나갔나 보다.
내가 완벽한 헛소리를 했다.
“예송 논쟁은 왕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과, 왕권을 옹호하는 남인의 대립입니다.”
내가 가까스로 대답하자, 이번에도 교수님이 설명을 더했다.
“서인은 왕가(王家)의 가례가 사가(私家)에 비해 특수하다거나, 왕권과 신권의 우열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지. 왜? 그건 그들이 주장하는 성리학 도학정치에 어긋나니까.”
교수님들은 말씀을 정말 어렵게 한다.
쉽게 말해서 서인은 왕권을 사대부의 신권과 같은 반열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가능할 정도로 당시 왕권이 추락한 것이기도 했고.
물론,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반면, 남인은 사화와 반정이 난무하던 당시 시대에서 왕가의 특수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국가 기반이 흔들린다고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현종은 1차 예송 당시 서인의 주장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즉위 직후라는 걸 고려해야 합니다. 2차 예송이 발생했을 때 현종은 이미 완숙한 정치력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그러니 집권 세력인 서인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아까는 유약한 군주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쉽지만 현종은 진짜 자기 정치를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서인을 억누를 정도로 강대한 왕권을 구축하여 2차 예송 논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나, 현종의 치세는 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2차 예송 논쟁이 끝난 직후 사망했으니까요.”
현종은 서인을 억누르며 왕권의 강대함을 보였으나 직후 사망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즉위 직후 벌어진 1차 예송 논쟁의 결과가 현종의 치세 내내 이어졌다.
2차 예송 논쟁 직후 그가 사망했다.
예송 논쟁으로 시작한 그의 치세는 예송 논쟁이 마감되면서 끝났다.
“1차 예송 논쟁이 이뤄질 때, 현종은 집권당인 서인의 의견을 묵살할 수 있었을까?”
“……어렵지 않았을까요?”
“왜? 설마 신권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
분명 강의를 들으러 왔는데 토론이 되고 있다.
사실 토론도 아니다. 일방적인 압살의 과정에 불과했다.
다른 학생들은 아주 즐겁게 내가 난도질당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고.
“조선은 체계적인 나라지. 그 체계의 정점에 있는 게 바로 군주고. 조선 왕조에서 실질적으로 왕권을 짓누를 수 있는 신하는 없어. 이건 세도 정치 때도 마찬가지야. 세도 정치를 다룬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을 향해서 칼을 겨누거나 무시하는데, 그건 그냥 역사 왜곡이야. 실제로 그랬다가는 바로 멸문지화지. 그만큼 왕권이 강력한 나라가 조선이야.”
교수님의 말씀대로, 사극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조선의 왕권은 정말 강력했다.
실제로 조선의 군주가 마음만 먹으면 신하들을 압살하는 건 진짜 순식간이다. 그럼에도 왕이 마음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이 유교적 법치 국가였기에 정치 논리에서 명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무작정 숙청하는 건 정치의 범주가 아닌 폭거에 불과하니까.
제멋대로 왕권을 휘둘렀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연산군을 들 수 있다.
그나저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교수님이 난도질을 멈추고 기회를 줘야 내가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조선 왕권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따로 있다. 혹시 아나?”
“정통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나?”
“예?”
“출생하였을 때 원손이 아니었다는 걸 빼고는, 현종의 정통성은 매우 탄탄했네.”
현종의 부친인 효종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봉림대군이었다.
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에 출생했기에 원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요절하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면서 왕세손이 되었다.
시스템적으로도 왕권이 절대적인 조선에서, 정통성이 뒷받침된다면 진짜 전제군주가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종의 아들 숙종이 그렇다.
그는 원자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고 보위에 올랐다.
이는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정통성이었기에, 숙종의 치세에는 말 그대로 왕권이 신권을 압살했다.
실제로 숙종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던 송시열을 손짓 하나로 죽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
또한, 숙종 대에 신하들이 왕의 눈치를 살피는 환국이 괜히 수시로 발생한 게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정통성이 숙종 이상이거나 비슷한 반열의 정통성을 가진 사람은 우습게도 단종과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이 가능했던 것도 그의 정통성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단종이 지나치게 어리지만 않았다면 그는 조선 왕조 최고의 왕권을 가진 군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불안한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지. 현종의 부친인 효종은 인조의 차자(次子)였고, 장자였던 소현세자와 그의 혈육으로 인해 예송 논쟁이 발생했다는 것만 보아도 말이야.”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현종은 단지 원손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단종과 연산군, 숙종 등에 비해 한 끗 밀리긴 하지만, 현종 역시 왕세손-왕세자-국왕의 황금 테크트리를 밟은 정통성의 끝판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조선 왕조에서 이 정도면 정통성이면 살아 있는 권위 그 자체다.
“1차 예송 논쟁은 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의 정통성이 주된 골자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예. 자의대비가 입는 상복의 기간에 따라서 효종의 정통성이 좌우되었으니까요.”
“부왕인 효종이 인조의 적통 후계자가 아니라면 현종의 정통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 이쯤에서 다시 묻겠네. 1차 예송 논쟁에서 현종은 왜 서인의 손을 들어줬을까? 설마 아직도 신권의 강대함에 흔들린 유약한 군주라고 보나?”
이건 좀 어렵다.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정말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경국대전의 예전을 보면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장자, 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1년 복을 입는다’는 조항이 있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경국대전은 그냥 법전이 아니다.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으로써 조선 왕조 통치의 기본이자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경국대전의 예법을 따르자면, 양자인 효종이 죽었으니 계모인 자의대비는 1년 복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1년이냐 3년이냐를 두고 논쟁이 발생한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발생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예송 논쟁이다.
“예송 논쟁은 송시열이 4종설의 체이부정을 언급하면서 시작되었어.”
체이부정(體而不正).
대충 정리해보자면 ‘서자(庶子)’라는 뜻이다.
즉, 송시열은 효종이 서자이기 때문에 장자를 위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칫하면 효종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만 하더라도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태였기에 그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허목이 상소를 올려서 송시열을 강력하게 비판했네. 직후 윤선도도 송시열이 효종을 비하했다고 공격하면서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일이 이렇게 되자 송시열은 현종을 만나서 해명하기에 이르렀지.”
송시열의 세계관이 문제인 건지는 모른다.
어디서 문제가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다.
복잡하다.
이럴 때는 문제를 간단하게 바라봐야 한다.
경국대전에 1년 복이라고 했다.
그러면 경국대전을 언급하며 넘어가면 송시열의 뜻대로 1년 복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괜한 말을 해서 전선이 확대된 것이다.
이게 팩트다.
송시열의 세계관은 알 필요가 없다.
“다시 묻지. 예송 논쟁이 꼭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었을까?”
그런데도 세계관을 물어보니 참 답답했다.
너무 어렵다.
속도 어렵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교수님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예송 논쟁은 여기까지 하지.”
하늘이 도왔다.
이제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현종의 치세는 예송 논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지.”
“예?”
“내가 왜 현종은 유약한 군주가 아니라는 말을 계속하는 줄 아나?”
그걸 배우러 온 겁니다. 교수님.
이 말이 목울대까지 올라왔으니 재빨리 집어넣었다.
나는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니다.
숙취로 조금 방향성이 안 맞는 말을 몇 번 했을 뿐이다.
“현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자연재해와 싸운 왕이야.”
“아…….”
“현종이 보위에 오른 직후부터 시작된 자연재해는…….”
교수님은 간단하게 몇 가지 사례를 언급했다.
현종 2년(1661) 전염병으로 938명이 죽었고, 현종 3년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3,348명이 죽었다. 현종 5년(1664)에도 전염병으로 65명이 죽었다.
……그 뒤로도 엄청난 규모의 자연재해가 계속 이어졌다.
그나저나 조금 희한했다.
예송 논쟁을 언급할 때만 하더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이 행동하던 교수님이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경신 대기근으로 향하는 길목에 불과했어. 경신 대기근의 원인은 소빙기 기후로 인한 재난이었지.”
교수님의 말은 장황하게 이어졌다.
이쯤 되니 탈탈 털리던 토론 시간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강의 시간이니 강의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나만 계속 쳐다보니 너무 버티기 힘들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경술년(1670) 윤달에 도성에 팥 크기의 우박이 내리고 경상도에서는 새알만 한 크기의 우박이 내렸지. 평안도에서는 3월에 서리와 눈까지 내렸으며, 경기도에서는 4월에 우박이 내렸어. 또 전라도와…….”
나는 눈을 껌뻑이면서 내용을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재앙임을 알 수 있었다.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수준이었다.
지금껏 현종의 치세는 예송 논쟁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상상 그 이상의 자연재해였다.
“기록을 토대로 한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경신 대기근 시절 사망자는 140만 명 내외이고 사망률은 11~14%였지.”
우리 교수님께서는 현종이 자연재해와 싸운 역사를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언급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물기는 점차 영역을 확장했다.
“생존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던 시기였네. 왜? 옆 사람이 살아 있으면 내가 먹을 식량이 줄어들기 때문이었지. 급기야 사람이 시체를 먹고, 생사람을 죽여서 먹었어. 그러나 누구도 인간의 도리를 말할 수 없었던 끔찍한 시기였어.”
전쟁이 일어난 시기라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만일 그러한 행동을 누가 한다면 반드시 지탄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도리조차 감히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이라는 말이었다.
“그 시절 조선은 평등했지. 신분을 초월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말일세.”
교수님은 한마디로 모든 걸 함축했다.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교수님이 예송 논쟁을 언급할 때는 일방적으로 내게 역정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경신 대기근을 언급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일 정도였다.
울먹인다고 여겨질 정도니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보였고, 느껴졌다.
“그리고 20여 년 뒤, 그의 아들인 숙종 시절에 발생한 을병 대기근은 경신 대기근보다 더 심했다는 당대의 기록이 남아 있어. 연구 결과 사망자 400여만 명, 사망률 25~33%로 추정된다네.”
숙종 시절도 엄청났구나.
그래도 현종의 무게보다는 가볍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숙취 때문인지 감정이 끓어올라, 나도 모르게 말했다.
“현종의 고된 치세가 아니었다면 숙종은 더 큰 위기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군요.”
“…….”
“예송 논쟁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현종의 치세는 조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래서일까?
나를 쳐다보는 교수의 시선에도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짝짝짝…….
손뼉을 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조금 전만 하더라도 무섭게 쏘아보며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왜 박수를……?
그래. 아무래도 내가 아직 숙취가 덜 풀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관망하던 학생들도 손뼉을 친다.
급기야 기립하고 나를 쳐다보면서.
……이 정도면 숙취가 덜 풀린 게 아니라, 아예 술에 찌들어버린 거 같은데?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버벅거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그 마음 잊지 말게.”
“예?”
“미약하게나마 진심을 느꼈다는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일까?
그 순간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도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 생각했다.
술을 적당히 먹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