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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8화 (8/298)

8화 방패(2)

즉위식(卽位式).

상징적으로 전근대 왕의 즉위식(卽位式)은 개벽(開闢)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이 즉위식을 거행해야만 선왕의 죽음으로 멈춰있던 일국(一國)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의례로 볼 때 세자가 왕의 상징인 옥새를 받고 용상에 올라가 앉을 때까지의 의식절차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뤄지는 절차는 절대 간단하지 않으나,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아주 간단했다.

우선 세자가 선왕의 시신을 모신 빈전에서 옥새를 받는다. 그다음에는 정전으로 이동한 뒤 용상에 앉는다. 원래 즉위라는 뜻 자체가 왕이 앉는 장소인 용상에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즉위가 이뤄지면 대소 신료가 천세(千歲)를 외친다.

천세(千歲).

왕조의 운명이 천년만년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천자의 나라에서는 만세를 외치지만, 제후국인 조선은 천세를 외친다.

바로 지금처럼.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마침내 이연이 용상에 정좌했고, 정전을 가득 메운 대소 신료가 천세를 연호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나 역시 천세를 연호했다.

사직을 이연이 반려하였기에 여전히 이조판서의 신분이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기분이 묘했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떨렸다.

아니, 울렁였다.

괴이한 울렁임은 얼마 전 나눈 이연과의 대화를 꺼냈다.

나의 육체는 천세를 외쳤으나, 정신은 과거로 이동했다.

*****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말과 동시에 이연은 목을 살짝 낮췄다.

자연스레 시선도 내려갔다.

그러니 나도 자세를 더 낮출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이 나라 조선의 차기 지존이니 말이다.

“내가 아는 이판은 살신성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

아……. 송시열,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나저나 이 말을 대놓고 하는 이연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 건 확실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3년 복도 진심이며, 서인의 반발에 사직을 선언한 것도 진심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이조판서 송시열이 말입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판이 남인에게 한 수 물러 준 것이라는 겁니다. 서인의 학맥을 흔들면서까지.”

이연의 검은 눈동자는 나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의 귀가 나의 숨소리를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들어야겠습니다.”

“이유를 물으신다면…….”

“아니요. 그게 아니지요.”

느릿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지금까지도 그러했으니 지금은 더 묵직한 위엄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사람이 변했는지 들어야겠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스며 있었다.

이제…… 나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진실은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

다시 시작된 침묵.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였으나 이연은 침묵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허락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냉철한 인물이 설득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정략이라고 말할 때 홀로 진실을 찾아낼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아닌가.

어설픈 말은 또 다른 의심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래서 고민은 이어졌고, 침묵의 영역은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허락된 침묵은 나를 번뇌에 휩싸이게 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심장은 불편할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목울대는 따가워졌으며, 손바닥은 축축해졌다.

알고 있다.

알 수밖에 없었다.

허락된 침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허락이 거둬지는 순간 유쾌하지 않을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이거, 아무래도 아직 수가 다 펼쳐지지 않았나 보군요.”

기어이 침묵은 종장(終章)에 이르렀다.

차기 지존의 불쾌함을 수반하면서.

“승하하신 아바마마와 이판의 관계와, 나와 이판의 관계는 다를 수 있다는 건 허튼 생각이었군요. 되었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말을 듣자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며 신호가 울렸다.

하마터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엄청난 무례를 범할 뻔한 것이다.

“그래요. 남은 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껏 해보세요. 넉넉하게 관전하리다.”

축객령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직전 내가 해야 할 말을 깨달았다.

내가 송시열이 된 이유.

이는 예송 논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경신 대기근을 대비할 조선을 가장 완벽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면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과연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제도의 개혁?

정국의 개편?

다 필요하다.

그러나 선행해야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것을 조금 전 이연이 말했다.

나는 말했다.

“태조께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이연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이 나라 조선의 차기 지존께 감히 청합니다.”

일렁이는 이연의 눈동자.

나는 그 강렬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정도전.

그에 대한 조선의 평가는 내게 의미가 없다.

내 머릿속에 새겨진 이성계와 정도전의 관계가 중요할 뿐이었다.

바로 절대적인 신뢰로 구축된 군신 관계.

“태조께서 정도전에게 내린 신뢰, 이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작금의 정세가 내게 요구하는 최우선 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시작된 침묵.

지금까지 있었던 침묵과는 결이 달랐다.

이 침묵은 내게 분명한 경고를 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게 척살되어 역적으로 낙인찍혔다는 걸 말이다.

그는 사사롭게 권력을 탐하여 조정과 왕실을 어지럽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조선의 차기 지존에게 역적의 이름 석 자를 운운한 것이다.

내가 무려 송시열인데 말이다.

그러니 듣기에 따라서는 군주의 권능을 탐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또 아둔한 군주였다면 오직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 자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현종 이연이다.

“태조와 정도전이라.”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또 이연은 정확한 요점을 파악했다.

희한한 건 이연의 목소리에 흥미로움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파악할 여유 따위는 없다.

곧장 이어질 말이 중요한 것이니 말이다.

아니, 내가 더 말해야 한다.

그게 옳다.

“정도전의 권력은 오롯이 태조의 권능이었습니다.”

“…….”

“태조께서 일시적으로 양도(讓渡)하지 않았다면 정도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양도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괴이한 표현이군요. 권력을 양도한다라.”

“태조께서는 손짓 한 번으로 그 권력을 언제든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정도전도 군왕의 권능을 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는 태조와 정도전 사이에 무엇으로도 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여, 태조께서는 양도하셨습니다.”

“참으로 독특한 해석입니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태조와 정도전은 지옥도가 펼쳐졌던 난세를 끝장낸 동지였습니다. 신뢰는 거기서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이판이 그러합니까? 나는 이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송시열이 싼 똥을 치울 때가 왔다.

워낙에 많아서 버겁지만, 그래도 치워야만 한다.

그것도 한 번에 치워야 한다.

“신뢰를 얻고자 3년 복을 주장하였습니다.”

“…….”

“또한, 서인의 반발에 진심으로 사직을 선언하였습니다.”

“…….”

“두 가지 일에 그 어떤 사심이 없었습니다.”

“…….”

잠시 고민했다.

이어질 말의 뉘앙스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선택지는 크게 2가지가 있었다.

1번.

-이를 믿지 못하신다면 파직하십시오.

1번은 단호한 결의를 피력하는 것이긴 한데, 현재 내 위치와 그간 송시열의 행적을 고려할 때 협박성 발언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2번.

-어떠한 처우를 내리실지라도 반발하지 않겠습니다.

2번이 제법 부드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이 또한 협박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송시열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하니 적당한 말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무엇을 하기 위함인지 알고 싶군요.”

나의 어려움을 걷어내는 물음이었다.

복잡한 공식을 치우고 답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

나로서는 가장 원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답해야 한다.

내가 송시열이 된 이유를.

“오직…….”

말했다.

“민본(民本)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눈동자가 일렁였다.

표정이 요동쳤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나의 결의를.

“소신은 방패가 될 것입니다.”

“무엇을 막는 방패입니까.”

“용상의 권능으로 이뤄질 개혁의 방패가 될 것입니다.”

이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이 열렸다.

“나는…….”

말이 이어졌다.

“태조의 신뢰를 내리는 태종이 될 생각은 있습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신뢰한 만큼 나를 믿어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것을 잊지는 말라는 의미였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바라던 바다.

지금 이 나라 조선은 이성계와 이방원이 모두 필요하니 말이다.

나는 극진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산림의 모든 권한을 비선으로 용상에 바칠 것입니다.”

이는 재야의 여론을 이용하여 군주를 압박했던 종래의 관습을 모두 철폐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니, 더 나아가 군주의 개혁에 산림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최고의 약조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3년 복의 관철로 발생할 서인의 반발을 기쁘게 온몸으로 막아내겠습니다.”

*****

상념은 끝났다.

나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천세의 연호는 멈췄다.

이제 이연이 조선의 신왕으로서 선언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이연의 목소리가 정전을 울렸다.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의 첫 일성이 치세의 방향이 될 것이니 말이다.

“조선에 사화는 없소.”

사화(士禍).

이는 작금의 조선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벽이다.

이를 신왕이 친히 치우겠노라 선언했다.

이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경직되는 것을.

대소 신료는 백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신왕의 선언이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이 복잡한 감정의 편린 속에 나는 홀로 답했다.

-전하. 우리의 만남은 이 나라 조선이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 후대에게 명확하게 전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옵니다.

그렇다.

이 나라 조선의 가치.

이제 신왕은 오랜 세월 잊혔던 이 나라 조선의 첫 번째 가치를 언급할 것이다.

바로

“민본.”

민본이다.

“오직 민본만 있을 것이외다.”

민본을 선택한 나라, 조선.

다시 그 시작이 선언되었다.

1392년 혁명의 그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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