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세종, 그 위대한 이름
“뭐. 그렇다고 해서 성리학을 버릴 수 있는 건 아닐세. 부족함이 있다고 하여 정도를 보지 않는 건 아둔한 일이니까. 잊지 말게. 나나 자네 모두 성리학자라는 걸.”
윤휴는 허목을 빤히 바라봤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물음.
그러나 그만큼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오늘 이 사람들의 속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내던진 게 아니라면, 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배워도 되는 것입니까.”
“어찌 성현이 주자만 있겠는가. 공자와 맹자도 계시거늘. 자네도 평소 이리 말하지 않았는가.”
“선생. 만일 성현이 아니면 어떠합니까.”
“성현이 아니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성현이 아닐지라도 학문이 경지에 이르셨다면 어찌 배우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주자를 대체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윤휴는 말을 멈췄다.
허목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윤휴의 침묵은 이어졌다.
결국, 허목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문난적이라고 했나? 그래. 필요하다면 기꺼이 될 생각이 있네. 송시열의 잣대를 고려할 때 나 역시 사문난적이니까.”
“…….”
“하지만, 백호. 내가 기꺼이 사문난적을 칭할 수 있는 건 우리 남인의 가치를 올곧게 세우기 위해서일세.”
“선생께서는 민본보다 남인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말뿐인 민본은 허상일세. 구체적인 정책과 방향이 없으면 오히려 해가 될 뿐일세. 서인은 민본을 품을 수 없어. 오직 우리 남인의 역할이라는 말일세.”
정말 허목다운 답변이었다.
윤휴는 허목을 잘 안다.
남인의 가치만이 조선을 개혁할 수 있다고 여기는 외골수였다.
그에게 서인과의 타협은 반역이었으니까.
그래서 조금 달리 물었다.
“주자의 학설은 남인과 서인을 만들었습니다.”
“부정하지 않겠네.”
“하면, 선생. 남인과 서인의 정책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어찌 됩니까.”
“오늘따라 자네의 말이 너무 어렵군. 조금 쉽게 일러주겠나?”
“소생은…….”
윤휴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말을 허목과 윤선도가 어찌 수용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그리고 토론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주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종의 치세를 배우고자 합니다.”
“뭐……?”
“선생. 소생은 조선의 성리학이 민본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입증한 역사는 바로 세종의 치세입니다.”
“백호.”
“소생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넘어서는 조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 성리학이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
“세종께서 계셨다면 남인과 서인의 정책을 모두 수용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소생이 얻은 주도입니다.”
윤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목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의를 담아서 말했다.
“이로 인하여 사문난적이 되어 사약을 받더라도 그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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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거닐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하고자 천천히 걸었다.
그래서 그렇게 걸었다.
그러나 시각의 작용이 멈춘 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독 많은 백성이 바쁘게 오갔다.
정확한 위치 파악을 하고 싶었으나, 송시열의 기억을 완벽하게 흡수한 건 아니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애초 백성의 삶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머릿속을 정화하는 게 목적이니 말이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가래, 괭이, 낫, 삭도 따위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주 흥미로웠기 때문일까?
나의 의지만으로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기에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봤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들도 내 시선을 느꼈을까?
멀뚱멀뚱 쳐다보는 내게 눈을 부라리려다가, 딱 봐도 고관대작이 분명한 행색인 걸 보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가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잘됐다.
신분이 있는 나라에서 상위 계급이라는 건 이럴 때 참 편했다.
평등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여유롭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들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원래 나였다면 약간의 배려를 했을 것이지만, 송시열의 인격이 스며들었기 때문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들의 부담스러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보게들.”
“예, 예. 나리.”
나리라.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지체가 높거나 권세가 있는 이를 나리라고 부른다지?”
“예?”
“그런데 당하관도 나리라고 부른다네.”
“예, 예.”
“나를 나리라고 불러도 되긴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왜?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아니기 때문일세.”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색함이 해일처럼 커졌다.
희한하게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대감일세.”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이를 대감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엄청난 고위직이다.
그래서일까?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한마디를 더했다.
“대감이라고 했네만.”
“소, 송구합니다. 소인들이 무지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무리의 경직성은 더 커졌다.
자신들의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고관대작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내가 사라지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안하무인이 되었을까?
문제는 알면서도 전혀 고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진지하게 고찰해볼 필요를 느꼈다.
“몇 가지 물어보려고 하네만.”
“이, 이르십시오.”
“자네들은 뭐 하는 사람인가?”
딱 보면 모르냐고 띠껍게 답할 수도 있겠으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권위가 흘러넘치는 송시열의 육신을 한 내가 물었으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했다.
“소인들은 장인(匠人)입니다.”
“그래? 손재주가 뛰어난 모양이군.”
“부끄럽습니다.”
“어려움은 없는가?”
“……없습니다.”
느낌 딱 왔다.
어떤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쳐다봤을 때도 잔뜩 성난 얼굴로 구시렁거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능 확실했다.
장인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묻지. 어려움은 없는가.”
“소, 송구합니다. 실은…….”
머뭇거린다.
나는 미간을 더 찌푸렸다.
결과는 이번에도 확실했다.
“도통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두절미를 너무 제대로 한 거 같은데?”
“예?”
“앞 내용이 너무 많이 빠졌다는 말일세.”
“아…….”
“말하게.”
“실은 소인들은 각자 재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물품을 만들어 냅니다.”
“알지. 그래서 자네들은 장인이지 않은가.”
“그런데 대감. 모군(募軍)의 고가(雇價)가 소인들의 공전(工錢)보다 많습니다.”
모군은 비숙련 잡역부이며 고가는 그들의 품삯이었다.
공전은 장인들의 물품을 제조한 뒤 받는 수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기술자의 월급이 단순 노동을 하는 인부보다 적다는 말이었다.
이건 내가 들어도 어불성설이었다.
이들이 불만을 가질 만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냥 있어도 꼬장꼬장하게 생긴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장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의 대수롭지 않은 행동은 아주 불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소, 송구합니다. 소인들이 괜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한 말이 아니다.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한 일이니까.”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제기해봤느냐?”
“소인들의 목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말해도 바뀌는 게 없어서 그냥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말했으나 무시당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입맛이 텁텁했다.
조금 전 내게 답변하던 장인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희망이 엿보였다.
상당한 고관대작으로 보이는 내가 처우에 관심을 보이자 기대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무슨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조정이 왜 이런 불평등한 구조를 만들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네. 그때도 편히 말해주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이번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아니라 불편함이 느껴졌다.
저들은 아마도 나 역시 듣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쉽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나는 조선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경세가가 아니라 개혁 진영의 방패이니까.
더는 장인들의 시간을 뺏을 수 없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되찾았기 때문일까?
지금껏 몰랐던 거리의 생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갑자기 이곳의 위치가 나도 모르게 파악됐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냥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한눈에 봐도 정형화된 가구 형태였다.
남북방향의 깊이는 족히 11m였고 가운데 동서 방향의 전면길이는 최소 40m, 최대 130m였다.
남북가로변의 물길 2개, 대로 1개, 중로 1개, 소로 6개, 세가로 24개.
대로의 폭(너비)은 56척(17.84m), 중로는 16척(6.2m), 소로는 11척(3.43m).
길 양쪽에 있는 도랑의 너비는 2척(62cm).
이곳을 빼곡하게 채운 행랑의 규모는 881간(1,460m).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랬다.
이곳은 바로 한양 도성의 심장부 시전행랑이었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너무나도 무거워졌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넘치는 생기가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가 얽혔다.
더는 얽히지 못할 때,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민본.”
가슴이 설렜다.
기어이 이뤄내야 할 위대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호흡이 제법 거칠어졌다.
정말 형편없는 육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었다.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다시 살폈다.
그래야 했다.
지금 나는 조선의 심장부, 창덕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 걸음을 옮겼다.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총 10간짜리 건물이 보였다.
지붕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규모에 걸맞은 권위가 느껴졌다.
바로 창덕궁의 관문인 돈화문이었다.
문짝은 세 개였다.
가운데 문이 좌우의 문보다 컸다. 이는 군주만이 드나드는 어문이기 때문이었다.
숨을 차분하게 내쉬었다.
오늘 나는 창덕궁의 주인, 이연을 만나야 한다.
개혁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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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포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군주의 위엄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사용하는 게 분명했다.
만날 때마다 느꼈다.
조선의 역사 기록은 이연의 실체를 단 1할도 담아내지 못했다는 걸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등장으로 인한 정국의 변화가 이연의 진정한 모습을 꺼내게 하였을 수도 있다.
“이제 포문을 열 생각이시오?”
묵직한 중저음.
이연의 말에는 불필요한 가지가 없었다.
오직 핵심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어찌 시작할 생각이시오?”
“신이…….”
고개를 들었다.
꺾일지언정 흔들리지 않을 신념의 강자가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상대에게 확신을 주고자 한다.
“사문난적의 길을 걷겠습니다.”
“이거……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소이다. 하면, 주자를 버리시겠다는 것이오?”
“주자를 버리고…….”
일렁이는 눈으로 이연을 바라봤다.
“세종을 배울 것이옵니다.”
“……세종이라고 하셨소?”
담대한 이연조차도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설마 내 입에서 주자를 버리고 세종을 취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니까.
“신은 전하를 보필하여 기어이 세종께서 이루신 태평성대를 넘을 것이옵니다.”
“하……하하.”
내 말이 뜻밖이었을까?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연은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호쾌하였으니까.
“세종.”
“그러하옵니다.”
“내가…… 감히 세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시오?”
“필시 그리될 것이옵니다.”
“나의 조선이 세종께서 이루신 태평성대의 태평가보다 더 큰 태평가를 만들 수 있소?”
……태평가라.
어렵다.
세종이 다시 돌아와도 불가능하다.
왜……?
경신 대기근이 다가오는데 무슨 태평가를 부르겠는가?
곡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절망과 절규가 터져 나오지 않으면 천운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태평성대를 언급하였는가.
내가 한 말, 세종의 태평성대를 넘어선다는 건 진짜 태평성대가 아니니까.
이연의 조선에서 태평성대라는 말의 의미는 역사의 그것과는 달라질 것이니까.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심은 말해도 된다.
그래서 말했다.
“태평성대(太平聖代).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시대.”
“…….”
“신은 장담하옵니다.”
무엇을?
“전하의 치세는…… 이 태평성대라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이연은 미증유의 재난을 가장 완벽하게 막아낸 불세출의 군주로 기록될 것이니까.
이제 남은 건 이연의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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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허목과 윤선도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허목의 입이 움직였다.
“괜찮군.”
또 윤선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쁘지 않군.”
윤휴는 싱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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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이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답변은.
“좋소.”
가장 완벽한 두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