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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15화 (15/298)

15화 경장(更張)의 나라(2)

지독했다.

이건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내가 봐도 지독했다.

허적의 말이 머릿속에 자리 잡으며 이해가 될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이해의 정도를 떠나서 가슴이 따가울 정도였다.

조선(朝鮮).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인 관직 체계를 구축한 관료제 국가다.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직에 따른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녹봉(祿俸)이다.

녹봉은 단지 관리의 월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녹봉 체계가 관료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적은 이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단호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살이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단호함이었다.

되돌아본다.

생각해본다.

떠올려본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과연 그곳에서는 이런 단호함이 살아서 숨 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위의 개혁이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주먹을 꽉 쥐면서 시선을 움직였다.

허적의 눈과 마주쳤다.

“…….”

허적의 이글거리는 눈.

과연 한 치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울렁였다.

손끝이 떨렸다.

목이 따가웠다.

나는 이 순간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 진심으로 깨달았다.

누가…… 누가 감히 조선을 썩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말했는가.

이 나라 조선의 사대부는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적어도 허적은 말이다.

그랬다.

그렇다.

조선은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권력 다툼만으로 얼룩진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은 사회변동기마다 끊임없는 경장을 모색한 나라였다.

바로 그래서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했다.

지금 나는 이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지금 나는 이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개혁(改革).”

이어진 허적의 한마디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공기조차 뜨거웠다.

숨 쉬는 것도 불편할 정도였다.

“개혁은…… 군주의 전유물이었소.”

허적의 말이 옳았다.

개혁은 군주의 전유물이다.

군주는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다.

많은 과정을 거치겠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왕권 강화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어색한 미소가 입가를 감돌았다.

헛웃음이 났다.

“군왕이 녹봉제를 유지하려는 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구려.”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에서 8천 석의 가치는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소. 사대부라면 누구나 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오.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지요. 물산이 부족하고 백성의 수가 적으며 땅도 좁기에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외다.”

“누구의 탓도 아니오.”

“군왕은 관리들만 의식하여 녹봉의 인상을 늘 주장하지요. 나라가 이토록 어려운데 말이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나라 살림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특별한 몇 번을 제외하면, 군주들은 통치를 이유로 관리들의 녹봉을 인상하거나 감액을 막으려고 했다.

“이는 용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정치의 소산이오.”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녹봉제를 사수한다는 의미였다.

군주는 녹봉제를 강화하려고 하고 신하는 감액하려고 한다. 이 묘한 관계는 인조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로서는, 민심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눈앞의 관리들에게 군주로서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알지요. 이 또한 통치이며 정치이니까. 그러나 이판. 무릇 통치는 백성을 살찌게 하는 것이며, 정치는 백성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요. 하하하. 평생 왕권의 강화를 주장한 나도 이리 생각하는데, 이판은 어떠하겠소이까.”

남인은 왕권의 강화를 선호한다.

허적은 남인의 영수이기에 당연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왕권 강화를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질문이 이상하였을까?

허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입이 서서히 움직였다.

“태평성대를 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기에 그러하오.”

“…….”

“하하하. 그런데 왜 녹봉제 감액을 주장하는지 궁금하시오?”

“솔직히 그렇소.”

“끌…….”

허적은 잘게 웃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니었다.

씁쓸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강대한 왕권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괴물로 변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오.”

느리지만 묵직한 말이 이어졌다.

“왕권 강화는 군왕의 권력을 거대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오. 오직 백성을 위한 개혁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기에 이뤄야 하는 것이오.”

말의 무게는 천금보다 거대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이 나라의 개혁을 저해한다면 뿌리를 뽑아야 하오.”

작은 미동도 느낄 수 없었다.

얼마나…… 대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면 이처럼 굳건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대부를 억누를 수는 있소. 그러나 백성을 괴롭힐 수는 없소.”

허적의 말은 여전히 느렸으나 무게는 점차 더해졌다.

“이 나라 조선은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소. 그러나 무엇 하나 섣불리 손을 볼 수가 없소. 이때 선행해야 할 건…….”

“…….”

“관리의 고혈을 짜는 것이오.”

다시금 느꼈다.

이 시절 사대부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조선과 백성을 위해서 말이다.

예송 논쟁까지 걷어진 지금의 조선은 더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혈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사대부는 땀을 흘릴 수 있는 세상이면 충분하오.”

“땀이라.”

“그 땀이 거름이 된 땅에서 우리 백성이 태평가를 부를 수만 있다면 피를 토해도 좋겠지요.”

이토록 강건한 신념의 강자에게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울 뿐이었다.

진심이었다.

“이판은 말했지요. 관리의 녹봉을 증액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관리가 백성을 수탈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외다. 나는 진실로 반대하오.”

“…….”

“우리 사대부는 능히 이를 감내할 것이오.”

허적에게 홀린 것일까.

문뜩 허적이라면 내가 진실로 하고자 하는 일을 터놓고 상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입이 움직였다.

“만약…… 미증유의 재난이 닥친다면 우리 조선은 감당할 수 있겠소?”

의아함을 가득 담은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껏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던 허적의 숨소리도 어느새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그의 속이 제법 동요하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 질문은 뜬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니 말이다.

“미증유의…… 재난이라고 하셨소?”

“그렇소.”

“오늘 이판의 느닷없는 행동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소만.”

“답해 주시오.”

“허.”

“음…….”

잠시 고민하던 허적은 가볍게 답변했다.

“말로는 쉽게 수위를 짐작하기 어렵구려.”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려고 할 때였다.

“인조 대왕 시절 병정대기근이 있었소. 계절에 맞지 않는 우박과 냉해,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졌소.”

허적이 먼저 사례를 꺼냈다.

“바람, 비, 해충의 3재(災)가 커서 조세조차 징수할 수 없었지요. 심지어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서도 그랬소. 무려 5~6년의 세월 동안 말이외다. 거기에 청이 곡물까지 요구하였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소. 어떻소? 이 정도 수위를 이르시는 것이오?”

“더하오.”

“……선왕 시절 경기도와 충청도에 병충해가 발생하고, 전라도에는 역병, 제주도의 기근, 황해도는 큰바람과 우박 피해 그리고 병충해, 함경도는 대설과 역병, 평안도는 우막이 내렸지요.”

“…….”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허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나 역시 그 시절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인데 반응이 거의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시간도 잠시, 허적은 말을 계속 이었다.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곧장 물난리가 났소. 강원도와 도성에도 이어졌고, 삼각산 봉우리가 무너질 정도였지요. 홍수가 끝나자 가뭄과 병충해가 시작됐소. 참으로 참담한 시절이었소. 생각만 해도 끔찍하오.”

“당시 우리는 잘 대처하였소?”

“알다시피 어려웠소.”

“만일, 그보다 더 큰 재해가 발생한다면 어찌하오?”

“……더 큰 재해라고 하셨소?”

허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불편함이 가득한 어색한 미소까지 지었다.

이유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구려.”

“이를테면 우역(牛疫)까지 거세게 확산하여 4만여 마리의 소가 죽는 재해는 어떻소?”

“소 한 마리의 가격은 동전 50~60량, 작은 소는 30~40량이오. 4만 마리의 경제적 가치는 최대 240만 냥, 최저 120만 냥이외다. 이는 조선의 1년 벼농사 생산량이며, 호조의 2년 치 세수에 해당하는 걸 알고 있소? 이 정도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외다. 입에도 담기 싫구려.”

“그뿐만이 아니외다. 굶주림과 역병으로 백만 이상의 백성이 죽는 재해라면요?”

“뭐……요?”

파르르 떨리는 허적의 눈동자.

끈적한 긴장감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동시에 이뤄지는 재해라면 어떻소?”

“…….”

허적의 침묵.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지금 허적에게 필요한 건 시간일 것이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 문뜩 묘한 생각이 들었다.

장고를 거듭하는 허적의 눈을 쳐다봤다.

가정에 불과한 말이었음에도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는 모습은 내 속을 더 복잡하게 했다.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허적이라면 진심으로 손을 잡고 다가올 미증유의 재난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기다렸다.

그의 답변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재난(災難).”

묵직한 목소리.

허적이 말했다.

“이는 하늘의 뜻이지요.”

이건 아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답답함이 목울대까지 올라왔다.

그때였다.

“그러나 발생할 참혹한 현실은 단지 그것만으로 좌우되는 게 아니오.”

허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란의 피해, 조정과 제도의 불안정성이 피해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오.”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적의 말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준비 태세에 따라서 백성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오.”

“…….”

“천재지변을 어찌 막을 수 있겠소? 그러나 선대 시절의 비극은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오.”

이제 내가 물어야 할 때다.

나는 크게 숨을 내쉰 뒤 물었다.

“하면…… 지금 우리의 준비 태세는 어떠하오?”

“…….”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증유의 재난이 시작되었을 때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조정과 제도는 튼튼하오?”

“우리의 준비는…….”

허적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족하오.”

씁쓸함과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조선은 지독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다.

오죽하면 녹봉의 감액을 언급할 정도겠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녹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공무원에게 월급도 제대로 줄 수 없는 나라다.

그런데 무슨 준비 태세를 따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허적은 말을 더 이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쓰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말해야 할 때였다.

“만일 내가 1년 복을 주장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소이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그랬다면 서인과 남인은 복제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을 것이오.”

“설마 남인과 서인의 논쟁을 막고자 3년 복을 주장했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오?”

“서인과 남인이 복제로 다툴 시간이 아까웠소.”

허적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허. 그러니까 미증유의 재난을 예상하여 복제를 양보했다는 말이오?”

지금부터 말을 잘해야 한다.

허튼 말을 조금이라도 보태면 진짜 미친놈 취급당한다.

이건 정말 순식간이다.

“어찌 재난을 예상할 수 있겠소이까.”

“하면요?”

“그저 나는 조선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외다.”

“……낭비라고 하셨소?”

“그렇소.”

“복제를 논의할 시간이 낭비라고 하셨소?”

“그렇소.”

허적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불었던 우호적인 훈풍은 순식간에 걷어졌다.

내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반드시 허적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걸.

지금부터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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