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16화 (16/298)

16화 내일 뵙지요

끈적한 침묵.

나를 향한 허적의 경계심이 커진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밑도 끝도 없이 재난을 언급했다.

그런데 복제로 연결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작금의 성리학이 가장 중시하는 건 예법이다.

그중 복제가 단연 으뜸이다.

이 시절 성리학자라면 무조건 동의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조선 성리학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관을 가볍게 부정했으니 허적으로서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심지어 세계관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한 말이었으니 경계심까지 생길 것이다.

자연스레 나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이 모든 감정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가끔 이럴 때는 언짢다.

이 모든 건 내가 아닌 송시열의 업보(業報)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지금은 내가 송시열이니 말이다.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고려할 때, 솔직히 말해서 송시열보다 적합한 빙의 대상이 없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 신세 한탄은 그만할 때도 됐다.

어차피 송시열로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러면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다.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내 모든 걸 꺼내서 허적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했다.

앞으로의 조선은 잘 싸우는 정치인보다 경세가가 필요하다.

나와 함께 가야 할 동지가 필요했다.

이 길의 동지가 남인의 영수인 허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그래야만 하고, 그래야만 했다.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기 위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호판.”

“영상 대감을 향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궐 안팎을 뒤덮었소. 한데, 양보라……. 참으로 당혹스럽소?”

“그건 아니오. 오해가 있소.”

“되었소. 알고 싶지 않소. 그래. 해보시오. 오늘 내가 이판에게 듣는 마지막 말이오. 그러니 후회 없이 말씀하시오.”

사실상의 축객령이었다.

아니, 약간의 시간이 남은 축객령이라고 해야 할까?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초조해질 수는 없다.

나는 차분해야 했다.

딱딱할 정도로 굳어버린 허적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 말이다.

“1년이면 어떠하고, 3년이면 어떠하오?”

“……뭐요? 하……하하. 실성하셨소? 그래. 오늘 하는 행동이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나를 조롱하고자 뜸을 들인 것이었구려.”

“1년 복이면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얻고, 3년이면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지요. 이 이상의 의미가 있소?”

“이보시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허적이 고함을 질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그의 노여움이 얼마나 큰지 확실하게 보여줬다.

“복제는 조선의 길을 설정하는 것이오.”

“3년 복이 관철되었으니 남인의 길로 조선을 인도하면 되오.”

구구절절한 과정을 빼고 딱 잘라서 말했다.

말문이 막힌 허적은 헛웃음도 내지 못했다.

그럴 것이다.

허적이 에둘러 말했으나 정확한 핵심을 담고 있다.

1년 복이 관철되면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가지고, 3년 복이 통과되면 남인이 치고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3년 복이 관철된 게 남인이 아닌 나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를 상기할 수밖에 없을 허적으로서는 당연하게도 말문이 막힌 것이다.

“일전에 장인(匠人)들을 만나서 짧게 대화를 나눴소.”

“…….”

“모군(募軍)의 고가(雇價)가 소인들의 공전(工錢)보다 많다고 하오. 참으로 얄궂지 않소이까?”

“그건…….”

“합당하지 않소.”

어쩔 수 없는 조정의 구조가 있을 것이다.

호조판서로서 업무 장악력이 뛰어난 허적이었으니 이 현상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문제를 언급한 건 원인이나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허적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지기 전에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막았다.

“조정의 일은 참으로 많소. 그 일 중 합당하지 않은 일이 어디 이것밖에 없겠소이까. 해서, 묻지요. 남인의 조정은 합당하지 않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이 있소?”

“모든 건 결국 재원의 문제이지요. 서인이 발목만 잡지 않는다면 기어이 해결할 수 있소. 어떻소? 내 길을 지지하겠소?”

“그리하리다.”

“……뭐요?”

너무나도 담백한 나의 답변에 허적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표정이 아닐 수 없다.

“호판의 길을 지지한다고 하였소.”

“…….”

“서인의 조정은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오.”

너무나도 솔직한 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을까.

허적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송시열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학도로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가끔 하는 생각이 있소.”

세상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이를 금기라고 한다.

그러나 금기라는 건 때로는 넘을 때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매번 그러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왜 성리학일까?”

“이판.”

“왜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가 되었을까.”

“말을 돌리지 마시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있다.

나는 이를 원칙이라고 한다.

이보다 지키기 어려운 건 없다.

원칙은 늘 흔들린다. 그런데도 일부러 부여잡고자 한다면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찌 지켜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바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본을 꺼냈다.

“그 옛날, 태조께서 이 나라 조선을 창업하셨을 때 왕실의 상복을 염두에 두셨을까.”

허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려 왕실의 예법이 틀렸기에 원대한 창업의 뜻을 품으셨을까.”

“…….”

“고려 왕실이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에 노하셨을까.”

허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분명하다.

진중한 표정을 한 경청의 자세에서 이를 알 수 있었다.

“태조께서 창업의 웅대한 꿈을 품으신 건 오직 백성이 가엽기 때문이었소. 지옥보다 끔찍했던 고려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백성을 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으셨기 때문이었소. 태조께서 품으신 원대한 꿈에 성리학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소. 태조께서는 오직 백성을 바라보셨으니까. 그런데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가 되었소. 어째서……?”

정도전을 위시한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의 나라를 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성리학의 나라를 품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를 말했다.

“백성을 지옥에서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성리학이었기 때문이오.”

단호하게 말했다.

“무수한 개국 공신이 성리학자였기에 성리학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옳았기에 성리학의 나라가 된 것이외다. 나는 단언할 수 있소. 조선이 창업되었을 때 성리학은 오직 하나를 바라봤소.”

“그것이…… 무엇이오?”

“백성.”

백성(百姓).

정치인에게 이보다 물린 단어는 없다.

정치인에게 이보다 쉬운 단어도 없다.

백성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서.

대의명분에 늘 등장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백성은 그저 백성일 뿐이기에 그러하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때로는 백성이라는 두 글자는 그 무엇보다 큰 힘을 낸다.

아주 가끔 백성이라는 두 글자는 최고의 가치를 낼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백……성.”

허적의 입에서 나온 나지막한 한 마디.

단 한 마디였으나 천금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여, 성리학은 선택되었소.”

나는 이제 더는 허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백성이라는 단어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말하오. 이는 성리학만이 옳기에 발생한 일이라고. 하여, 당연하다고. 그러나 아니지요. 당시 태조께서 성현의 뜻이기에 성리학을 도구로 삼으셨소? 단언할 수 있소. 아니라고.”

조선의 창업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이성계의 힘으로 진행되고 완성됐다.

만일 이성계의 강대한 군사력이 없었다면 역성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성리학자가 아니다.

그가 볼 때 당시 성리학자가 가장 바른말을 했기에 성리학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 지극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 옛날, 태조께서 대업을 품으셨을 때는 성리학이 민본을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오.”

“…….”

허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잠시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되었다.

지금은 허적의 머릿속을 고려할 때가 아니다.

이미 판은 시작되었으니까.

본론을 꺼냈으니 말이다.

하여, 나는 본론이 만들어 낸 위력의 칼을 거침없이 사용하기로 했다.

“귀족이 백성을 잡아먹는 세상. 땅이 백성을 파묻어 죽이는 세상, 외세가 백성을 죽이는 세상. 그리고 한 명의 백성이 내일도 살기 위해서 다른 백성을 외면해야 하는 세상……. 백성은 사람이 아닌 나라, 지옥보다 끔찍했던 추악한 나라, 고려를 무너뜨리는 대업에 복제가 중요하오?”

“……이판.”

“전혀 중요하지 않소. 개의 똥보다 가치가 없소. 단언하오.”

“!!!”

“만일…… 만일에 말이외다. 그 엄중한 정세에 성리학자들이 복제를 운운했다면 태조께서는 성리학을 선택하시지 않았을 것이오.”

“!!!”

허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표정은 경직됐다.

지금까지 한 말과 요지는 같다.

그러나 대놓고 ‘선택’을 언급했다.

파급은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나도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

“하늘이 도왔을까. 당시 그 어떤 성리학자도 복제를 운운하지 않았소. 왜?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오.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를 말이오. 바로 그래서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가 될 수 있었소.”

“그때와 지금은 다르오.”

“뭐가 다르오?”

다르지 않다.

아니, 다를 수도 있다.

머지않아 고려보다 더 끔찍한 세상이 개막될 것이다.

그래서 다르다.

그리고 나는 허적의 답변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다시 금기를 밟았다.

조선의 원칙이라는 칼을 들고.

“포은 선생은 충절의 화신이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를 부여잡았으니까.”

“무슨 말이오?”

“포은 정몽주는 내게 딱 한 가지를 말하고 있소.”

“…….”

“성리학의 경지는 백성과 무관하다는 것이오.”

“!!!”

포은 정몽주는 조선의 창업에 반대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조선의 하늘이 되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이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사림은 포은 정몽주라는 하늘을 우러러본다.

나는 이를 찌른 것이다.

허적의 안색은 창백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약간의 당혹감과 많은 노여움이 공존했다.

만일 내가 송시열이 아니었다면 큰 화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포은 정몽주는 썩은 귀족의 나라를 끝까지 부여잡은 인물이오.”

“충절이외다.”

조선은 희한한 나라다.

태조 이성계와 마지막까지 맞서 싸운 정몽주를 숭상한다.

누구도 입에 담지는 않지만,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모순이다.

정몽주를 숭상한다는 건 이성계가 역도라는 걸 의미하니 말이다.

무려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러고 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것이 충절이면, 태조께서는 역도요?”

“!!!”

제정신이라면 입을 싹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정몽주가 충절의 대명사라고 여길지라도, 흑백을 앞세운 논리의 덫에 빠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오늘을 말할 때다.

“복제가 중요하다고 하셨기에 3년 복을 드렸소. 또 무엇을 드려야 하오? 대체 무엇을 드려야 백성을 바라볼 것이오? 서인의 뿌리를 뽑아버릴 환국이라도 원하시오?”

내 말은 거칠어졌다.

말 그대로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태조께서 대업을 품으셨을 때. 바로 그때…….”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게 휘둘렀다.

“성리학자가 지금 우리와 같았다면 성리학은 고려와 함께 땅에 파묻혔을 것이오.”

“!!!”

“성리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오.”

“!!!”

“내게도 성리학은 도구에 불과하오.”

“!!!”

“왜……? 아무리 고여 썩었다고 한들 아직은 성리학이 민본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오.”

“……이판.”

모든 걸 쏟아냈다.

그리고 이제야 처참하게 일그러진 허적의 얼굴이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의 말은 허적을 설득한 게 아니라 불쾌함을 준 것이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사문난적…….”

……허적의 입에서 사형 선고가 나왔다.

나는 이미 사문난적의 길을 가겠노라 결의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규정되는 건 그냥 주적이 되는 것이다.

또 사문난적이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나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저 허적과 손을 잡을 수 없을 뿐.

그러니까 오늘 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허탈함이 치솟아서 그럴까?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말이 새어 나왔다.

“나를 사문난적으로 규탄해도 좋소. 기꺼이 인정하겠소. 사문난적이 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오.”

“우암 송시열, 당신은 사문난적이오.”

“…….”

사형이 집행됐다.

희한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걸었다.

방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문난적이 맞소.”

“…….”

이건 부관참시(剖棺斬屍)였다.

답변하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게 한 나지막한 목소리.

아주 잠시만 기다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일 뵙지요.”

나는 허적을 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