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개시(開始)
아침햇살이 참으로 좋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가슴이 몽글거렸다.
손가락 끝은 괜히 움찔거렸는데 그 느낌이 정말 부드럽다.
눈매는 절로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웃음이 막 새어 나왔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대자로 누워서 실실 웃고 싶을 정도였다.
그냥 기분이 좋다.
그냥……?
아니다.
그냥 좋은 게 아니다.
이유가 있었다.
-내일 뵙지요.
허적의 한마디.
그 말에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했다.
그만큼 좋았다.
당연했다.
나는 송시열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20대 청년이다.
무려 남인의 영수를 설득한 성과는 환희에 한껏 취하게 했다.
누구라도 칭찬할 만한 성과이니 말이다.
그러니 싱글벙글해도 된다.
그래서 나가지도 않고 마당에서 실실 웃고 있었다.
물론 힐끗힐끗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감내해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대놓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딱 그때였다.
“우암.”
나를 부르는 목소리.
무려 송시열의 ‘호’를 불렀다.
깜짝 놀라서 등을 돌렸다.
반듯하게 생긴 사람 한 명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정보가 입력됐다.
바로 윤선거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나.”
대충 상황을 보니 나를 여러 번 불렀던 거 같다.
나는 혼자 실실 웃고 있느라 듣지 못했고.
그나저나 윤선거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행동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원래 송시열과 윤선거는 가까운 벗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계가 소원하다.
이유는 많고, 스토리는 길다.
결정적인 원인을 딱 하나 꼬집으면 윤휴였다.
과거 윤휴가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자 송시열은 노발대발했다.
문제는 이때 윤선거가 윤휴의 편을 든 것이다.
그러자 송시열이 윤선거와 절교를 선언했다.
그래. 내가 송시열이 되었을 때 스쳤던 무수히 많은 정보.
그중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한 말.
-윤휴와 절교를 선언하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네.
……이 말의 청자였다.
아 부끄럽다.
진짜.
바라보기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송시열은 정말 옹졸한 인간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옹졸하다.
한때 친구였던 윤휴를 편든 친구 윤선거에게 삐친 것이니 말이다.
지금 윤선거의 태도를 보더라도 송시열은 유치한 인간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윤선거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고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니 말이다.
생각을 끝낸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미촌. 어서 오게.”
“아……. 그, 그런가?”
“뭘 그렇게 놀라나? 우선 안으로 들어가지.”
예상하지 못한 환대였을까?
윤선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단호한 축객령을 각오했던 게 분명하다.
과연 송시열이다.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앞장섰다.
사랑방에 털썩 앉았다.
윤선거는 여전히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더니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네.”
“……무슨 말인가.”
“알면서 왜 물어보나?”
“……우암.”
“과거 내가 옹졸했네.”
고급 단어를 사용해줬다.
과연 윤선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으나 어쩌겠는가.
내가 익숙해져야지.
“허. 이 사람 미촌.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생각인가?”
“아, 아닐세. 내가 어찌 그리할 수 있겠나.”
“하하하. 이 사람. 왜 이렇게 당황하나.”
“아…….”
“안 그래도 자네를 먼저 찾아서 진실로 사죄하려고 했다네.”
“아…….”
“그런데 자네가 먼저 찾아왔어. 역시 자네는 아량이 넓어.”
“허……허허.”
계속해서 고급 어휘를 사용하자 윤선거의 정신이 혼미해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짧게 대화를 나눠보니 윤선거라는 사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명성과는 달리 상당히 조심성이 많다.
차분하고…… 차분하고…… 됐다. 그냥 소심한 사람이다.
그나저나 여전히 버벅대는 윤선거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이 아니라 포근함을 담은 웃음이었다.
이 진심을 느꼈을까?
“……우암.”
윤선거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슬쩍 봤는데 눈동자에도 약간의 물기가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런 건 익숙한 장르가 아니고, 원하는 전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재빨리 말을 돌리는 게 좋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간 무탈하셨나?”
“여러 번 자네를 만나려고 했으나 쉽사리 찾아오기가 어려웠네. 나를 향한 경멸에 찬 자네의 눈동자와 차가운 표정이 떠올랐으니까.”
“잊어주게.”
“그러다가 최근 자네의 소식을 접했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찾아온 것일세.”
요즘 도성의 최고 화두는 바로 나다.
상상 이상의 더러운 성격을 가졌던 송시열이 어딘가 조금 변했다는 소식은 장안의 화제일 수밖에 없으니까.
무수한 말 중 윤선거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 말이 딱 하나 있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송시열과 윤선거의 사이가 멀어진 원인은 윤휴였다. 그런데 내가 윤휴와 제법 괜찮게 지낸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소심한 성격을 가진 윤선거도 용기를 냈을 것이다.
“이런 말을 어찌 여길지 모르겠으나, 우암 송시열 하면 졸렬함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나.”
……졸렬이라니.
아예 비수로 찌르는구나.
하마터면 헛기침할 뻔했다.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일세. 자네의 졸렬함은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거의 선전포고다.
나도 모르게 볼이 씰룩거렸다.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렸고.
윤선거는 내 심리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심한 성격이 분명한 윤선거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허공을 향해 있었으니까.
소태 씹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했네. 그간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네.”
“허.”
“다시 태어났다고 여기고 과거의 일은 그만 언급하는 게 어떤가.”
“자네 정말 변했군.”
“칭찬으로 여기겠네.”
윤선거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와 화해한 사실이 정말 기쁜 것 같았다.
아. 송시열이여.
이 죄 많은 사람이여.
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인기척이 들렸다.
“우암.”
거의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우리 6촌 형 송준길이었다.
“허…….”
윤선거를 보고 깜짝 놀란 송준길
그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면서 윤선거를 다시 쳐다봤다.
“미촌. 괜찮나?”
고개까지 절레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암을 아끼는 자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그러나 옹졸한 마음을 푸는 방법을 찾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일세. 나는 자네가 괜한 봉변을 당할까 진심으로 걱정되네.”
그러더니 나를 슬쩍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도 적당히 하게. 왜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예?”
“허. 소심한 미촌이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을 없지. 보나 마나 자네가 불러서 과거의 일을 하나씩 세밀하게 언급하면서 무참하게 타박했겠지.”
“…….”
“그러나 우암. 과유불급이라고 했네. 적당히 하게. 갈수록 편히 보는 게 어렵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똥은 송시열이 쌌는데 말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계속하겠네.”
“…….”
“나는 자네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물론 졸렬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자네의 간장 종지만 한 마음으로서는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와……. 잔소리 진짜.
심지어, 친척 형이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과는 강도가 아예 달랐다.
진짜 인정사정이 없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슬쩍 윤선거를 바라봤는데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아니, 이럴 때 좀 나서서 송준길을 정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불편함이 가득한 내 시선을 느꼈을까.
윤선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자네는 가만히 있게. 그리고 우암. 자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데 어찌 미촌을 노려보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나.”
“그것이 아니라 조금 전 우암과 화해를 했습니다.”
“그래. 화해를 하라는 말…… 응? 우암과 뭘 했다고?”
드디어 송준길의 잔소리가 멈췄다.
눈을 껌뻑이며 윤선거를 바라보더니 이내 나도 쳐다봤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과거는 덮고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자네 미촌을 겁박했나?”
“……아닙니다. 소제가 진심으로 사죄했습니다.”
“아니, 송시열이 사죄를 했다고? 졸렬함의 크기가 천하를 덮을 수 있는 송시열이?”
“…….”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걸까.
수염까지 파르르 떨릴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목울대로 짜증이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는 없다.
필생의 인내를 발휘해서 겨우 참았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왜 오셨습니까?”
그제야 송준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말을 꺼냈다.
“호포제 시행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네.”
이제 시작이구나.
깔끔하고 전사적인 일 처리가 딱 마음에 들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휴군요.”
“허. 어찌 알았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입궐 준비를 해야 하니 말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어찌 알았나?”
송준길의 잔소리도 본격적으로 또 시작됐다.
하늘은 어쩌자고 나를 송시열에 빙의시키고, 송준길에게 잔소리를 내리셨는가.
원통했다.
-----
호포제는 꾸준히 물밑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었기에 상소 하나 올라왔다고 파급이 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소를 올린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사정은 완벽하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서인은 호포제를 찬성하고, 남인은 반대한다.
즉, 전자의 주장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후자가 호포제를 발의하면 사정은 완벽하게 달라진다.
그랬다.
남인의 중추 중 한 명인 윤휴가 호포제를 발의하면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물론, 윤휴가 호포제를 동의하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나와 서인의 주장에 동조하며 힘을 보태는 것과 직접 단독으로 법안을 발의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남인은 대책 논의에 애쓰고 있을 것이다.
송준길의 잔소리에 진이 빠진 나는 겨우 입궐에 성공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소 다른 상황이 보였다.
홀연히 돗자리를 깔고 있는 온 이가 있었다.
익히 아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레 알게 됐다.
남인의 강경파로 유명한 허목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원래라면 아주 반가워야 하는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허목은 정략에 능하기에 남인의 강경책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책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벌써 돗자리 깔고 연좌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과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대충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나는 공사다망하니까.
지나가려던 그때 시선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허목을 말하는 게 아닐까?
진짜 살벌했다.
느낌이 딱 왔다.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싫어한다.
이럴 때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다.
변수가 생긴 지금은 이연과 작전 회의를 하는 게 옳으니까.
그러나 나의 도주는 미수에 그쳤다.
“참으로 대단하시오.”
듣기만 해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허목을 바라봤다.
물론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너무 살벌하니 말이다.
“무슨 말씀이시오?”
“어림도 없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하. 설마 호포제를 이렇게 발의할 줄은 몰랐소. 참으로 간악하시오.”
“호포제는 윤휴가 발의했소만.”
“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오. 호포제는 이판이 꾸준히 주장한 정책이오. 아니시오?”
“어차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지요. 그러니 어찌 부정하겠소. 하지만 윤휴 역시 호포제를 필생의 신념으로 삼고 있었소. 내 말이 틀렸소?”
“하하하. 어림도 없소.”
……무슨 말이야?
무슨 대화에 질서가 없어?
그래. 맞다.
허목은 원 역사에서 송시열의 천적이었지.
그 상성이 어디 가지는 않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