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조선 500년사 최고의 정치력
허목의 매서운 눈길은 정말 재수가 없었다.
특히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건 진짜 재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주고 싶었다.
진짜 둘만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삼삼오오 모이는 관리들은 내게 인자한 미소를 장착하게 했다.
보살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림도 없다고 하셨소?”
“흥! 윤휴가 이판 대감과 야합(野合)하여 기어이 호포제를 관철하려고 하지만, 나 허목이 눈을 뜨고 있는 한 가당치도 않을 것이외다.”
판세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고 들었다.
사실 윤휴가 호포제를 발의하면 남인이 자중지란에 빠질 것으로 기대한 건 사실이다.
그새 조정에서 논의가 될 때 내가 철의 장벽으로서 상소와 연좌를 물리칠 계획이었다.
즉, 반대파의 모든 공격을 내가 감당하고 정책은 정책대로 추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핵심을 바로 찔러 들어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확한 핵심 말이다.
“여기까지 이르니 무슨 결론이 내려졌는지 아시오? 이판은 정말 윤휴와 손을 잡았을까?”
“…….”
“제법 촘촘하게 계획한 야합이었기에 하마터면 윤휴와 논쟁을 펼칠 뻔했소. 흥. 만일 그리되었다면 남인은 자중지란에 빠졌을 것이오. 이 또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가정은 아니었소.”
“그러니까 내가 윤휴를 속여 남인을 혼란에 빠트릴 생각을 했다는 것이오?”
“하하하. 그러나 어림도 없소.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이 허목은 절대 속일 수 없소.”
“오해가 있는 것 같소만.”
“어림도 없소.”
……뭐가 계속 어림도 없다는 건지.
정말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
“지난번 복제의 일과 이번 일을 유심히 살폈소.”
대체 이 흐름은 뭘까?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귀신도 놀랄 만한 계책은 바로 윤휴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걸.”
“……조금 전에는 내가 윤휴를 이용하여 남인의 혼란을 유도했다고 했소만.”
“이상했소. 참으로 이상했소.”
그냥 포기하자.
그래. 허목.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해.
“정략이라고는 세 살 먹은 아이보다 부족한 이판이 그토록 촘촘한 계획을 수립하다니. 그리고 이번 일까지……. 그러나 이 모든 게 윤휴와 야합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요.”
“…….”
“그렇소. 바로 그렇소. 윤휴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오. 더욱이 윤휴는 남인이기에 내부에서 교란하는 역할까지 도맡아 했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소이까.”
“…….”
“끌. 그 와중에도 이판 대감은 모든 공을 홀로 독식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하시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두서가 없어도 이보다 없을 수가 있을까.
대충 정리하면, 윤휴가 계책을 수립했는데 내가 잔머리를 굴렸다는 말 같다.
느낌 딱 왔다.
허목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럴수록 좋다.
어쩌면 남인의 모든 화력이 허목에게 집중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즉, 허목만 잡아 놓으면 남인은 경거망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조만간 이연이 직접 호포제를 추진할 것이니까.
그러면 나는 허목의 전투력을 더 올려주면 된다.
나는 뜻밖의 호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하하하. 어림도 없소이다. 그런 식으로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은 마시오. 이미 윤휴가 야합한 것을 알았으니 더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시오.”
심드렁하게 답변하자 허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도발에도 내가 별로 반응하지 않으니 언짢은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공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요.”
“이제라도 이실직고하니 참으로 다행이오.”
“뜻대로 여기시오.”
“하하하.”
허목은 재수 없게 웃으면서 오만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울컥할 뻔했다.
말로 꺼내는 건 대수롭지 않은데 표정과 눈빛이 진짜 나를 열받게 한다.
진짜 겨우 참았다.
“간악한 술책이 백일하에 밝혀졌거늘,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그건 잘 모르겠으나, 호포제는 필요하오.”
“어림도 없소. 나 허목이 눈을 뜨고 살아 있는 한 호포제를 관철할 수는 없을 것이오. 윤휴가 무슨 생각으로 이판과 손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소. 그러나 함께 손을 잡은 이의 옹졸한 뒷공작을 확인한다면 반드시 철회할 것이오. 하하하. 이판. 어쩌오? 내가 이겼소.”
호포제는 정당하다.
군포의 부담을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내가 이 정당성으로 이 시절 사대부와 논쟁할 수는 없다.
아니, 설득할 수가 없다.
이는 원 역사에서도 불가능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허목은 아니다.
이 사람은 대화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러나 자극할 수는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엄청나니까.
“어찌하여 공께서는 이토록 속이 좁소?”
“……뭐요? 하하하. 옹졸의 대명사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나는 서인과 남인으로 분열한 조정을 잘 다독이고자 대승적 차원에서 복제를 양보했소.”
무릇 복제는 이 시절 사대부들의 생명이었다.
이 중요한 결과를 쟁취한 게 아니라 얻은 것이라고 이르면 어찌 되겠는가.
예상대로 허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에는 내가 재수 없게 웃어줬다.
“복제를 양보했으면 공께서도 하나쯤은 물러날 줄 알아야지요.”
일부러 남인이 아니라 ‘공’이라고 했다.
남인 전체와 싸울 필요는 없다.
그래서 정확하게 상대를 규정했다.
“설령 호포제를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요. 이를테면 호포제의 원안은 과하니 수정을 제안한다거나. 한데, 공께서는 대안 없는 반대만 하고 있소.”
붉으락푸르락해지는 허목의 안색.
예상대로 호로록 넘어왔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나는 계속 떠들었다.
“무릇 정치는 화합의 장이라고 할 수 있소. 서인과 남인의 정책이 다른데 매사 반대만 한다면 무엇이 제대로 되겠소. 양보하고 조율하며 조정을 이끌어야 하오. 한데, 공께서는 뜻과 다르다고 하여 대책도 없이 연좌를 시도하였으니, 이보다 개탄스러운 일이 하늘 아래 어디 있겠소이까.”
파르르 떨리는 허목의 눈썹.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더 참으면 노기에 질식사할 수준이었다.
분위기 좋다.
나는 허목이 노발대발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거들기로 했다.
그래서 진짜 재수 없게 웃었다.
슬쩍 한마디 던져줬다.
“참으로 속이 좁소.”
“!!!”
마침내 허목의 입술이 움직이며 분노가 터져 나오려는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던 순간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판의 말이 옳소.”
듣기만 해도 위엄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무게감.
바로 조선의 군왕, 이연이었다.
나는 황급히 극진한 예를 취했다.
허목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시 상기해보니 이연은 나와 허목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니, 왕이 오는데 미리 알리지도 않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연이 말하지 말라고 했을 게 뻔하니 누구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나저나 왜 왔을까?
자고로 연좌하는 선비와 직접 대화를 나누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불만을 토로하며 반대하는 정치인보다 말이 안 통하는 존재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이연은 굳이 이곳까지 나왔다.
조심스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하. 어인…….”
그때 이연은 유려하게 손을 내저었다.
용포가 보기 좋게 휘둘리며 공간을 지배했다.
매번 느끼지만 이런 위엄과 존재감은 진짜 타고나는 것이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물러섰다.
그리고 이연은 허목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복잡한 정략은 모르오.”
“전하.”
“누가 누구와 손을 잡고 공작을 펼치고…… 대저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소.”
“신은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원칙을 말한 것이었사옵니다.”
“원칙이라. 그 원칙의 기준은 대체 무엇이오? 또한, 그 원칙은 누가 세우는 것이오?”
“무릇 원칙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이연은 허목의 말을 시작과 동시에 잘랐다.
그리고 나지막하지만 울림이 있게 말했다.
“이 나라 조선의 군왕이 신하들의 사사로운 합종연횡 따위를 고려해야 하오?”
“!!!”
“내가 그래야 하오?”
와……. 대단하다.
이연은 복잡한 정치공학이나 원론 따위를 단번에 걷어냈다.
군왕의 권위로 말이다.
한마디로 그냥 찍어 누른 것이다.
그 순간 스치는 게 있었다.
바로 3년 복이었다.
그랬다.
복제가 진통 없이 3년 복으로 관철된 순간, 이연의 왕권은 수직으로 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왕권 강화를 선호하는 남인 출신이고 강경파로 분류되는 허목이었으니 낯빛은 창백할 정도로 질렸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소?”
“신이…… 실언을 했사옵니다.”
“하면, 남은 문제가 무엇이오?”
반론 따위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진 물음이었다.
이 순간 허목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허목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호포제이옵니다.”
“그래요. 호포제. 그 호포제.”
이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호포제를 읊조렸다.
그의 입에서 호포제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세기 어려울 때였다.
“나는 구중궁궐에 갇힌 몸이오.”
“전하.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내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장계와 상소밖에 없소.”
“…….”
“내가 백성의 말을 듣는 방법은 신하들의 간언이오.”
이연은 서서히 좌우를 돌아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얼마간의 여유를 품은 그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하여, 묻겠소. 백성들의 고충에 대해서.”
바보가 아닌 이상 질문의 의도를 모를 수는 없다.
바로 군포로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해서 말하라는 것이다.
허목을 단번에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용인술이었다.
직접 보고 있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으니까.
“할 말이 없소?”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호포제는 반상의 법도를 무너뜨리는 정책이옵니다. 이는…….”
“거기까지.”
와……. 멋지다.
지금 상황은 허목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면서 논점을 흐리고자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연이 단 한마디로 허목을 제압했다.
“내가 언제 호포제의 당위성을 물었소?”
“……아니옵니다.”
“한데, 어찌하여 다른 말을 꺼내시오? 나는 분명 백성들의 삶을 말하라고 했거늘.”
“…….”
“허……. 혹여 군포로 고통받는 백성을 보지 않소이까?”
이번에는 정확하게 군포를 언급했다.
미꾸라지처럼 흙탕물을 만들고자 한 허목은 안색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진짜 완벽하게 찌그러진 것이다.
그래도 뭐 여기까지일 것이다.
보통 이 정도면 적당하게 퇴로를 확보해주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답하지 않소?”
이연은 보통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퇴로를 기대하던 허목은 당황하여 힘없이 읊조리듯 말했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늘 걱정하고 있사옵니다.”
죄를 청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즉, 다시 퇴로를 요구하는 답변이었다.
이때…… 나는 봤다.
이연의 입꼬리가 괴이할 정도로 씰룩거리는걸.
그리고.
“아. 그렇소?”
심각하게 뒤틀린 목소리.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지배했다.
미세하게나마 움직임을 유지하던 나와 관리들은 일제히 경직됐다.
다소 편하게 들리던 숨소리는 작동을 멈춘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소?”
다시 울린 뒤틀린 목소리.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은 고개를 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와 관리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하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게 할 정도의 조롱.
다시 이어진 이연의 말.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계속 걱정하시오.”
“!!!”
“나는 절대 그대의 연좌를 막지 않으리다.”
“!!!”
와……. 이연은 진짜다.
숨통이 막힐 정도였다.
그리고 또…… 이어진 이연의 말.
“연좌를 윤허하오.”
어명이 내려졌다.
이로써 허목은 연좌를 중단할 수도 없게 됐다.
사상 최고의 압박이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원 역사의 이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 것이라는 걸.
그리고 지금의 이연도 그러하다는 걸.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이연의 정치력은 조선 500년사 최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