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보이지 않는 손(2)
일파만파(一波萬波)라고 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어지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상 범위를 벗어나도 완벽하게 벗어났다.
이런 상황을 원한 게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다.
가마 따위를 타고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달렸다.
얼마나 급하게 정신없이 달렸는지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궐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대감.”
낭랑한 목소리.
윤휴였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윤휴의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속이 어지러울 수는 있다고 여겨졌으나, 지금은 한가하게 명상의 시간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뭐 하나? 할 일이 태산보다 많을 텐데?”
“거두절미하고 여쭙지요.”
“거두절미하고 가서 일하게. 하루가 아깝거늘.”
“진정 남인을 궤멸시키려고 하였습니까?”
“이거 듣던 중 놀라운 헛소리군. 무슨 말을 하나?”
“예. 소생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감의 정치력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엉망이니까요.”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그건 소생이 묻고 싶은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윤휴의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조금만 신경 쓰면 느껴질 정도로 날이 서있다.
이 인간은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백번을 생각해도 대감의 실력이 아닙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대감께서 남인을 고사시킬 요량으로 이 판을 수립했다고 말입니다.”
“하……. 자네, 한가하나?”
“또 말을 돌리십니까?”
“나는 분명 자네에게 세종의 길을 일렀네. 자네 역시 동의했어. 한데, 뭐라? 남인을 어쩐다? 지금부터는 말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부터 하게. 알겠나?”
“…….”
“마지막일세. 알아듣게 설명해. 아니면 더는 무례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감정을 담아 경고했다.
물론 윤휴는 눈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대체 송시열은 뭐 하는 사람일까.
괜히 입맛을 다시며 뻘쭘함을 밀어낼 때였다.
“허목 선생은 세종의 길에 동의했습니다.”
“뭐……?”
이건 대체 무슨 말이야?
눈을 껌뻑이며 쳐다봤다.
침묵으로 상황의 해명을 요구했다.
“단지 호포제에 동의하지 않을 뿐입니다.”
“……자네, 누구 마음대로 세종의 길을 떠들고 다녔나?”
“예?”
“실성했나?”
“무,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열이 제대로 뻗쳤다.
진짜 기력만 있으면 윤휴를 패버리고 싶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윤휴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말했다.
“자격.”
“…….”
“자격이 있어야 해.”
“대감. 허목 선생은 남인의 중추입니다.”
“그 입 다물게. 고작 학문의 경지가 뛰어나다고 하여 함께 결의할 수 있을 정도로 세종의 길이 가볍게 보이는가?”
“대감이야말로 알아듣게 설명하십시오. 작금의 조선에서 허목 선생이 함께하지 못할 길이 대체 무엇입니까.”
“하! 세종의 길은 이 나라 조선을 변혁시킬 노선이야. 됐네. 간단하게 말하지. 자네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지 않나? 자네가 그토록 칭송하는 허목이 진정 세종의 길에 동의했다고 생각하나? 그는 단지 세종이 남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야!”
“!!!”
윤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총명한 인사였기에 내 말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씹어 먹을 듯 말을 내뱉었다.
“만일 진정으로 동의했다면 호포제에 찬성했어야지.”
“하, 하지만 호포제 찬반은 당색과 무관합니다.”
“웃기고 있네.”
“……대감.”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
“남인은 신분제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그들이 호포제를 반대하는 건 효과에 의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할 때 신분제가 동요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야. 아닌가?”
“대감. 길이 다를 뿐, 조선을 위하는 정책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다른데 왜 말했나?”
“…….”
세종의 길.
거창한 이름만큼 거창한 것이다.
어떤 조직은 아니다.
바로 노선이었다.
노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명성이다.
선명성이 유지되려면 사람의 동의(同意)가 필요하다.
만일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노선에 대해서 떠들면 더는 노선의 위치를 지킬 수 없다.
하여, 조직보다 거창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휴가 함부로 행동한 것이다.
미리 제대로 말하지 못한 내 탓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따지면 끝도 없다.
그냥 윤휴가 생각이 없었다.
한심하게도 말이다.
무려 군주로부터 직접 어명을 받은 인간이 말이다.
신경질이 가득한 내 말투에 윤휴는 더 나서지 못했다.
너무 한심해서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목은 자격이 없네.”
“…….”
“훗날은 어찌 될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야. 다시 말해야 하나? 허목이 연좌에 나선 것 자체가 자격이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야.”
“…….”
“됐네. 그에게 세종의 길은 언제 말했나?”
“대감께 그 말을 들은 당일입니다.”
“하. 그 뒤에도 자네는 나를 만났네.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나?”
“구태여 말해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어차피 시일이 지나면 남인도 의기투합할 것이니 그때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겠지. 그게 아닐 것이야. 자네는 그 순간에도 서인인 나를 경계한 것이야. 아닌가?”
“그것이…….”
“백주에 술을 처먹더니 뇌수까지 취하셨나?”
윤휴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러나 한 짓이 있으니 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한심하군. 이 일은 차후에 다시 말할 것이야. 지금 자네는 작금의 상황을 내게 설명해야 할 것이네. 눈만 뜨면 왕권 강화를 부르짖는 남인이 이 난리를 만든 이유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말하라는 말일세.”
“어제…… 남인의 회합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떠들었나?”
“그것이…….”
윤휴의 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단 들어야 했다.
*****
“진퇴양난. 그야말로 진퇴양난일세.”
윤선도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두운 안색과 불편한 눈동자는 작금의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여기는지 한눈에 알게 했다.
입술을 세게 깨물던 윤선도는 날카롭게 시선을 옮겼다.
“호판은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나?”
“애초 불필요한 연좌를 한 겁니다.”
허적의 말에 윤선도의 미간은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답답함과 불편함을 가득 담은 숨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연좌, 상소…… 예. 다 좋습니다. 하지만 몇 번을 말했습니까. 매사 신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결과를요.”
“이보게!”
“선생의 말씀대로 진퇴양난, 그 자체입니다. 지금 우리 남인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윤선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허적의 언행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인의 영수라는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났다.
“선생. 더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자네 지금 용인할 수 없다고 했나?”
“예. 이 이상 독단적인 행동을 멈추십시오. 그간 선생의 행보에 말을 하지 않았으나, 더는 곤란합니다.”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던 윤휴는 적잖이 당황했다.
허적과 윤선도가 다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다. 그러나 허적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생각이 깊어졌다.
어쨌거나 작금의 상황은 호포제 상소로부터 촉발되었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또 이상한 게 있었다.
평소 허적이었다면 분명 호포제 상소부터 거론했을 것인데 아무런 말이 없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 내가 허목을 거들면 어찌할 생각인가.”
“주상께서 어명으로 윤허하신 허목만의 연좌입니다. 정면으로 반기를 들 생각입니까.”
“…….”
“그의 처지는 딱하지만, 어명의 권능에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자네…….”
윤선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매서울 정도로 허적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뭐 하러 남인의 영수라는 위치에 있나?”
“허.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자네는 남인의 영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가져야 할 책임감이 전혀 없다는 말일세.”
“말씀이 과하십니다?”
“하! 내 말을 똑바로 듣게!”
결국 고함을 지른 윤선도.
허적은 헛웃음을 지으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행동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허목은 홀로 연좌에 고립되고 말아.”
“자승자박(自繩自縛)이지요.”
“참으로 답답하군. 과정은 이미 중요하지 않아. 결과를 보라는 말일세. 허목을 저리 방치하면 우리 남인은 정치 집단으로서의 존재감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어찌 모르는가?”
노회한 정객의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목이었다.
그가 남인을 위하여 전선에서 싸운 사례는 셀 수도 없다.
그런 허목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남인 전체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를 깨달은 허적도 반박하기 어렵기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윤선도는 다시 화를 가라앉히며 가르치듯 말했다.
“남인의 영수라면 응당 남인 전체를 먼저 고려해야 하거늘, 자네는 상황을 피해갈 수만 찾고 있네.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
“더 말하지 않겠네. 허목을 구제해야 하네.”
“……불가합니다.”
“호판!”
“두 분 모두 그만하십시오.”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여긴 윤휴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이번 일은 문보 선생이 과했습니다.”
“하! 백호! 자네가 우리 남인의 당론과는 무관하게 호포제를 찬성하는 건 알고 있네. 이번에도 홀로 상소를 올린 일도 필생의 신념을 존중하여 탓을 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하여 자네의 책임이 없나? 아니지. 어찌 없을 수가 있나. 한데, 감히 그런 말을 하는가?”
“선생. 주상께서 교지를 내리시어 반포한 정책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소생이 올린 상소에 불과했습니다. 한데, 문보 선생이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종래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윤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표면상으로 볼 때 명백한 하나의 상소에 불과했다.
어디 이뿐인가. 군왕은 아무런 교지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허목이 연좌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허목이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해봤습니다. 문보 선생은 어찌하여 그리 나섰을까. 그리고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강경책만을 고집하는 걸까. 누구보다도 정국의 판세를 잘 읽는 선생께서 말입니다.”
“…….”
“소생. 송구하지만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 정녕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으셨습니까. 소생이 호포제 상소를 올리자 이를 무력화하여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없었습니까?”
윤선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가정은 옳았다.
이번 일은 허목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윤선도와 상의한 것이었다.
윤휴는 쓰게 웃었다.
“다른 정책이었다면 이런 강수를 두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호포제는 관철하기 어려운 정책이라 능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으니 발생한 일이지요.”
“어처구니가 없군. 뒤에서 이런 정략을 획책하였다니.”
허적이 혀를 차면서 동조했다.
윤휴는 이 또한 의아했다.
되돌아보면 허적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는 늘 서인과 타협을 주장하였기에 수시로 다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소 허적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호포제 발의부터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티가 날 정도로 편을 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다소 진이 빠진 듯한 목소리.
그러나 날카로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윤선도는 윤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어. 자네라면 당론과 무관하게 나설 수 있지. 그런데 나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어. 시기가 너무 우습지 않나? 홀로 이렇게 나설 것이라면 대체 우리에게 세종의 길은 왜 언급했나? 사문난적은 대체 무엇인가? 뭐하러 의기투합을 청하였나?”
“그건…….”
“애초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었던 게 아닌가?”
“선생. 소생은 진심이었습니다.”
“자네는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
“예?”
“자네가 우리에게 세종의 길을 말했을 때 확실히 진심을 느꼈으니까. 그런데 자네 말고 우암 송시열. 그와 손을 잡지 않았나?”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윤휴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지켜보던 허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