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4화 (24/298)

24화 시대(時代)(1)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정국……까지는 아니다.

이미 남인의 패배는 확정적이었으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정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결과가 나오는 과정이 엄숙하고 첨예하였으며 살벌하였기에, 궐 안팎의 공기는 차가웠다.

적어도 연좌 정국이 진행될 동안 궐 안팎에서 괜한 웃음은 듣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조정의 모든 이가 납작 몸을 엎드린 상태였다.

임진왜란 이후 그 어떤 군왕도 해내지 못한 절정의 왕권이 스산할 정도로 위압감을 발휘한 결과였다.

그래서일까?

이연의 명을 받고 입궐한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평소와는 달랐다.

내가 향한 곳은 늘 독대하던 편전이나 침전이 아닌 조선의 본 궐, 창덕궁의 법전(法殿)인 인정전이었다.

자고로 법전은 궐에서 가장 격이 높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창덕궁의 가장 중심 건물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규모부터 달랐다. 정면 5간, 측면 4간 20간이다.

위용을 보이는 두 겹의 팔작지붕과 연결된 기둥은 다포식이었다.

시선의 끝에 보이는 용마루도 다른 건물과는 결이 달랐다.

바로 이곳에서 이연이 나를 부른 것이다.

군왕이 궁의 장소를 마음껏 이용하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법전인 인정전에서 굳이 나 혼자 볼 이유는 없다.

한마디로 정말 ‘굳이’였다.

그러니까 현상만 보면 이러했다.

조선은 독대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정치는 공적인 영역이었기에 그러했다.

물론 독대가 아예 없을 수는 없으나, 최대한 피한다.

그런데 이연이 이조판서인 나를 인정전으로 불렀다.

창덕궁에서 가장 공개적이며, 가장 권위가 있는 장소로.

이는 이연의 왕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걸 의미했다.

대놓고 독대할 것이라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쉽게 말하면 반대하려면 반대해보라는 도발이다.

이를 생각하니 엷은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놀라운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토록 왕권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까.

매번 느끼지만 이런 정치 감각은 정말 타고난 것이다.

어느새 인정전에 이르렀다.

당연하겠지만 이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군주가 신하를 기다리는 법은 없으니까.

차분하게 인정전 내부를 살피듯 바라봤다.

내부는 시원할 정도로 넓고 높으며 전체가 툭 터져 있는 통층이었다.

중심에는 단이 있었고 시선을 올리면 용상이 있었다.

용상의 뒤에는 오악을 상징하는 다섯 봉우리가 장엄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고, 그 위로는 음양의 해와 달의 자태가 빛났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면 바위와 소나무가 천년의 기세를 과시하였다. 그 사이로 폭포가 차분하게 흘렀고 온갖 상서로운 짐승들이 기분 좋게 숨 쉬고 있었다.

용상의 위로는 화려한 장식이 있었다.

쉽사리 시선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찬란한 위용의 봉황이 두 마리 있었다. 구름과 함께 날고 있는 봉황은 우아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인정전의 위용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이판.”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이었다.

나는 극진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전하.”

이연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보였다.

절정의 왕권을 구축한 군주의 삶이란 이렇게 여유로운 것이구나.

이연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겠지?

뭐. 그렇겠지.

송시열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시비를 걸까.

아……. 이연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이연의 귀로 듣는 언어는 얼마나 따사로울까.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슬펐다.

송시열이 아니라 이연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나도 아름답게 살 수 있는데……. 아니구나.

그게 아니구나.

내가 이연이라면 송시열은 원 역사의 송시열이다.

그의 엄청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송시열인 게 다행인 거 같긴 하다.

그러니까 대승적 차원에서 말이다.

“찾으셨사옵니까.”

슬쩍 고개를 곁눈질을 돌려봤다.

내관은 물론이거니와 사관도 없었다.

백 보 양보하여 내관은 그럴 수 있는데, 사관까지 물리친 것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조만간 교지를 내려서 호포제를 정식으로 논의하게 할 것이외다.”

“예. 전하.”

“그리고 남인의 처우와 관련하여 여러 여론이 있소. 더는 듣고 싶지 않소.”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다.

그런데 이곳은 조선이다.

중국처럼 전제 왕권이 형성된 나라가 아니다.

왕권이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명분을 내팽개치고 정치하고 권력을 휘두르면 화를 면할 수가 없다.

당장에서야 이연의 서슬 퍼런 위세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조금씩 변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연좌에 나선 남인 중 누군가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후폭풍은 걷잡을 수가 없다.

물론, 조선이 수시로 사화가 발생한 나라이긴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허목, 윤선도의 죄가 사화를 운운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연은 과할 정도로 엄격한 잣대로 책임을 묻고 있다.

심지어 전례가 없는 방법으로 말이다.

이연이 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가혹할 정도로 인정을 두지 않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스치는 게 있었다.

“혹시 호포제를 반대하는 무리에 대한 경고로 남인을 잡아두는 것이옵니까?”

“하하하. 아주 제대로 보셨소.”

이연은 호탕하게 웃었다.

고요한 인정전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더 언급할 생각이 없소.”

뭐. 좋다.

이래도 된다.

그런데 왜 계속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들까?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일까?

어떤 것일까?

달리 생각해봤다.

일단 눈앞에 펼쳐진 상황부터.

만일, 경신 대기근이라는 재난이 없는 세상이라면 이연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고 정통성이 넘쳐흐르는 이연이 알아서 할 것이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아니다.

정말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것만 하기에는 다가올 세상이 너무 엉망이다.

경신 대기근은 일개 개인의 영민함으로 해결할 수 없다.

조선의 사대부가 힘을 다 보태도 어찌 될지 모르는 미증유의 재난이다.

서인과 남인이 싸우고, 군주와 신하가 힘겨루기해서는 곤란하다.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니 말이다.

물론 강력한 왕권은 개혁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도면 된다.

이연의 왕권은 이미 반석 위에 올랐다.

하여,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경신 대기근이라는 재난 앞에서 개인의 권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서인? 남인? 왕권?

이런 거 다 필요 없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문제로 이연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우매한 짓이다.

결국, 재난 극복의 사령탑은 이연이 되어야 하니까.

고민했다.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순간 방대한 지식을 보관한 송시열의 뇌세포가 마구마구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배운 무수한 지식이 스쳤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어지러워서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생각했다.

생각했다.

차분하게 생각했다.

침착하게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래서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니라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

나는 분명 개혁 조선의 방패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과연 그러했을까?

나는 방패로서 역할에 충실하였을까?

아니, 방패가 필요한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나씩 세세하게 따진다면 방패의 역할은 보이지 않게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보편적인 방패의 역할이었을까?

아니었다.

여기까지 방패가 나설 순간은 없었다.

왜……?

이연이 휘두르는 창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이다.

창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예상 가능한 공격을 모두 걷어버렸다.

그러한데 구태여 방패가 왜 필요하겠는가.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자.

방패로서의 효용성이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보였으나 잡히지 않았다.

뇌를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 온몸으로 번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간지러웠다.

그래도 손을 뻗어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런데…… 이게 맞나?

내가 저 아지랑이를 잡으면 무엇이 바뀔까?

잡는 게 아니라 되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방패의 효용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되돌아봤기 때문인데?

그 순간 문뜩 떠오른 생각.

동시에 뇌리를 강하게 후려치는 의문.

내가 지금 하려는 게 왕권 강화였나?

내가 가야 할 길이 조선의 개혁이었나?

내가 원하는 게 조선의 부국강병이었나?

꼬리를 이어가는 의문.

집요하게 나를 흔드는 질문.

아니었다.

나는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한 게 아니다.

나는 조선의 역사를 진일보시키고자 한 게 아니다.

이연이 즉위식에서 던진 일성.

민본.

그것이었나?

다시 시작된 의문.

나는 왜 세종의 길을 언급하였지?

나는 왜 사문난적이 꿈이라고 했지?

대체 무엇을 위하여?

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두 가지 물음이 남았다.

부국강병을 위하였나?

왜 세종의 길을 언급했지?

전자는 목적에 대한 고민이었다.

후자는…… 목적을 위한 방도였다.

하면, 세종의 길을 언급한 것이 부국강병, 왕권 강화를 위함이었나?

아니었다.

나는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한 게 아니다.

나는 조선의 역사를 진일보시키고자 한 게 아니다.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명이라도.

덜 죽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 이곳에서 숨을 쉬는 이유다.

생각이 조금씩 정리됐다.

동시에 드디어 내 눈앞에 보인 현실.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호포제가 재난 방지의 효과가 클……까?

호포제가 만병통치약일까?

중요한 조세 개혁이지만 현재 조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아니지 않을까?

그건 아니지 않을까?

정말 아니지 않을까?

그래.

호포제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길을 잘못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러나 더 늦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말했다.

“전하. 신 이조판서 송시열. 목숨을 걸고 청하옵니다.”

“이거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오?”

영 내키지 않다는 게 느껴지는 반응.

그러나 지금 이연을 설득하지 못하면 일이 고약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호포제 관철에 동의할 수 없사옵니다.”

“……뭐요?”

“간곡히 청하옵니다. 호포제로서 이 나라 조선을 구하소서.”

“실성하셨소?”

어쩌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팽팽한 긴장감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