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시대(時代)(3)
시대(時代).
개인은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인만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능이라고 여겨지는 왕권도 마찬가지다.
이는 이연이 아니라 태종 이방원이 부활해도 그러하다.
만일, 이 시대가 인간의 영역 밖에서 구현된다면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이연이 어디까지 수용할지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더 머뭇거리겠는가.
모든 걸 걸고 말해야 할 뿐이다.
“조선은 호포제가 필요하옵니다. 내일이라도 호포제가 집행된다면 백성의 삶은 나아질 것이옵니다. 하오나 전하. 이 나라 조선이 호포제를 집행할 수 있사옵니까? 신은 장담할 수 있사옵니다. 불가능하옵니다.”
원 역사에서 호포제는 무수한 논의를 거쳤다.
그 세월 동안 사회의 모순도 커졌다.
무르익는 조정의 논의.
폭발하는 군포제도의 모순.
더해가는 호포제의 논리.
더해가는 백성의 고통.
이 모든 제반 상황이 합쳐지면서 일궈낸 것이 바로 영조의 균역법이다.
이 시대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시행된 제도였다.
개혁은 이와 같다.
제도는 이와 같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고 할지라도 시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
개혁을 일궈낼 진영의 논리와 세력에서 차이가 난다.
개혁을 집행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모순이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개혁은 위정자가 백성에게 베푸는 선정의 결과가 아니옵니다. 개혁은 세상의 모순이 나라를 집어삼키기 바로 직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옵니다.”
유일한 예외는 왕권 강화를 수반한 개혁이다.
이는 힘과 힘의 대립이기에 그러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개혁과는 시작부터 결이 다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할지라도 시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당장 입헌 군주제라도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겠는가.
이연이 동의할지라도 세상이 동의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고 할지라도 때와 장소가 있사옵니다. 하여…….”
나도 안다.
할 수만 있다면 호포제를 강행하는 게 옳다는 걸.
처음에는 나도 동조했다.
만일, 내가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불 속이라 할지라도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작금의 조선은 호포제를 가질 수 없사옵니다.”
나는 미래를 안다.
지금 우리는…… 조선은 호포제를 부여잡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신도 아프옵니다. 너무나도 아프옵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아프옵니다. 하오나 전하. 아직 조선은 자격이 없사옵니다. 능력도 없사옵니다. 그래서 신은 피를 토할 고통을 느끼고 있사옵니다.”
절절하게.
구슬프게.
말했다.
“호포제를 반대하는 무리가 있사옵니다. 세상은 그들을 일컬어 사족(士族)이라고 부르옵니다. 이들은 단지 군현에 똬리 튼 무리가 아니옵니다. 사족은 조선의 역사, 그 자체이옵니다. 호포제를 관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족과 싸워야 하옵니다.”
조선은 한 번도 사족을 이기지 못했다.
영조의 균역법은 사족을 이긴 게 아니다.
더는 개혁을 미룰 수 없는 시대의 명령이었으며, 더 개혁을 미루면 조선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위기감을 느낀 사족의 양보였다.
하여, 균역법은 시대의 산물이다.
“산림의 여론이 거대하다고 한들 어찌 사족 전체를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서인 산림은 호포제에 우호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체 사족을 대변하는 건 아니다.
되돌아본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조선은 참으로 무서운 나라다.
왜……?
조선의 위정자가 성리학자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는 성리학을 익히는 철학자다.
혈통이 아니라 철학을 익힌 철학자가 최고 5만 대 1이라는 극한의 경쟁률을 가진 철학 시험을 통과해야만 관리가 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하여, 그들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그들의 능력은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의 위정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득권이 바로 조선의 성리학자다.
이권을 지키기 위한 기득권의 저항을 완벽한 논리로 탄생시킬 수 있다.
이들은 탐욕과 부정부패를 철학과 통치 논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득권이다.
그래서 조선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조선의 위정자가 일제히 움직이는 건 오직 시대의 요구가 있을 때였다.
하여, 나는 시대를 말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러하옵니다.”
“내 백성이 군포로 고통받고 있소. 한데 아직도 때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가 때가 되오?”
“전하.”
“감당할 수 있소.”
“전하.”
“내가…….”
이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핏발선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늘 평정심을 유지한 이연의 감정이 폭발하고 있었다.
“내가…….”
“…….”
“왜 이토록 왕권에 집착하는지 아시오?”
“전하.”
“고작…… 고작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오.”
“전하.”
“신하를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오.”
“전하.”
“내 나라…… 내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함도 아니오.”
더는 나설 수 없었다.
감정이 폭발한 이연의 말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들어야만 했다.
그것이 옳았다.
“이 나라 조선의 주인이 전주 이씨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소.”
이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의 웃음은 참으로 구슬펐다.
“김씨, 박씨, 최씨, 송씨, 윤씨…… 조선에는 참으로 많은 명문가가 있소.”
“…….”
“한데 말이외다. 그 많은 명문가의 역사에 백성이 있소?”
“…….”
“없소. 존재하지 않았소. 그들의 역사는 단지 그들의 역사이기에 그러하오. 오직…….”
이연의 목소리에는 압도적인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조선의 역사, 그 자체의 자부심이었다.
“왕가(王家), 전주 이씨의 역사에만 백성이 존재하오. 그들은 백성을 통치로 바라보나, 전주 이씨는 백성을 백성으로 바라보오. 진정으로 그러하오.”
“…….”
“어찌하여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인가. 백성이 내 백성이기 때문이오. 오직 전주 이씨만이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오. 하여, 이 나라 조선은 전주 이씨의 나라요. 그래서 나는 왕권에 집착했소.”
“…….”
“왜……? 내 백성을 위하여…… 오직 내 백성을 위함이었소.”
내가 섣부르게 이연을 판단했다.
그러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이연이 길을 잘못 갔으니 말이다.
“내 백성의 고통을 보듬고자 왕권에 집착한 것이오.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오.”
“신이 어찌 어심을 감히 헤아리겠사옵니까. 하오나 바로 그러하기에 신이 목숨을 걸고 간언했사옵니다. 신의 충정을 부디 알아주시옵소서.”
“내 백성의 고통이 하늘을 이르렀거늘, 때가 아니라는 경의 말을 어찌 들으란 말이오?”
“태평성대라면 신이 어찌 나서겠사옵니까. 선대의 시대가 태종과 세종이었다면 어찌 반대를 일삼겠사옵니까. 하오나 아니옵니다. 작금의 조선은 군주의 힘이 태평성대로 직결되는 시대가 아니옵니다. 오직 시대의 차이옵니다. 시대가 전하의 길을 틀렸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시대……?”
“그러하옵니다.”
이제 시대를 말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대를.
그런데 나보다 이연이 빨랐다.
“시대라고 하셨소?”
“…….”
“시대를 아시오?”
“전하.”
“이판이 시대를 아시오? 이판의 시대가 어떤지는 모르오. 그러나 나의 시대는 너무나도 끔찍하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를 알고 있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들어야 한다.
지금은 내 말을 멈추고 이연의 말을 들어야 할 때다.
내 말은 조금 미뤄도 된다.
그래야 했다.
“장계가 올라왔소.”
“장계라고 하셨사옵니까?”
“삭주부에 호지로부터 광풍이 불어 닥쳤소. 꿩알만큼이나 큰 우박이 쏟아졌으며 얼음이 1척 이상으로 얼어붙어 모든 곡식이 손실되었으며 전답은 텅 비었다.”
……재난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한 시대였다.
당황했다.
당혹스러웠다.
이연이 바라보는 시대가 나와 같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내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리고 심장도 흔들렸다.
묘할 정도로.
“장마가 심하여, 보리가 물에 잠기고 벼가 손실되었소.”
“…….”
“한 달 내내 큰 비가 내려 수재의 참혹함이 팔도를 덮었으며, 집들이 떠내려가고 익사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소.”
“…….”
“또한, 해서 지방에 수해가 심하여…….”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였다.
“단 한 순간도 이를 잊지 않았소.”
이연은 이 모든 사례를 숙지하고 있었다.
“단 하루도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소.”
나만이 재난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숨을 쉬는 매 순간,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 눈을 감은 시간, 그 모든 시간에…… 하늘에 태양과 달이 떠 있는 순간, 그 모든 순간에 내 백성의 고통이 하늘을 찌르고, 천지를 가득 메웠소.”
“…….”
“하여, 호포제를 해내고자 했소. 시름에 빠진 백성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내리고자.”
이연의 호포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호포제는 왕권 강화의 결과였다.
과정과 목적은 오직 백성이었다.
“묻겠소. 그 많은 대신 중에서 누가 백성을 언급했소?”
“…….”
“복제에 집중하는 시간의 1할이라도 재난을 언급하는 이가 있었소? 호포제를 반대한 무리가 재난에 무능력한 조정을 질타하는 말을 한 적이 있소? 없었소. 단 한 명도 없소. 왜? 그들의 역사에 백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
“이 모든 시간은 오직 홀로 버티고 있소.”
“…….”
나의 시대는 지독할 정도로 고독하오.”
“…….”
이토록 외로울 수가 있을까.
이토록 치열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홀로 치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의 시대도 이연의 시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時代).”
“…….”
“작금의 시대는 난세이옵니다.”
“…….”
“사람이 만든 난세가 아니옵니다. 하늘이 내린 난세이옵니다. 시대가 이러한데 어찌 사람과 사람이 다툴 수 있사옵니까. 그리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여, 신 이조판서 송시열 목숨을 걸고 여쭈옵니다.”
나는 차분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연을 위로하듯 천천히 말했다.
조선의 진실을.
“전하. 재난의 극복에 사족의 힘은 필요 없사옵니까?”
“…….”
“그들의 협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사옵니까?”
필요하다.
그래서 호포제는 아니다.
“선왕 시절 우리의 준비 태세는 부족했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였사옵니까. 조정은 분열되었사옵니다. 서인과 남인은 대립했사옵니다. 군주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신하와 다퉜사옵니다. 조정은 군현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사족을 품지 못했사옵니다. 이 작은 나라가 이토록 갈라졌거늘 어찌 미증유의 재난을 감당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
“차라리 강대한 외적의 공세라면 또 다를 것이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전략과 전술의 차이가 있을 뿐 힘을 합쳐 싸움에는 부족함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재난은 아니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옵니다.”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우리의 주적은 만주족이 아니옵니다. 조선의 주적은 기근이옵니다.”
이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직은 혼탁하다.
“전하. 홀로 가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
“어찌 고독한 길을 가시고자 하옵니까.”
함께 갈 수 있는 길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어떤 형식일지라도.
“묻겠소.”
“이르시옵소서.”
“경이 내게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이오?”
“강력한 군주가 되시옵소서.”
진심을 담아서 절절하게 말했다.
“반석 위에 오른 왕권으로서 서인과 남인을 아우르시어 사족까지 모두 품으시옵소서. 하여, 이 나라 조선이 하나 된 힘을 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
“전하.”
이연과 눈이 마주쳤다.
맑았다.
힘이 실렸다.
좋다.
이 순간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단 하나의 개혁 입법이 없을지라도…….‘
말했다.
“역사는 오직 전하를 바라볼 것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