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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8화 (28/298)

28화 재해(災害)(1)

삭주는 평안도에 있었다.

평안도에 있는 건 괜찮은데…… 멀었다.

인간적으로 진짜 멀었다.

토가 나올 정도로 멀었다.

조선에는 의주 제1로가 있다.

시작은 고양이다.

도성에서 고양 사이에는 4개 읍이 있고 총 35리다.

이렇게 시작한 의주 제1로는 고양, 파주, 장단, 개성…… 초산, 창성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1,085리로 총 42개의 읍이 걸쳐 있는데, 삭주부는 무려 34번째에 있는 읍이었다.

그랬다.

삭주는 압록강 바로 밑에 붙어 있는 동네였다.

그러니까 국경이라는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재난본부의 본부장이 된 이상 가야 한다.

……아니, 그런데 보통 이런 건 본부장이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본부장은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하는 거라고 배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연이 내게 심술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가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굉장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허목이었다.

그러니까 허빈치,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말 위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는 그를 보는 순간 스치는 이연의 말.

-화합하세요.

-…….

이래서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그러면 일 잘하는 허적과 보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재난 구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내가 이판과 함께 삭주부로 가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소.”

저 말만 수십 번째다.

무시할 때 적당히 알아서 찌그러지면 얼마나 좋을까.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내가 대꾸할 때까지 일부러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정말 집요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친해 보려고는 했으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숨 쉬는 것도 불쾌하다는 인사다.

아마 나와 공기를 공유하는 것도 싫어할 게 뻔하다.

“대체 왜 내가 이판과 함께 가야 하오? 너무나도 불편하여 숨을 쉬기도 어렵소.”

“어명보다 더 큰 이유가 있소?”

“…….”

“내키지 않았다면 교지를 내리셨을 때 연좌라도 하지 그러셨소?”

“…….”

“왜 말이 없소?”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자 허목은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봤다.

어명을 들이대니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만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뭐. 허목의 반응은 나도 이해한다.

나와 함께 일정을 소화하려니 얼마나 짜증 나겠는가.

나도 그런데 허목은 진짜 짜증 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계속 이런 식이면 재미없다.

그래서 확실하게 위계를 잡아주기로 했다.

“내가 이조판서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진휼재생 구관당상이오만.”

“해서요?”

원래 진휼재생 구관당상, 그러니까 구관당상은 특정한 임무를 담당한 당상관에 불과하다. 통상 종2품 이상의 제조가 겸임했고.

그런데 나는 아니다.

이연이 절대적인 권능을 부여했다.

본부장이 괜히 본부장이겠는가.

그러니까 허목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 한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이토록 무지하다니 답답하다.

정말.

짤막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정1품이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걸 잊지 마시오.”

“뭐, 뭐요?”

“더 쉽게 말해야 하오? 공은 내 밑이라는 것이오.”

“!!!”

나의 강수에 허목은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속이 시원했다.

사실 허목의 이런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냥 이조판서일 때는 대강대강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재난본부의 소속이 됐다.

그런데 본부장에게 개길 수가 있겠는가?

그건 아주 불편하고 곤란한 일을 만들 뿐이었다.

본부장 그러니까 구관당상이 되니까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시끄러운 허목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화합?

모르겠다.

일단 나부터 나와 화합하는 게 중요하다.

이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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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위계를 딱 잡은 뒤로는 허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괜한 시비를 걸면 불리하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아주 편했다. 덕분에 나는 마음껏 명상을 할 수 있게 됐다.

뭐. 명상까지는 아니고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볼 시간을 가졌다는 게 옳다.

지금 내가 말을 타고 이동하는 지역은 평안도(平安道)였다.

평안도.

동쪽의 낭림산맥이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고 서쪽은 청천강, 대동강 하류의 평야 지대가 펼쳐져 전형적인 동고서저의 지형을…… 됐다. 뭐하냐?

중요하지 않다.

내가 구관당상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삭주로 가고 있긴 하지만, 중간 일정을 대충 보낼 수는 없다. 이왕 먼 길 떠나게 되었으니 주변 상황을 세세하게 살펴보는 게 좋지 않았겠는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평안도의 도로 사정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대강의 내용을 보고로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구축되어 있었다.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 일대에서 남하하는 도로는 크게 3곳이었다.

우선 내가 지금 이동 중인 의주-정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가 있다.

“내륙 직로라고 했나?”

“그러합니다. 대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나?”

“내륙 직로는…….”

딱 그때였다.

“강변읍에서 내륙의 구성, 운산 등을 거쳐 박천, 태천으로 이르는 내륙 직로가 있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허목이었다.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짐을 옮기는 짐꾼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허. 그 표정은 무엇인가? 설마 몰랐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짐이 무거워서 잠시 인상이 찌푸려졌을 뿐입니다.”

딱 보니까 한눈에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심심한 허목이 괜히 만만한 짐꾼을 잡고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짐꾼으로서는 허목의 말을 듣고 싶겠는가?

가뜩이나 일도 고된데 하나씩 대꾸하는 건 정말 고역일 것이다.

지금 딱 봐도 듣기 싫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허목이라는 사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래? 그렇겠지? 설마 평안도 3대로를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예?”

“하하하. 가끔 평안도 3대로를 모르는 사람이 있기에 노파심이 들어서 한 말일세.”

“허. 대감. 소인이 평생 짐을 옮기며 살았습니다. 어찌 평안도 3대로를 모르겠습니까.”

다시 나를 힐끗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우월감을 담은 미소를 짓는 허목.

……정확하게 상황 파악이 됐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이다.

거참. 아는 거 많아서 좋겠다.

허빈치 선생.

“지금 걷는 의주대로와 대감께서 이르신 내륙 직로 그리고 강계, 희천, 영변을 연결하는 강계직로를 일컬어 평안도 3대 대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막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짐꾼의 말.

이거 내가 끼어들기 조금 애매한 상황이 됐다.

“기가 막히는군.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어?”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짐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허. 잘 알고 있는데 짐이 무거우면 되겠는가. 혹시 각각의 특징은 알고 있나?”

“송구합니다. 그건 잘 모르고 짐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허. 잘 모르는데 짐이 무거우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겠나?”

“…….”

“의주대로는 평야 지대인 서해안을 따라 형성된 읍들을 통과하기에 도로가 낮고 평탄하지.”

저런 걸 짐꾼이 왜 알아야 할까.

진짜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래전부터 대국과 왕래하는 도로였기에 아주 중요하다네. 반면, 내륙 직로와 강계직로는 산줄기 상의 많은 고갯길로 연결되고 있네.”

“…….”

어느새 짐꾼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말벗의 대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한 게 분명했다.

허목도 허목이지만 짐꾼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하하. 자네는 아주 총명하군. 그래. 조선인이라면 평안도 3대로쯤은 무조건 알고 있어야. 그게 최소한의 교양이 아니겠는가?”

“예.”

짐꾼의 짤막한 답변.

그러나 허목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나를 다시 힐끗 쳐다봤다.

재수 없는 미소.

아주 꼴 보기 싫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인간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인의 영수이자 산림의 영수, 이조판서이자 구관당상으로서 승승장구하는 나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월한 나를 부러워하는 인사의 열등감이다.

딱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대감. 이제 삭주의 경계로 진입합니다.”

드디어 도착했다.

삭주에.

그런데 다가오는 한 무리가 보였다.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필시 삭주 도호부에서 나온 이들일 것이다.

“대감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선두에 선 이가 말했다.

삭주는 도호부였다.

조선에서 도호부라고 하면 인구 1,000명이 넘는 규모의 군현을 의미했다.

이 중 규모가 유독 크고 요충지는 대도호부로서 정3품 대도호부사가 다스렸다.

삭주는 그냥 도호부라서 종3품 도호부사가 있다.

종3품이면 제법 높은 관직이다.

물론, 나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충 도호부사라고 생각됐다.

그러니까 도호부사가 여기까지 나온 건 의전이다.

쉽게 말하면 사회생활 잘하는 거고.

그런데 지금 삭주의 상황이 빡빡할 건데?

약간 의문을 가졌으나 사람을 계속 뻘쭘하게 둘 수는 없어서 적당하게 대꾸해주려고 할 때였다.

“도호부사가 왜 이곳에 있나?”

날카로운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허목이었다.

도호부사는 허목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누구시오? 그리고 어찌하여 초면에 말을 가볍게 하시오?”

“뭐, 뭐라?”

사실 허목은 관직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재야에서 남인의 거두로 활동한 세월이 길다.

그러니 중앙에서 길게 관복을 입지 않았다면 허목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종3품 도호부사에게 함부로 운운하시오?”

정말 주옥같은 명언이 터져 나왔다.

필기구가 있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동안 허목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허목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재난이 발생하였거늘 도호부사가 백성을 살피지 않고 고관대작에게 아첨이나 하려고 자리를 비웠단 말인가? 참으로 대단하시오? 구관당상 대감? 위세가 하늘을 찌르시는구려. 나는 흉내도 내지 못하겠소이다.”

나한테 왜 난리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당연히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외다. 나는 정1품 구관당상이니 말이오.”

“뭐, 뭐요?!”

“사실이니 격하게 흥분하지 마시오.”

“소직이 볼 때도 말세이긴 합니다. 종3품 도호부사를 가볍게 여기니 말입니다.”

“뭐, 뭐라?”

이거 이대로 두면 곤란할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허목은 아무나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다.

나는 적당하게 나서며 말했다.

“남인의 중추(中樞), 허목 선생일세.”

일부로 중추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런데 도호부사의 반응이 상당했다.

“허. 허목 선생이셨습니까?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말과 행동이 모두 공손해졌다.

그런데 허목의 얼굴은 상당히 뻘게졌다.

내가 남인의 중추라고 소개하자 대우가 바뀌었다는 것이 영 별로인 모양이었다.

도호부사의 처세가 가볍다고 여긴 것이다.

어쩌면 나의 성의 있는 소개에 더 열받았을 수도 있고.

그새 도호부사가 허목을 슬쩍 쳐다보더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소인은 도호부사가 아닙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딱 봐도 도호부사처럼 보이는데?

나와 허목이 당황하자 그는 못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소인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역관 변승업입니다.”

“아.”

“이런.”

무슨 사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시열의 기억은 작동하지 않았다.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역관 변승업?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사역원 소속의 일본어 역관이거늘, 어찌하여 이곳에 있나?”

“기억해 주셔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그리되었습니다.”

“나는 분명 그 사정을 물었는데?”

“송구합니다. 소인 역시 관에 속하였기에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이리 나오자 허목도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관의 일이라니 더 트집 잡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나는 크게 감탄했다.

허목을 제법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관리라고는 하지만 역관이다.

그러니까 중인에 불과한데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허목과 물 흐르듯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허목이 각 잡고 힘쓰면 역관 한 명 보내는 건 일도 아닌 세상이었기에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흡족함에 웃고 있을 때 변승업이 재차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관당상 대감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니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 봐라?

허목에게는 관의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다.

정확한 사유는 다시 따져 물어야겠으나, 내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허목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조롱했다.

“말세로다. 말세야!”

난리였다.

심지어 혀까지 찬다.

그러나 변승업은 우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여전히 나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도호부사는 재해에 집중하느라 오는 길이 힘들어 소인이 대신 왔으니 노여워 마십시오.”

변승업.

정말 마음에 든다.

할 수만 있으면 오른팔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현재 삭주의 상황은 어떤가.”

“허. 한시라도 빨리 이동하여 확인하면 되거늘.”

“송구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음. 일단 서두르지.”

“예. 대감.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외다. 말세로다.”

나와 변승업의 대화에 허목은 수시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대꾸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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