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9화 (29/298)

29화 재해(災害)(2)

더욱 자세한 상황은 읍성에 당도하여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와서 보니 변승업과 수행 인원의 몰골이 영 엉망이었다.

구관당상이 오는 길에 나선 의전이니 신경을 썼을 것인데 엉망진창인 꼴을 덮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삭주의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근으로 굶주리는 백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

죽은 이는 얼마나 될까.

무거운 마음을 조금 밀어내고 변승업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할 때였다.

시선에 들어온 허목의 행동이 조금 희한했다.

유독 주변을 세세하게 살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슬쩍 물어봤다.

“왜 그러시오?”

“…….”

“뭐 하오?”

“신경 쓰지 마시오.”

“…….”

와씨.

진짜 정이 안 가는 인간이다.

인내를 발휘하며 멋쩍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니, 수시로 주변을 살피니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됐소.”

“……이보시오.”

“시끄럽군.”

“!!!”

참자.

허목과 싸우는 건 나만 손해다.

그냥 이대로 내 길을 가는 게 옳다.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변승업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티 내지 않고 은근슬쩍 다가왔다.

“소인을 찾으셨습니까.”

와. 멋지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사회생활만으로 부장까지는 그냥 했을 인사다.

벌써 몇 번이나 감탄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역관이니 행정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 변승업은 나를 안다는 데 전혀 기억이 작동하지 않는 걸 보면 송시열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의아한 건 허목에 대한 아름다운 태도이긴 한데, 이건 지금까지 보여준 놀라운 처세를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중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쨌거나 허목의 까칠함에 고통받는 나로서는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훌륭한 처세에 화답해주는 것이 옳다.

“혹시 읍성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훌륭하군. 하면, 읍성에 대해서 일러주겠나?”

“읍성의 둘레는 2천 8백 17척, 높이는 8척입니다.”

이걸 물어온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브리핑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니 일단 듣기로 했다.

어쨌거나 읍성의 크기만을 고려할 때 오차가 없을 착실하고 깔끔한 답변이긴 하니까.

그런데

“자네 뭐 하나?”

날카로운 목소리.

당연하겠지만 허목이었다.

나와 변승업은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봤다.

정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적당하게 나섰다.

“왜 그러오?”

“허. 지금 전쟁이라도 하러 오셨소?”

“전쟁이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퍽퍽해지오만.”

“하! 재난이 발생하고 역병이 창궐하였거늘, 읍성의 둘레와 높이는 알아서 뭐 하오?”

“그나저나 참으로 감격스럽소.”

“뭐요?”

“평소 내 물음에는 답하지도 않더니, 역관이 대화할 때는 귀신처럼 끼어드니 말이외다.”

“그게 지금 무슨…….”

“아. 오해하지 마시오. 진심으로 감격하여 그러하오.”

허목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몇 번 겪어보니 어떤 캐릭터인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학문적 경지나 다재다능함을 떠나서 상당히 다루기 쉬웠다.

왜……?

자고로 일방적으로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일수록 툭 건드리기만 해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해서, 역관의 답변에서 무엇이 문제요?”

“재난이 발생하였는데 읍성의 둘레와 높이는 알아서 뭐 하오?”

슬쩍 주변 눈치를 살펴봤다.

다들 앞을 보고 있으나 최선을 다하여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들로서는 지도부의 다툼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높은 사람들이 허구한 날 다투고 있으니 얼마나 재밌겠는가.

나는 기대에 화답하기로 했다.

“참으로 성미가 급하오.”

“뭐요?”

“나는 역관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이른 게 아니라 읍성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물었소. 안 그렇소? 그러하니 도호부사는 전체적인 틀을 먼저 언급한 것이 아니겠소? 안 그런가?”

“매사 그렇게 대충 하시오?”

“물론입니다. 대감.”

허목과 변승업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대충은 참으로 해롭소.”

“대체 무슨…….”

“됐소.”

“허.”

“이보게. 하던 말을 계속하게.”

“참으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한시가 바쁘거늘.”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대감. 어쨌든 우물과 샘물은 13군데 있습니다.”

허목이 날카롭게 노려봤으나 변승업은 미동도 없다.

노선이 확실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자네 역관인데도 관의 업무를 잘 장악하고 있군.”

“과찬이십니다. 대감.”

“참으로 말세로다.”

허목이 다시 끼어들었으나 피식 웃으면서 무시했다.

변승업도 잘 처세했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구도였다.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자네 참으로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계속하게.”

“예. 대감.”

어차피 이동의 시간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때 보고를 받는 게 효율적일 수도 있다.

계속 이어진 변승업의 말.

나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쌀이 부족하군.”

“그렇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다.

재난이 발생한 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굶기지 않는 법이었다.

“혹시 관청의 곳간에는 여유가 있던가?”

“예. 너무 여유가 있어서 마음껏 뛰어다녀도 됩니다.”

“애석한 일이군.”

“불행 중 다행인지 소나무가 참으로 많소.”

불행 중 불행인지 허목이었다.

너무 느닷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와 변승업의 시선이 확 쏠렸다.

“소나무라니? 무슨 말씀이오?”

“소나무의 잎을 따서 자른 다음 물에 우려서 2홉씩 먹되 하루 2~3되를 먹으면 급한 허기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이게 무슨…… 응?

먹는다고?

허기를 해결한다고?

여기까지 말했는데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다.

“솔잎은 속을 든든하게 하고 배가 고프지 않게 하므로, 곡식을 구하기 어려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아주 적절하오. 또한, 구하는 게 쉬우니 어찌 반갑지 않겠소이까. 만일 콩가루를 구할 수 있다면 섞어서 먹으면 더 좋소. 때로는 소나무의 흰 껍질을 쪄서 먹으면 곡식을 먹지 않아도 능히 버틸 수 있소.”

지금 허목이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구황(救荒)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강렬한 장면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

-뭐 하오?

-신경 쓰지 마시오.

-아니, 수시로 주변을 살피니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됐소.

-……이보시오.

-시끄럽군.

-!!!

그랬다.

허목이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이동한 건 길목에 구황할 수 있는 식물 따위를 살핀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허빈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크게 반색하며 허목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허목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속을 비운 백성들이오. 설령 구휼미가 올지라도 급히 먹으면 필시 속에 탈이 날 수밖에 없소.”

“계속해보시오.”

“이것도 모르시오?”

“허. 설마 모르시오?”

“사람을 어찌 보고 이리도 무례하시오?”

“됐소.”

“하여, 솔잎을 말한 것이오. 솔잎은 굶주림을 해결함과 동시에 오장을 편안하게 하니 말이외다. 소나무의 열매, 진액, 뿌리, 껍질이 다 좋으나 솔잎을 따를 수는 없소. 다만, 느릅나무 껍질을 달인 물과 함께 먹어야 더 좋소.”

박학다식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구나.

어쨌거나 아주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면 되었소. 더 들어야 하오?”

“이보시오.”

허목이 발끈하였으나 나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변승업을 바라봤다.

“굶주린 자가 나오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기근이 발생하였으니 당연한 일인데, 그건 왜 묻소? 참으로 답답하오.”

그래.

기근이 발생했으니까 당신이 고생 좀 하자.

도착하는 즉시 허목을 도호부사에게 보내서 구황을 시작할 계획을 수립했다.

내가 전혀 대꾸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있자 허목이 다시 발끈했다.

“이보시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참으로 무례하오.”

뭐 하긴.

일을 떠넘길 생각 중이지.

자고로 분업은 생명이다.

내가 지속해서 대꾸하지 않자 허목은 더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딱 잘라서 말했다.

“왜 이러시오? 나와 대화하는 걸 싫어하여 일부러 대꾸하지 않거늘.”

“뭐, 뭐요?”

“뭐. 궁금한 거 같으니 미리 말해주리다. 도착 즉시 도호부사를 만나서 구황을 집행하시오.”

“뭐요?”

“혹시 내가 선생께 과업(課業)을 내릴 수 없소?”

정확하게 과업이라고 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임무, 과업 말이다.

구관당상의 권위를 시원하게 휘두른 것이다.

허목의 얼굴은 참으로 보기 좋게 썩었다.

“참으로…….”

뒷말을 더 들어서 뭐 하겠는가.

보나 마나 내 욕하는 내용일 건데 귀만 아프지.

손을 훠이 내저으며 말했다.

“서두릅시다.”

“…….”

이동을 재촉했다.

어느새 저 멀리 읍성이 보였다.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조금씩.

조금씩.

어쩌면 가볍게 생각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삭주의 재난은 가볍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읍성에 당도하자 나의 안일함은 팽팽한 긴장감에 짓눌렸다.

그랬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빠르게.

빠르게.

어느덧 거리가 50보 정도 남았을까?

단거리 달리기를 한 듯 심장이 터졌다.

드디어 지척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딱 그때였다.

그러니까 딱 그때 괴이한 장면이 눈에 보였다.

“…….”

이동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만 봤다.

눈을 껌뻑였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지를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걸었다.

말없이 다가갔다.

더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평생 맡아보지 못한 괴이한 냄새가 진동했다.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

어떤 남자의 시체였다.

시체의 바로 뒤에 구덩이가 있었다.

그런데 나의 모든 감각을 지배한 건 시체의 발목에 묶인 새끼줄이었다.

너무나도 괴이했다.

그때였다.

-쿵!

시체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속도를 내어 다가갔다.

더……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

구덩이 안을 보게 됐다.

시체의 발목에 묶인 새끼줄은 또 다른 시체의 발목에 묶여 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체였다.

모든 시체의 다리가 새끼줄에 묶여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었다.

코로 모든 악취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 있어도 보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고, 맡고 있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아니었다면 현실을 부정하였을 것이다.

너무나도 끔찍했다.

너무나도 참혹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