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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34화 (34/298)

34화 귀인(1)

작은 자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철혈의 모습을 보였다.

음. 철혈?

뭐. 이건 내 생각이다.

사람들이 볼 때 나는 그야말로 악랄함 그 자체였을 것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독배(毒杯)를 마시기로 하였으니 말이다.

애초 내가 누군가로부터 신망이나 얻고자 이 길을 선택한 건 아니니까.

다만 의외는 허목의 반응이었다.

솔직히 그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시간 내서 냉수라도 한잔하며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너무 담백했다.

-구황에 집중할 생각이오.

구황하러 간다는데 내가 무슨 말로 잡겠는가.

-허. 나도 바쁘오.

-어쩌라는 거요?

정말 마음이 가지 않는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냥 입맛을 다시며 그러라고 했다.

나도 바쁘니까.

“대감. 찾으셨습니까.”

도호부사였다.

그를 힐끗 쳐다봤다.

움찔하며 눈동자를 슬쩍 돌린다.

참으로 간이 콩알만 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고소를 삼키며 말했다.

“죄인들은 어찌 되었나.”

실질적인 죄의 유무를 떠나서 죄인이라고 규정했고, 하옥시켰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일단 잡아 가두기는 했는데 진짜 강경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충 풀어주면 일벌백계를 선언한 의미가 없다.

늘 그렇듯이 중간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정말이지 딱 알맞은 적정선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할 때 떠오른 건 아주 간단한 원칙이었다.

그냥 그대로 죗값을 치르면 된다.

약간의 페널티와 함께.

“관청의 여러 잡다한 일과 분뇨 수거 작업에 투입했습니다.”

우선 페널티는 노역(勞役)이었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상당한 처벌이었다.

어떤 식이든 관의 부름을 받아 역에 복무하는 건 참으로 고단하며 회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고, 몸은 고단하다.

또 그 시간만큼 생계를 꾸릴 수도 없다.

백성으로서는 그야말로 시간 낭비, 체력 낭비였다.

심지어 재해로 인해 기근이 시작되는 시기다.

일 분, 일 초라도 아껴서 식량을 구해야 할 때 강제 동원되어 관의 노동을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래도 시켰다.

늘 하던 대로 곤장을 때리는 식의 물리적 처벌은 몸을 상하게 할 것이니 말이다.

“잘 관리하게. 괜히 사정을 봐주면 자네도 벌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작은 게으름도 부리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게 진짜였다.

“군포도 징수하고.”

그냥 징수하는 게 아니다.

당해 징수 시기에만 2배였다.

말 그대로 벌금형이었다.

군포가 부담스러워 고환을 자를 생각이었던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겠으나 어쩔 수 없다.

“한데, 대감. 군포는 사정을 봐주실 수 없습니까. 악순환이 반복될 겁니다.”

“징수해야 할 조세에 손을 대는 건 오직 군왕의 권능일세. 한데, 지금 자네는 내게 감히 권능을 범하라고 권하는 것인가?”

“그, 그것이 아닙니다.”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조리한 문제는 응당 바로 잡을 것이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아닐세. 더 말해야 하나?”

“송구합니다. 소직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가보게.”

“예. 대감.”

입맛이 씁쓸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참아야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는 구황 정책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거나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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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에는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머리를 숙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움직이며 세세하게 챙기던 허목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한숨까지 푹 쉬면서 말했다.

“몇 번을 말하나? 느릅나무 껍질 즙을 취하려면 겉껍질을 벗기고, 흰 속껍질을 취하여 볕에 쬐어 말려서 가루를 내라고 했네. 한데, 흰 속껍질을 모두 허비하면 어찌하자는 건가?”

“소, 송구합니다. 선생.”

“잘하게. 알겠나?”

“예, 예. 선생.”

살이 저릿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관원들은 연신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허목은 고개를 저으며 몇 걸음 더 이동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 자네들 지금 뭐 하나?”

“어,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몇 번을 말하나?! 나는 분명 솔잎 가루 3홉, 쌀가루 한 홉, 느릅 즙 한 되를 섞으라고 했네.”

“아…….”

“대체 쌀가루 3홉과 솔잎 가루 한 홉은 어디서 이른 구황 방법인가?”

“송구합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필묵을 챙기라고 했네. 서툴면 더 신경을 쓰고, 기억하지 못하겠으면 부지런히 적어서 눈으로 보면서 일을 해야지. 한데, 매사 건성이니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나?!”

“소, 송구합니다.”

관원들은 연신 고개만 조아렸다.

서둘러 허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참으로 답답하도다.”

“소, 송구합니다.”

허목은 연신 한탄하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관원들은 허목의 시선이 닿지 않기를 바라고 제발 발걸음이 자신들의 앞에 멈추지 않기만을 바랐다.

지금까지 경험한 허목은 정말 칭찬에 인색하다.

그런 허목이 바라보고 다가와서 말을 건다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빠르게 잘 파악했다.

그의 시선이 닿으면 고개를 숙였고 옆으로 옮겨지면 안도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쿵쾅거렸고, 지나가면 심장이 평안을 찾았다.

딱 그때였다.

“잘 짓뭉개져 걸쭉하군.”

지금껏 인세에 없었던 허목의 부드러운 말투였다.

관원들은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허목은 끝날 때까지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 잘 익히고 찧어 걸쭉하게 된 것입니다. 일정한 양을 곡식 가루와 섞어 묽은 죽을 만들었습니다.”

“음. 자세히 일러보게.”

관원들은 깜짝 놀랐다.

이대로 허목의 칭찬으로 일이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충격에 놀란 것이다.

“처음에 찧어서 조각이 생기면 햇볕에 말리고 다시 찧어 가루로 만듭니다.”

“혹시 맛을 보았나?”

“안 그래도 이제 막 맛을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혹시 선생께서 맛을 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훈풍도 이런 훈풍이 없었다.

모두 부러움을 가득 담아서 바라봤다.

그러니까 딱 그때였다.

“갈!”

“!!!”

갑자기 터진 허목의 대갈성.

모두 깜짝 놀랐다.

훈훈하게 웃던 관원은 더 깜짝 놀랐다.

분명 칭찬의 파도에 마음껏 헤엄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눈을 껌뻑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방법은 오로지 솔잎으로 가루를 내는 것이다. 한데, 너는 느릅나무즙으로 죽으로 만들었다. 하면, 맛이 참으로 고약하다. 한데, 지금 네가 내게 맛을 보라고 권하느냐?”

“미, 미처 몰랐습니다. 느릅나무즙으로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소, 송구합니다.”

“제발 배운 대로 하게. 배운 대로.”

“…….”

“그게 그렇게 어렵나?”

“…….”

“이게 안 되나? 도저히?”

그랬다.

허목은 처음부터 칭찬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더 놀라운 방법으로 혼쭐을 낼 의지만 가득할 뿐이었다.

모두 참담함에 고개를 숙였다.

허목은 못마땅한 듯한 기침을 내뱉으며 관청의 입구를 바라봤다.

얼핏 봐도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유심히 쳐다보던 허목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동시에 노호(怒號)를 터트렸다.

“당장 멈추게!”

그의 외침과 더불어 움직임은 일제히 멈췄다.

모두 긴장하여 허목의 눈치만 살폈다.

“하!”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달려온 허목은 기가 찼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눈을 부라리면서 관원들을 노려봤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산천초목이 떨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지금 뭐 하나?”

“예? 아. 굶주린 백성에게 솔잎을 나누고 있습니다. 관원들이 애를 쓰고는 있으나, 많은 백성이 먹을 수량을 단기간에 만들어내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직접 제조한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허.”

“혹시라도 백성들에게 솔잎을 바로 주거나 제조 방법을 알려주는 게 껄끄러우시다면…….”

“갈!”

허목의 시뻘게진 얼굴.

관원은 자신의 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욕을 듣는 것이다.

온몸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감히 사람을 어찌 보고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가?! 무릇 구황이란 방법까지 백성들에게 세세히 알리는 것이 정도이거늘!”

“서, 선생. 하면 어찌 그러십니까?”

“하! 딱 보게. 지금 자네들은 솔잎만 나눠주고 있네.”

“그, 그렇습니다.”

“답답한지고. 대체 몇 번을 말하나? 굶주린 사람이 솔잎을 갑자기 먹으면 변비에 걸린다. 하여, 필시 느릅나무 껍질 물을 함께 써야 한다고 했다.”

“소, 송구합니다. 잠시 잊었습니다.”

“너희의 잠시가 백성의 고통이거늘.”

허목은 크게 한탄하며 말했다.

더 놀라운 건 허목의 타박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갑자기 뜨거운 것을 권하면 반드시 죽는다. 하여, 먼저 생간장을 물에 타서 주고, 다음에 차고 묽은 죽을 주어 소생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한데 너희는 단 한 명도 이 내용을 일러주지 않으니, 백성에게 독약을 내미는 것과 무엇이 다르더냐?!”

“도, 독약이라니요.”

“구황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 너희는 지금 백성에게 독약을 알려준 것이다.”

“그, 그렇게까지…….”

“허.”

“송구합니다.”

“답답한지고.”

허목이 눈을 부라리며 시선을 돌렸다.

구경하던 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과 마주치면 바로 날벼락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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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허빈치였다.

그의 박학다식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일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솔잎과 느릅 껍질 따위로 최대한의 효과를 냈다.

특히 놀라운 건 늘 대안의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근 지역이기에 장 종류가 없으면 초목이나 채소 따위를 먹어도 위를 안정시키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허목은 여러 가지 장을 만드는 방법을 미친 사람처럼 설파하고 다녔다.

그냥 문서로 집행만 한 게 아니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읍성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잡고 말해줬으니, 효과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결과 허목의 구황 정책은 생각 이상의 큰 효과를 발휘했다.

물론, 재해 이전의 수준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기근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부수적으로 조세를 전면적으로 감면하였기에 백성들은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의 생존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활기는 커져만 갔다.

-참으로 다행일세.

-허구한 날 흙이나 파먹었는데 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러니 다행이라는 말이 아닌가.

-내 말이 그 말일세.

삼삼오오 모인 백성들은 늘 구황에 대해서 말했다.

그동안의 고난이 깊게 담긴 대화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허구한 날 산을 찾아다니며 칡을 캐지 않았을 것일세.

-그랬지. 얼마 전만 해도 사내는 칡을 캐고 여인은 칡을 찧었지.

-종일 두드려 겨우 두 명분의 음식을 마련했지.

-휴. 정말 힘들었어.

-그래도 칡이라도 있었으니 여태껏 버티기는 했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언제부터인지 걸인들이 제법 줄었어.

-앞으로는 더 줄겠지. 듣자니 걸인들도 살길을 찾아다닌다던데 그게 어디 쉽겠나.

-그렇겠지.

당연하겠지만 구황 정책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기 전에 거지들은 상당수 죽었다.

아마 구덩이에 가장 먼저 들어간 시체의 주인들일 것이다.

-그래도 쌀보다 나을 수는 없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 시절에 쌀이 가당키나 하겠나.

-나도 알고 있네. 그저 한 소리일세.

문서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아무리 구황이 잘 이뤄져도 구휼미보다 나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정에서 내려온 구휼미는 없었다.

씁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당장 구휼미를 내릴 정도로 기근이 엄청난 상황이 아닌지라, 괜한 구휼미의 사용은 불필요한 선례를 만들 뿐이다.

아껴야 한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

사회생활 잘하는 변승업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이자 냉큼 움직인 것이다.

볼 때마다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를 보필하고자 나선 것이나 참으로 기특했다.

“혹시 관청을 벗어나시려고 합니까.”

“뭘 또 벗어나나?”

“어찌……?”

“응? 구관당상이니 당연히 민가를 살펴야지.”

“음. 소인이 잘은 모르겠으나 굳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고 빠르게 듭니다.”

“굳이? 아니 뭘 굳이라는 생각까지 하나?”

“지금 밖은 허목 선생이 구황을 집행하여 아주 훈훈합니다.”

“내가 등장하면 냉랭해진다?”

“이런. 소인은 거기까지 생각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지금 훈훈하다는 상황을 전해드린 것입니다.”

하. 거참.

내가 이러자고 악역을 자처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대로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할 일은 해야지.”

재차 의지를 표명했다.

변승업은 크게 낙담하며 물러섰다.

낙담……?

뭘 또 낙담까지.

아주 시건방진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조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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