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귀인(2)
갑자기 내가 빤히 쳐다보자 변승업도 당황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당황할 이유가 있나?
사회생활 백서에 이런 돌발 상황은 없나 보다.
“하하하. 어찌 그러십니까. 대감.”
“자네, 일본어를 하는 역관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한데, 왜 이곳에 있나?”
이건 참으로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사실 변승업이 만주어를 하는 역관이었다면 이상할 게 없다.
어쨌거나 이곳은 청나라의 지척에 있는 국경이니 말이다.
“대감께서 구관당상의 역할로 삭주에 이르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하면, 나보다 늦게 움직였을 것인데? 한데 먼저 도착하여 마중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그 정도는 소인이 알아서 해야지요.”
“그건 알겠네. 한데, 왜 나를 만나려고?”
대놓고 물었다.
그런데 변승업은 싱그럽게 웃었다.
“왜긴요. 대감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자 한 것이지요.”
“자네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없네만.”
“소인이 늘 대감의 길 안내를 하지 않습니까.”
“백주에 취했나?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셀 수도 없어.”
갑자기 내가 이것저것 물어서일까?
늘 여유롭던 변승업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더니 눈알을 요리조리 돌린다.
나의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솔직히 엄청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물어본 건데 이리 나오니 괜히 더 궁금해졌다.
목을 살짝 움직였다.
왼손 엄지로 볼을 살짝 긁었다.
그리고 딱 정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나와 선문답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
“변승업.”
“……송구합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게 흘러가자 변승업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는 역관은 그냥 치워버릴 수 있는 조선 최고의 사대부다.
이를 바로 상기했을 변승업은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말했다.
“대감께서 소인을 알아보지 못하시기에…….”
“내가 자네를 왜 알아봐야 하나?”
“……송구합니다.”
이것 봐라.
진짜 뭐가 있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귀신도 놀랄 정도의 사회생활 능력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다.
단지 변승업이 중인 출신의 역관이기에 사대부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처음 허목에게 보인 태도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즉, 변승업은 흘러가는 그저 그런 역관이 아니었다.
“아직 내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는데?”
“실은 소인이 대감께 도움…… 송구합니다. 대감께 선을 대고자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역관이 내게 왜?”
“소인의 조부는 절충장군, 선친은 동지중추부사였습니다.”
응……?
절충장군은 종3품이고, 동지중추부사 종2품이다.
무슨 역관 가문이 이래?
왜 이리 뼈대가 있어?
의구심이 무럭무럭 커지는 그 순간이었다.
한동안 고장 난 듯 찌그러져 있던 송시열의 기억이 여전히 조용했다.
뭐. 변승업의 말대로라면 이래저래 오가면 만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쯤 되면 결론은 간단하다.
그러니까 정말 송시열에게는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집안이라는 것이다.
옷깃 스치는 것보다 못한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는 필시 한때 도성을 덮은 소문.
즉, 송시열이 변했다는 말을 듣고 모종의 사유로 달려온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내 표정은 점차 싸늘해졌다.
눈치 빠른 변승업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의 사회생활 백서에 이런 상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자네 가문의 뼈대를 알고자 했나? 아니지.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감히?”
“소, 소인. 중인에 불과한 신분입니다. 하여, 대감께 선을 대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왜.”
“대감이라면 소인과 가문을 지켜주실 힘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뼈대 있는 가문을 누가 건드리나?”
“그것이…….”
이어진 변승업의 말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의 고조부는 정난 원종공신이었던 변옥동, 증조부는…… 됐다.
그러니까 제법 뼈대가 있다는 말이다.
중요하지 않다. 대충 듣고 흘렸다.
나는 무려 송시열이니까.
핵심은 다음이다.
부친인 변응성이 의주에서 장사를 했는데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변승업도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여 국중대부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조선 최고 부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자 사정은 한 번에 이해가 됐다.
조선 최고의 부자.
그런데 중인이다.
그러니까 고작 중인이다.
조선에서 중인 따위가 조금이라도 처세를 잘못하면……?
그냥 끝이다.
심지어 부자다.
사대부들이 볼 때 얼마나 고깝겠는가.
딱 하나 잡히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인의 가문 따위는 순식간에 멸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사대부가 통치하는 조선이다.
그러니 변승업은 어찌하겠는가.
부지런히 알아서 재물을 들고 그들을 찾아갔을 것이다.
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을 것이고.
이쯤 되니 변승업의 낡은 의복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부자라고 하여 중인이 초호화 의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그냥 지켜만 보지 않을 사대부는 이 땅에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대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그동안 나를 놀라게 한 엄청난 사회생활 능력도 단번에 이해됐다.
거의 생존본능 수준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내 목소리에는 작은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눈빛은 싸늘했다.
표정은 차가웠다.
공기까지 날카로웠다.
“그래서 내게 뇌물이라도 주려고 왔나?”
“어, 어찌 대감께 뇌물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아쉽군.”
“예?”
“그 뇌물을 자네 입에 집어넣었을 것인데.”
“!!!”
대경실색한 변승업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이마는 땅에 닿았다.
절박할 것이다.
내 심사가 굉장히 뒤틀렸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까.
왜?
내가 뇌물이나 받을 정도로 물렁물렁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를 얼마나 가볍게 여겼으면 옆에 붙어서 계속 설쳤겠는가.
단전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대감께서 구관당상의 역할을 하신다기에 작은 도움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참입니다.”
“참해주랴?”
“대, 대감. 기근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실 때 보태고자 의주에 구휼미를 확보했습니다.”
하. 짜증 나네.
이런 건 빨리 말해야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 물론 대감께서 어려움에 봉착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더 당황하여 말을 버벅대는 변승업.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예?”
“얼마나 있냐고 물었는데?”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아예 다 바뀌었다.
눈치 빠른 변승업이 이를 파악하지 못할 리는 없다.
그는 재빨리 답했다.
“4천 석입니다.”
“이런! 이보게. 앞으로 그런 건 가장 앞에 말하게.”
“소인이 이렇게 미흡합니다.”
“괜찮네.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오늘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천 석.
말이 4천 석이다.
이건 정말 엄청난 규모였다.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조선 최고 갑부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4천 석이면 훈련도감 2,000명의 한 달 급료와 맞먹는다.
어디 그뿐인가.
통상 1인당 1끼에 1승, 하루에 2승, 1천 명을 1년 동안 먹이려면 5천 석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4천 석은 1천 명을 거의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규모다.
기근이라는 엄중한 시기를 고려하여 1인당 하루 1승만 준다면?
2천 명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다.
삭주 도호부의 규모를 고려할 때 변승업의 4천 석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것이다.
변승업은 그야말로 귀인이다.
이런 사람을 잠시라도 의심한 나를 반성할 수밖에 없다.
정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자네를 처음부터 눈여겨봤네.”
“늦게나마 대감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꼭 4천 석을 자네의 재산이라고 해야겠나?”
“예?”
나와 시선이 마주친 변승업.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그는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이 땅의 모든 건 지엄하신 주상 전하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방금 확신했네. 우리는 평생 갈 것일세.”
“우리라고 하셨습니까.”
변승업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응당 화답해야 했다.
“암. 우리일세.”
나는 정말 호탕하게 웃었다.
변승업도 맞장구를 치듯 호탕하게 웃었다.
분위기는 너무 화기애애했다.
이보다 더 유쾌할 수는 없다.
“혹시 누군가 자네를 괴롭힌다면 무조건 달려오게. 또는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뛰어오게. 내 어찌 자네를 돕지 않겠는가.”
“어찌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인데 말입니다.”
“암. 우리일세. 우리고말고.”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이지요.”
4천 석의 마력은 이 정도로 거대했다.
미친놈처럼 계속 호탕하게 웃어질 만큼.
그나저나 너무 체통 없이 행동했다.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위엄을 보이듯 말했다.
“어찌하여 성상께서 내리셔야 하는지 아는가?”
“이 땅의 모든 건…… 송구합니다. 지금 백성에게 필요한 건 굳건한 믿음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쌀입니다.”
“자네는 감탄만 나오는군.”
변승업의 말은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이 혼란한 세상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군왕이다.
백성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오직 군주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절 백성들이 막연하게 군주에 대한 기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로 구현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조정이 너무나도 가난하다.
또한, 철혈의 개혁도 요원하다.
바로 이럴 때 4천 석의 구휼미는 천금보다 귀하다.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한 톨의 쌀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군왕이 내린 4천 석의 구휼미는 왕실에 대한 무한한 존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대단한 처세다.
또, 상당히 노련한 인사다.
4천 석을 구휼에 사용한다면 많은 이가 극찬할 것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혹은 조금 생각을 잘못하면 기근에 큰 보탬이 되었으니 조정의 비호(庇護)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생각이 짧은 것이다.
짧아도 너무나도 짧다.
고작 중인에 불과한 변승업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만인의 극찬을 감당할 수 없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시기와 경계가 쏟아질 것이다.
필시 적당한 시간은 무척이나 짧을 것이고.
어찌하여……?
조선은 백성을 보호할지라도 중인은 보호하지 않는다.
백성이 큰돈을 벌면 기뻐하지만, 중인이 거부(巨富)라면 질타한다.
왜……?
조선이니까 그러하다.
변승업이 크게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구휼미의 출처를 바꾼 건 이런 현실적 역학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4천 석을 구휼에 사용하는 것은 범인이라면 절대 할 수 없네.”
“대감의 신의를 살 수 있다면 4만 석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의 신의는 늘 열려 있다네.”
“소인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큭. 훌륭하군. 그나저나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어쩌다 보니 계속 어려운 부탁을 꺼내게 된다.
나도 사람인지라 뻘쭘할 수밖에 없다.
괜히 멋쩍어서 헛기침했다.
그러나 변승업은 아주 맑고 밝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4천 석이 소인의 쌀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랬다.
무려 4천 석의 이동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다.
이걸 이연이 내린 것이라고 우기기에는 상황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괜히 무리했다가는 꼴만 우스워질 수도 있다.
“이를 조정에서 값을 치른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자네는 참으로 탁월하군.”
“우리끼리 너무 과한 칭찬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렇지. 우리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