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찰나를 즐기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으로서는 구휼미가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된다.
그러니 이처럼 좋은 일은 빨리 전하는 게 백번 옳다.
그 덕분에 삭주 땅은 난리였다.
가장 흥분한 건 혹독함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겨우 생존을 유지한 걸인들이었다.
-저, 전하께서 구휼미를 내리셨다는 소식이 사실인가?
-암. 삭주 땅이 난리가 났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이 사람아. 나도 모르지는 않으니 이 말을 꺼냈겠지? 답답하군.
-하고 싶은 말이나 하게.
-그 소식이 사실이냐고 묻는 걸세. 뜬소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자네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뭐가 또 어처구니까지 없나?
-자네나 나나 땅 파서 끼니 해결하는 같은 처지인데, 사실인지 소문인지 어찌 알겠나?
-그러면 확실하지도 않다는 거군. 그러면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건 그렇지. 먹기 좋은 흙이나 구하러 가세.
-그러지. 오늘은 어디로 가야 씹을 만한 흙이 있을지 모르겠군.
-이 사람아. 그걸 알면 벌써 등 따시고 배가 불렀지. 매사 그렇게 요행을 바라지 말게.
-허. 내가 뭘 요행까지 바랐다고. 그랬으면 벌써 딱딱 소리나 들었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말게. 그렇지 않아도 요즘 딱딱귀가 나타났다던데.
-거지로 태어나서 죽을 때 딱딱귀를 만나는 게 가장 끔찍하다던데.
-그러니까 요행을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땅이나 파러 가세. 딱딱 소리 듣기 전에.
-그러세.
가난한 나라였기에 구휼미는 희귀할 수밖에 없다.
엄청난 대기근이 발생한 것도 아닌 삭주 땅에 구휼미를 내린다는 건 상상의 범위에서 아득하게 멀었다.
심지어 구황의 혜택과도 거리가 있는 걸인들이었기에 기대는 정말 찰나였다.
반면, 가장 많은 백성이 분포한 전호(佃戶, 소작농)의 분위기는 결이 달랐다.
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내재한 불신의 크기가 상당했다.
-소식 들었나? 구휼미가 온다는군.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네.
-자네는 소식을 반만 듣고 다니나? 아니면 허기를 참지 못해서 반은 먹어 버렸나?
-허기를 참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먹을 수는 없지. 그러니 어서 말하게. 나머지 반이 무엇인지.
-이 소식이 개차반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는 걸세.
-허. 개차반의 입에서?
-암. 어떤가?
-거짓이군.
-필시 그러할 것이네.
-군포 때문에 고환을 자른 사내들한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악을 쓰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몸서리를 친다네.
-나도 그러하다네. 하늘 아래 가장 흉악한 사람이 바로 그 못된 양반일세.
-반만 알았을 때는 그래도 기대했는데, 나머지 반을 알게 되니 말끔하게 기대가 사라지는군. 그나저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걸까?
-거기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나? 그냥 못된 양반이니 못된 짓을 하는 걸세.
-끔찍하군.
-됐네. 그냥 솔잎이나 구하러 가지. 그것만 잘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걸세.
민심은 사나웠다.
그리고 여론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였는데, 개중에도 지주들의 반응은 참으로 걸작이었다.
-구휼미가 진짜 온다고 보나?
-우암 대감이 운을 띄웠다고는 하던데, 무조건 신뢰하는 건 어렵지 않겠나?
-그렇지. 무엇보다 조정에서 구휼미를 보낼 이유가 있나?
-……솔직히 없지. 구휼미가 올 정도로 기근이 심한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허목 선생의 구황 정책이 잘 정착되어 효과를 내고 있지 않은가.
-하면, 거짓일 가능성이 크군.
-그렇다고 가정할 때 의아한 건, 대체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짓을 꾸미냐는 걸세.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아까운 사람이 바로 우암 대감일세. 무슨 이유라도 일단 일을 하는 걸세.
-음. 구휼미 소식에 민심이 크게 들썩이긴 했네. 처음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백성들은 들뜬 마음에 잠시라도 구황을 가볍게 여겼지.
-설마……?
-구황을 가볍게 여긴 백성을 혼내거나…….
-기대감에 시간만 보내다가 나중에 절박하여 일을 저지르면 잡아서 군포를 더 징수할 생각일 수도 있고.
-끔찍하군. 나도 백성들로부터 평이 좋은 지주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닐세.
-어떤 경우라도 우리보다 흉악한 분일세. 조심하지.
-눈치껏 쌀을 베풀면 어찌 되겠나?
-우암 대감은 백성을 쥐어짤 생각을 하고 있네. 얼마 전 고환 사건으로 이미 입증되었어. 이때 우리가 어설프게 쌀을 베푼다면 필시 눈 밖에 날 것이네.
-몸을 사려야겠군.
지주들은 송시열의 정치적 의도를 간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조정의 백관 중 위상이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 송시열의 의도를 가늠하는 건 생존을 위한 첫 번째 길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지주들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재해나 기근이 아니라 바로 송시열의 변덕이었다.
관원들의 여론도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말게.
-두말하면 잔소리지.
-휴. 그나저나 우암 대감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네.
-내 말이 그 말일세. 구휼미라니…….
-끙. 관청 밖에 나가봤나? 여태껏 이런 민심은 경험하지 못했네.
-기근이 발생하여 구휼미가 온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지. 기가 막힐 뿐일세.
-참으로 답답하지 않은가? 뭐. 실제 의도는 이미 중요하지 않아. 핵심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믿지 않는다는 거니까. 대체 무엇을 도모하기 위함인지 상상도 할 수 없어. 참으로 형편없어.
-휴. 내 말이 그 말일세. 아무도 안 믿을 거짓을 왜 퍼트리라는 건지……. 구휼미를 알리는 우리를 쳐다보는 백성들의 눈빛에서 엄청난 비웃음이 느껴졌다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네.
-심지어 4천 석일세. 차라리 4백 석이라면 믿었을 것이네. 정말 쌀 관념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정말 일할 맛이 나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관복을 던지고 백성이 되어 우암 대감을 마음껏 비웃고 싶다네.
-진정하게. 그래도 관복은 죽을 때까지 입고 있어야 해.
-알지. 말이 그렇다는 걸세. 그만큼 지금 상황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니까.
백성 중 누구도 믿지 않는 구휼미.
이를 알려야 하는 관원들도 신뢰하지 않는 구휼미.
이 모순은 참으로 기괴했다.
그러니까 관원들은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것도 계책이라고 펼친 송시열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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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막히고 코도 막혔다.
아니,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신이 가득한지 모르겠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러나?
세상이 너무 흉흉하다.
너무 외롭다.
나의 진심을 곡해하는 이들 때문에.
아니, 진짜 왜 의심하지?
“끙. 그나저나 이게 무슨 말인지.”
걸인들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에는 유독 희한한 게 있었다.
딱딱 소리?
딱딱귀?
걸인들끼리 사용하는 은어일까?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집무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허목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시오?”
“사, 살다니?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오?”
내가 발끈하자 허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나에 대한 무한한 불신을 가득 담았다고 해야 할까?
답답함이 목울대까지 올라왔다.
괴롭다.
얼마 전에 불었던 훈풍은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정에서 구휼미를 내린다는 소문의 진원지가 대감이라고 들었소.”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 없소. 내가 관원에게 일러 백성에게 전하게 하였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헛소문을 전하여 민심을 교란하오?”
“헛소문 아니외다.”
“지금 내가 우습게 보이시오?”
“참으로 애석하게도 선생은 웃기지 않소. 늘 따분하며 경직되었소.”
“이보시오.”
허목은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아주 사납다.
뭐. 하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라서 아무런 감흥도 없다.
파르르 떨리는 허목의 눈동자를 보는 건 흥겹고.
나도 더 참을 이유를 못 느끼겠고.
“분명 출발할 때 그런 논의가 진행되지도 않았소.”
“그새 주상께서 마련하셨소.”
“조정은 여력이 없소. 심지어 4천 석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소?”
“아니, 그렇게 쌀 관념이 없소?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적당하게 해야지.”
“……귀찮으니까 그냥 말 걸지 마시오.”
“뭐, 뭐요? 이보시오!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일 안 하오? 구휼미가 오니까 구황은 멈춰도 되오?”
“하! 분명하게 말하겠소. 이런 식으로…….”
“됐소.”
“!!!”
정말 듣기 싫다.
허목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일어났다.
딱 스치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해주기로 했다.
“딱딱.”
“뭐, 뭐요?!”
“참으로 딱딱 소리를 내시오.”
“이보시오!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아예 저주하시오!”
아주 열받았다.
나는 흡족하게 등을 돌렸다.
등 뒤로 허목의 노발대발이 강렬하게 들렸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나의 길을 갔다.
관청 밖으로 나가니 관원들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쳐다봤다.
움찔하며 시선을 돌리는 관원들은 나의 심사를 더 꼬이게 했다.
“자네들 뭐 하나?”
“예, 예?”
“일 안 하나?”
“소, 송구합니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하면 진짜 폭발할 거 같다.
나 스스로 개차반이라는 별명의 확산을 위하여 박차를 가할 이유는 없다.
한숨을 푹 쉬면서 밖으로 나갔다.
거리로 나가니 나를 향한 시선이 아주 곱지 않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범한 백성 중 나와 눈을 마주치는 용자는 없었다.
이미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선한 사대부가 아니라 아주 흉악한 위정자로 정리되었으니 말이다.
많은 백성 중 구시렁거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말도 듣기 싫어서 그냥 눈을 부라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하게 이동했을 때다.
그러니까 살벌한 분위기가 다소 풀린 공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할아버지?”
대뜸 나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
딱 봐도 6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안쓰러움이 올라왔다.
동시에 주변 백성들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사실 나도 그렇고.
일단 아이의 부모는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 역시 치밀어 오르는 상당한 당혹감을 밀어 넣으며 엷게 웃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갑자기 왜 인상을 써요?”
“……나를 왜 불렀느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물어보면 내가 안다더냐?”
“우리 부모님 말씀이, 고약하게 생긴 사람은 아는 게 많대요.”
“…….”
“나랏님이 쌀을 주신다는 소문은 왜 생겼죠? 아무도 안 믿는데.”
“어?”
“심지어 저도 안 믿어요. 희한하죠?”
이렇게 어린아이가 벌써 이런 불신이라니…….
난세다.
이것이 난세가 아니라면 무엇이 난세일까.
어린이는 나라의 희망이라고 했거늘.
어쨌든 애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하여 웃으며 말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란다.”
“왜 계속 인상을 써요?”
“…….”
딱 그때 기겁하며 달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이 당돌하고 불신으로 가득 찬 아이의 부친이 분명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훤하다.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는 직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래서 제법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피했다.
그런데 뒤에서 아주 유쾌한 대화가 들렸다.
“하, 하늘이 도왔다.”
“암. 자네 아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해.”
“필시 그럴 것이네. 그게 아니라면 무사할 수가 없어.”
“평생 쓸 운을 다 쓴 걸세.”
……진짜 다 죽여버릴까.
살심이 무럭무럭 치솟았으나 참았다.
이만한 일로 백성과 백주에 노상에서 싸울 수는 없다.
나를 수행하는 관원들이 눈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축 늘어져서 걷는데 걸인들의 대화가 들렸다.
“왜 그 털보 있잖나.”
“털보가 왜?”
“어제 딱딱 소리를 들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이 사람아. 내가 이런 말을 거짓으로 하겠나? 우리처럼 빌어먹는 놈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인데.”
“끔찍하군. 딱딱 소리라니.”
“어쨌든 조심하게.”
딱딱 소리…….
사실 너무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었다.
“오라는 구휼미는 영원히 오지 않고, 딱딱 소리가 오다니.”
“그러니까. 참으로 거지 같은 세상이 아닐 수 없네.”
“암. 자네 같은 세상이지.”
“자네 같은 세상이기도 하지.”
“됐네. 거지끼리 싸워서 뭐 하나?”
“그냥 세상이 거지 같다는 말일세.”
걸인들의 대화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괜히 끼었다가는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상당했다.
나는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뒤로 미뤘다.
딱 그때 저 멀리……그러니까 읍성의 성문 쪽이 북적거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름이 아니라 가장 앞에서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변승업이 있었다.
그러니까 삭주를 지배하고 있는 나에 대한 불신과 끝없는 마타도어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변승업이었다.
진짜 너무 반가웠다.
진심으로.
변승업과 눈이 마주쳤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은 참으로 훌륭했다.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변승업은 재빨리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대감. 전하께서 내리신 구휼미가 당도했습니다.”
정확한 워딩.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 진짜 구휼미가 왔는데?”
“방심하지 말게.”
“무슨 말인가?”
“8할이 모래일 수도 있어.”
“모래? 설마?”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나라의 고관대작답게, 고환을 자른 이들의 식솔에게 군포를 2배로 징수하겠고 했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게 조선일세.”
“그렇지. 암. 그간의 경험적 사실을 잠시 잊었네.”
“암. 일단 지켜보지. 억지로 한 가마니씩 주면 필시 8할이 모래일 거야.”
“한 바가지씩 주면?”
“다 보는 앞에서 한 바가지를 주는 걸세. 만일 그때 모래를 담아 준다면 들고 일어나야 해.”
“자네야말로 현자일세.”
진짜 죽일까.
너무 짜증이 난다.
볼이 파르르 떨렸다.
사회생활 잘하는 변승업도 주변 분위기를 느꼈는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그 역시 예상했던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백성들이 말하는 경험적 사실을 박살 내야 한다.
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내리셨다. 구황의 틈이 발생할 때 구휼미를 한 바가지씩 나눌 것이니 그리 알도록.”
당장 베풀 수는 없다.
구휼미는 말 그대로 히든카드니까.
그러나 지금 시기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한 바가지씩 준다고 말했다.
백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손을 훠이 내저으며 관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그러니까 몸을 돌리는 그 순간이었다.
“천……세…….”
어디선가 들리는 미약한 소리.
몸이 멎었다.
발걸음이 멈췄다.
“천세…… 천천세…….”
희미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서 시선을 움직였다.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아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사방에서 천세를 연호했기 때문이었다.
첫 시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
“천세! 천세! 천천세!”
희한했다.
분명 큰 소리였다.
그러나 우렁차지는 않았다.
이연의 즉위식에서 맞이한 연호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즉위식 때 울린 백관의 연호와는 무엇이 다른가.
아예 결이 달랐다.
나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닿는 곳에 선 백성을 바라봤다.
“…….”
지금 이들의 연호는 그냥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해야 하는 절차에 따른 형식적인 연호가 아니었다.
즉위식에 보여야 할 충의 표현을 담은 연호가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연호였다.
그래서인지 천세의 외침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천세의 연호가 아니라 울부짖음이었다.
통곡과 절규라는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광인(狂人)의 미친 울음과도 같았다.
“…….”
고개를 돌렸다.
모든 백성이 마찬가지였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연호하는 천세는 너무나도 구슬펐다.
나는 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천세에 담긴 의미를.
이 나라 조선의 군왕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환희 그리고 열광.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 바로 그것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렁였다.
심장이 너무나도 간지러웠다.
말없이 천세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입가에 내렸다.
비록 내가 악랄한 관리가 될지라도.
저들이 나를 원망하고 저주할지라도.
하여, 저들의 환호와 울부짖음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좋았다.
아니…… 황홀했다.
마음이 너무나도 포근했다.
옅은 미소는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남은 감동의 시간은 오롯이 저들이 가지길 바라서.
나는 짧게만 가져도 충분했다.
다만, 천천히 등을 돌리고 싶은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퇴장의 시간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방긋 웃으며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까지였다.
그러니까 등을 돌렸는데…… 황급히 달려오는 허목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여태껏 없었던 위기감이 느껴졌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