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43화 (43/298)

43화 또 다른 외로운 길

이연은 차분하게 장계를 읽었다.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자 몇 번이나 반복했다.

볼수록 한숨만 나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전하. 비변사 당상들이 들었사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에서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들라 하여라.”

영의정 정태화를 비롯한 대신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들이 극진한 예를 취하였고, 이연은 간단하게 답했다.

비변사는 원래 변방의 사무를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임시기관이었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가적 위기와 국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현재는 종래 최고 기구였던 의정부의 역할까지 잠식하였다.

그 위상에 걸맞게 비변사의 구성원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6조 판서 그리고 주요 군문의 대장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그런데 비변사 논의는 군주가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의 소집도 비변사 논의가 아니라 조정의 주요 대신을 군왕이 따로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연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대신들을 한 명씩 살폈다.

약간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이연은 이를 밀어내듯 잔잔한 목소리로 흐르듯 말을 시작했다.

“이조판서 송시열을 구관당상에 임명하여 재해의 극복을 명하였소.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고작 그 정도로 일이 해결될 상황이 아니외다.”

“전하.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각지에서 재해가 발생하여 백성의 시름이 하늘을 찌르고 있사옵니다. 신은 늘 이를 유념하고 있었사옵니다. 되돌아보면 선왕 시절…….”

“훈련대장은 그냥 사직하고 선왕 시절의 사서(史書)나 붙잡고 추억이나 곱씹지 그러오?”

“황공하옵니다.”

이연이 따가울 정도로 질책했으나 이완은 참으로 의연했다.

그 의연함에 대신들은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으로 볼 때 이완은 참으로 대단한 인사였다.

이연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경들을 모두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외다.”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일전에 나는 호포제를 보류하는 대신 여러 정책을 수립하라고 했소. 한데, 여전히 조정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소. 기껏 나오는 말은 재해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거나 남한산성의 군량을 사용하여 구휼미를 내리자는 수준이외다. 혹은 진휼청을 확대하거나. 한데, 나는 우습소.”

“…….”

“분명 지금까지의 관례를 넘어서라고 했거늘 조정의 관리들은 그저 과거를 답습하기만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또, 대체 조정의 곳간이 얼마나 넉넉하기에 구휼미를 그토록 쉽게 입에 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소.”

“전하. 신 영의정 정태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공하면 더 말할 필요 없소.”

“그러하옵니다. 아…… 황공하옵니다.”

말실수를 한 정태화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황공하기도 하고.

이럴 때 보면 진짜 이완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여, 내가 한 가지 떠올린 게 있소.”

군왕이 직접 정책을 수립했다는 말이다.

대신들은 바짝 긴장하며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신하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이연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접힘과 펴짐을 반복했다.

“호판.”

호조판서 허적을 불렀다.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이는 군왕이 내세울 방책이 호조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대신들은 티가 나지 않게 허적을 부러움을 담아 바라봤다.

신왕이 즉위 이후 처음으로 진행하는 공식적인 논의에서 지목받았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조종의 선례를 되돌아보면, 진휼을 시행할 때 필요한 재원을 가장 단기간에 확충한 방법이 있소.”

“소금이옵니다. 특히 서산과 태안의 해변인 가로림만 일대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크고, 크고 작은 규모의 해택지 및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여, 좋은 갯벌이 잘 형성되어 있기에 소금 생산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사옵니다. 하여, 우리나라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옵니다.”

“과연 그렇소. 매번 느끼지만 호판은 늘 준비가 되어 있소.”

말과 동시에 다른 대신들을 슬쩍 바라봤다.

이는 대신으로서의 준비 정도를 채근하는 의미였다.

모두 움찔하며 민망한 듯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인조께서 서산과 태안에 관염 자염장을 설치하셨소.”

“그러하옵니다. 결과 해당 지역에서 납부한 면포의 수는 무려 340통이었사옵니다. 목 1필의 가격이 2~3냥이었으니 이를 환산하면 관영 자염장에서 얻은 수입은 3만 4천~5만 1천 냥에 이르옵니다.”

문서 한 장 없이 그대로 입에서 물 흐르듯이 나오는 수치.

대신들은 허적의 업무 장악력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이연의 압박에 부담을 느꼈고.

“당시 호조의 1년 전세 수입이 미 10만~13만 석이었사옵니다. 통상 미 1석은 4~5냥이기에 적게는 모두 40만 냥, 많게는 48만~65만 냥이옵니다. 그러하니 관염 자염장의 수입은 호조 세입의 1할에 육박하는 규모이었사옵니다. 과연 나라를 책임지는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경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한데, 말이오. 선왕께서 즉위하실 때 서산은 30통, 태안은 50통으로 줄었소. 이는 해당 지역 소금 생산의 운영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음을 의미하오. 어찌 여기시오?”

날카로운 반론이었다.

허적은 물론이거니와 대신들은 내심 크게 감탄했다.

군왕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종래 군왕은 큰 틀을 주도했다. 세밀한 실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그러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실무 장악력을 보인다는 건 조정의 세세한 곳까지 모두 살폈다는 걸 의미했다.

심지어 이제 막 즉위한 군왕의 준비 정도라는 걸 고려할 때, 감탄이 나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괴이했다.

분명 소금은 군왕이 먼저 꺼낸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마치 호조판서 허적이 안건을 제출하였고, 군왕이 검토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이뤄진 흐름이었다.

대신들은 손에 차오르는 땀을 느끼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전하. 선왕 시절의 일이라면 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옵니다. 그러니 신에게 기회를…….”

“훈련대장은 그 입을 다물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비록 과거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어찌 효용성이 없겠사옵니까. 더욱이 호조 세입의 1할이라고 한 것은 고작 태안과 서산의 일이었사옵니다. 그 외 지역까지 더한다면 비록 지금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찌 부족함이 있겠사옵니까.”

“호판. 혹시 왜 어려움이 있는지 아시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알면 왜 해결하지 않소?”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한 화법이었다.

늘 여유롭던 허적조차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문답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한 가지일 수밖에 없다.

지금 군왕은 과거 수준의 소금 생산량을 원하는 것이다.

“전하. 여러 원인이 있사옵니다.”

“그 원인을 해결하라고 했소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관영 자염장을 운영하였을 때 염호의 부담이 너무 컸사옵니다.”

“염호의 부담이라면 결국 염분세가 되겠군요.”

“그러하옵니다. 또한, 염분이 설치된 토지 중에는 염분세와 별도로 지세를 납부해야 하옵니다. 이뿐만이 아니옵니다. 염호들이 소금 생산에 집중하려고 하여도 다른 잡역도 그대로 존재하기에 효용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사옵니다.”

“그게 왜 문제요?”

“예……?”

“염분세와 지세는 이중 부과이니 지세는 면하시오.”

“!!!”

“지세로 인하여 소금 생산이 줄어들면 그게 더 손해가 아니겠소? 또, 염호들의 잡역이라 하면 병영이나 수영의 일이 될 것이오.”

“그, 그러하옵니다.”

“오늘 교지를 내려 염호의 잡역을 금하도록 하겠소. 고된 잡역에 휘둘리느라 소금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라 전체의 손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외다.”

“저,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리하면 필시 잘못된 선례로 남을 것이옵니다.”

“선례? 잘못된……?”

이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날카로움에 완벽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허적은 멈칫했다.

지금은 나서지 않고 기다려야 할 때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선례를 지키고자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을 가져오지 않았군.”

군왕이 꺼낸 언어는 분명한 질책이었다.

또,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좌중은 순식간에 경직됐다.

“어처구니가 없소.”

다시 새어 나온 노기.

여전히 누구도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얼마 전 연좌에서도 경험하였지만, 이연은 불필요한 논쟁을 즐기지 않았다.

지금도 필시 그럴 것이다.

“경들은 반대하려고 관복을 입었소? 내가 분명히 정책을 수립하라고 하였는데? 다시 말하오? 경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아니군. 하나 했소. 호포제를 반대하는 연좌.”

명백한 조롱이었다.

이연의 입꼬리를 고약할 정도로 올라갔다.

“분명히 일렀소. 호포제는 철회가 아니라 보류라고. 한데, 보시오. 호포제가 철회되니 득달처럼 달려들었던 무리가 이제는 흔적도 보이지 않소. 이 나라 조선의 사대부는 제 잇속을 찾을 때만 열성적이오? 그 순간만큼은 붕당의 첨예한 대립도 흔적을 보이지 않더군.”

대신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다.

또 이마에는 진땀이 주르륵 흘렀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껏 제대로 된 정책 논의가 없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은 있었으나 정황상 호포제 보류가 선언되자 마땅한 움직임이 없었다.

군왕이 이를 정확하게 꼬집어 힐난하니 마음이 무거웠고,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토록 황망할 수가 없다.

“경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

“소금 생산이 전보다 못한 이유 중 선례도 있소. 특히 소나무 보호를 위한 금송책을 우선하였기에 땔감을 대대적으로 확보할 수 없소.”

“그러하옵니다. 자염은 눈앞의 것이고 금송은 영원한 계책이라는 오래된 선례이옵니다.”

“나는 그 선례를 집어 던질 것이오.”

“저, 전하.”

“지금부터.”

이연의 용포가 거칠게 휘둘러졌다.

눈빛은 사나웠다.

“대안을 내지 않는 반대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외다.”

선례(先例)는 그 자체가 반대의 명분이었다.

선례가 없다 혹은 선례로 남을 수 있다.

조선 사회에서 이보다 큰 명분은 없다.

그러나 이연은 이를 정면으로 집어 던졌다.

선례가 아닌 대안을 가져오라고 명한 것이다.

이연의 날카로운 말은 이어졌다.

“묻겠소. 나는 조선의 군주요? 백성의 군주요?”

“어찌 나눌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조선의 군주이며 백성의 군주이옵니다.”

“그래요? 하면, 내가 보살펴야 할 백성은 대체 어느 나라의 백성이오?”

“응당 조선의 백성이옵니다.”

“한데, 왜 보살피지 못하오?”

“어찌하여 보살피지 못한다고 하시옵니까.”

“자염을 행하면 백성을 구할 구휼미를 더 확보할 수 있소. 그런데도 태어나지도 않은 백성과 존재할지도 모를 나라를 위하여 금송책을 유지해야 하오. 하면, 나는 대체 무엇이오? 내일의 조선에 살아갈 백성의 군주요? 100년 조선의 왕이오? 하면, 지금의 백성은 100년 전 선대의 백성이며, 작금의 조선은 100년 전 선대가 통치하였소?”

하나씩, 한 장씩 선례는 찢어졌다.

찢어진 선례는 이연이 모조리 불태웠다.

“작금의 조선은 재해를 감당할 역량이 부족하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사용해야 하오. 나는 응당 그리할 것이오. 비록 후대가 나를 조선의 선례를 어지럽힌 암군이라고 욕할지라도 그리할 것이오.”

사관의 붓으로 만들어질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 무서운 다짐이 지금 쏟아졌다.

“만대가 나를 욕할지라도 나는 웃으며 갈 것이오.”

“…….”

“내 백성이 웃을 수 있다면.”

“…….”

“내 백성이 나를 군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악명을 즐기겠다는 또 하나의 선언.

백성의 미소를 위하여 그리하겠노라는 군왕의 포부.

“내 나라, 내 백성을 위하여.”

덧붙였다.

“조선이 아니라.”

이연은 대신들을 살폈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바라봤다.

이제 선언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조선의 군주이기 이전에, 지금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의 군주가 될 것이오.”

누구도 반론을 펼칠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연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정책의 구체화였다.

무엇이 나올지 모를 수가 없다.

바로 선례의 폐지였다.

“조선의 금송 정책은 폐지하오. 또한, 염호를 보호하시오.”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여, 경들은 들으시오.”

“예. 전하.”

“재해가 멈추기 전까지 이 나라는 어떠한 금기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백성을 위하시오.”

다시 말했다.

“나의 백성 말이오.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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