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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44화 (44/298)

44화 위생(衛生)

공기는 무거웠다.

편히 숨을 쉬려면 자세를 낮춰야 할 것만 같았다.

또, 무거움이 만들어 낸 퍽퍽함에 숨을 쉬는 것도 버거웠다.

범인이라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여 숨을 내뱉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토록 불편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이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편히 숨을 쉬기 위함인지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였다.

하면, 그가 이 상황의 주체라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숨소리는 참으로 고르고 일정했다.

퍽퍽하고 답답한 공간의 상황 따위는 아무런 방해가 아니었다.

잘게 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조정랑.”

“예. 전하.”

그랬다.

공간의 불편함을 유발한 이는 조선의 지존 이연이었고, 몸을 낮춘 사람은 윤휴였다.

이연은 수북하게 쌓인 장계를 지그시 쳐다봤다.

눈동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낮고 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군현의 수령들로부터 장계가 빗발치고 있소.”

장계를 잡더니 툭 던지며 말했다.

“평안도 강서 등 4개 읍에 홍수가 생겨 산기슭이 무너졌소. 필시 인명 피해가 컸을 것이오.”

또 다른 장계를 잡아서 내밀 듯 던졌다.

“강원도 간성에 큰비가 내려 인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많소. 또한, 강원도 양양부에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 7인이 깔려 죽었소.”

이연의 손은 쉬지 않고 장계를 잡고 내렸다.

어느새 옮겨진 장계가 수십 개를 넘었다.

모두 재해와 관련한 장계였다.

하나씩 읊는 이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표정은 갈수록 경직됐다.

윤휴는 황망함에 자세를 더 낮추며 조심스레 말했다.

“신 역시 대강의 사정을 들었사옵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사옵니다.”

“어찌 생각하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재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조정이 해야 할 일은 백성이 재해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옵니다.”

“참으로 우습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재해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소. 하지만, 조정이 노력하면 재해의 피해를 줄일 수 있소. 치수에 힘을 쓰면 홍수를 막을 수 있으며, 보와 저수지를 크게 확충하면 가뭄을 막을 수 있소.”

“전하. 작금의 조선은 그와 같은 역사(役事)를 일으킬 여력이 없사옵니다.”

“하여, 우습다는 것이오. 하늘이 조선을 조롱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말이오.”

“전하.”

이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무기력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붕당의 대립을 오직 힘으로 짓누른 군왕이라고는 쉬이 믿기 힘들었다.

“공조정랑의 말이 참으로 옳소. 재해의 피해를 줄이고자 백성에게 역을 부과한다면 이 또한 재해가 될 것이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참으로 우습지 않소이까.”

“전하. 이럴 때일수록 어심을 굳건하게 하셔야 하옵니다.”

“백성은 매일 고통에 허덕이는데 군주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너무나도 괴롭소.”

이연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함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우리 조선은 가난하오.”

“전하…….”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백성이 참으로 가엽소.”

“전하께서 이토록 어지신데 어찌 가엽다고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는 아직 백성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였소.”

“부디 조급하게 여기지 마시옵소서.”

“아니외다. 나라가 가난하고 재해가 끊이지 않을 때 백성에게 작은 미소라도 전할 방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이까. 나는 부덕하여 이런 방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죄스럽소.”

갈수록 깊어지는 한숨과 더불어 나오는 한탄.

윤휴는 너무나도 곤혹스러웠다.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한마디를 꺼냈다.

“신이 방책을 찾아낼 것이옵니다. 하여, 청이 있사옵니다.”

“방책을 찾아낸다고 하였으니 어찌 청을 거절하겠소.”

“신은 공조에 속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호조의 일에서 방책을 찾아도 되겠사옵니까.”

“호조의 일이라.”

“그러하옵니다.”

“하면, 마땅한 방책을 속에 품었다고 여겨도 되겠소?”

“방책은 있사오나 마땅한지는 검토를 거쳐야 하옵니다. 하여, 아직은 전하께 감히 아뢸 수가 없사옵니다.”

“어찌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이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말했다.

“마음껏 하시오. 탈은 없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말과 함께 윤휴가 나가자 이연은 피식 웃었다.

엷은 미소와 함께 말이 새어 나왔다.

“역시 우회하는 법이 없군. 말 그대로 불꽃 같은 인사로다.”

만족스러웠다.

비변사의 대신들을 크게 나무랐으나 윤휴에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기대한 대로 나름의 방책을 고민하고 있었고, 부족한 건 권한이었으니까.

이럴 때는 그저 작은 힘을 실어주면 그만이었다.

시원한 웃음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적당한 시간이 지났을 때 내관의 보고가 있었다.

“전하. 구관당상 송시열이 도성의 경계로 진입하였사옵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일정이었으나 그만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연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입궐하라 이르라.”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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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정말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라다.

그 먼 곳을 다녀왔는데 하루 정도의 휴식은 필요하지 않나?

온몸이 뻐근하고 머릿속은 몽롱한데 당장 입궐하라는 건 정말 아니지 않나?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고, 늘어나는 건 한탄이었다.

반쯤 나간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이연과 마주 앉아 있었다.

“참으로 고생하셨소.”

“응당 할 일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소만.”

변승업과 구휼미 4천 석의 일을 의미할 것이다.

군왕의 권능과 관련한 일이었기에 간략하게라도 사후 보고를 진행했다.

이제 나는 그와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모두 전하였다.

물론, 변승업의 눈부신 사회생활을 적절하게 생략했다.

“허. 참으로 올바른 일이 아닐 수 없소. 이 나라에 그토록 기특한 역관이 있었다니.”

“전하. 역관 변승업은 비록 중인에 불과하지만 가진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옵니다. 또한, 배포가 남다르고 헐벗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니 어찌 중용하지 않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과연 그렇소. 하면, 그의 관복을 바꿔주고 싶소?”

제대로 승진시켜주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절대 아니 될 말이다.

변승업은 제 가문과 재물을 지키면 만족할 인사다.

아니, 설령 그러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중인에 불과한 이를 요직에 앉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인 조선에서 전시도 아닐 때 그런 짓을 하는 건 그냥 죽으라고 등 떠미는 것이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변승업은 역관이 어울리옵니다.”

“그를 시기한 무리를 걱정하는 것이구려.”

“실은 그러하옵니다. 또한, 전하께서 따로 어심을 보이셔도 탈이 날 것이옵니다. 물론 구휼미 4천 석이라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기특한 행위이지만, 세상은 전하께서 내리셨다고 여기옵니다. 그러하니 괜한 분란을 일으킬 뿐이옵니다.”

“알겠소. 하면, 구관당상이 그에게 전하오. 내가 기억하겠노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장담하는데, 변승업은 좋아서 입이 찢어질 것이다.

“하옵고 금송책의 축소를 이르셨다고 들었사옵니다.”

“벌써 들으셨소? 혹시 구관당상도 반대하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준비해온 문서를 내밀었다.

원래는 장계로 진즉에 올려야 했으나 사는 게 바빠서 이렇게 됐다.

상황이 일관된 흐름이었다면 원칙대로 했겠으나, 연쇄적인 사건 사고가 터지는 바람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게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기에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직접 보고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연도 절차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기에 꼼꼼하게 살필 뿐이었다.

한참을 세밀하게 살피던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삭주의 백성을 모두 씻기고자 땔감을 확보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사옵니다.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백성이 더 귀하지 않사옵니까. 이때 금송책의 축소를 전해 듣고 크게 기쁘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하하하. 과연 그러하오. 나와 경의 뜻이 이토록 잘 통하니 참으로 바람직하오.”

“신은 그저 어심을 살폈을 뿐이옵니다.”

변승업을 보며 확실하게 배웠다.

적당한 아부는 사회생활의 필수라는 걸.

“그나저나 참으로 놀랍소. 역병을 이토록 조기에 진압하다니. 참으로 감탄하였소.”

“허목이 주도한 구황정책과 구휼미 4천 석이 큰 효과를 내었사옵니다.”

“물론이지요. 아무리 좋은 대책이 있더라도 기근을 이겨낼 수 없다면 모두 허사지요.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그게 아니외다. 그래요. 위생(衛生)이라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하하하. 내 비록 경의 학문에 비할 수는 없으나 많은 경전을 읽고 부지런히 노력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리도 부족하오. 위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소이까.”

삭주에서 시행한 방역 모델은 위생으로 방점을 찍을 수 있다.

삭주에서는 준비 태세가 부족하여 백성을 씻기는 것에 그쳤으나 차후 조선은 백성의 이불, 옷 따위도 ‘세탁’해야 한다.

“전하. 흉년과 홍수가 발생하고 기근이 일어나는 건 하늘의 뜻이 어찌하겠사옵니까. 물론 조정이 많은 구휼미를 확보해내고 군현의 수령이 구황을 잘 집행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옵니다. 하오나 신이 더 집중한 건 역병이었사옵니다. 애석하게도 역병은 신분을 뚫지 못하옵니다.”

“하하하. 삭주에 다녀오더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가져오셨소. 뒤가 궁금하니 계속하시오.”

“역병의 창궐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건 어디까지나 백성이옵니다. 사대부는 아니옵니다.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백성이 사는 곳은 불결하고, 사대부의 거주지는 청결하기 때문이옵니다.”

그 외 다른 요소도 반드시 존재한다.

뭐…… 이를테면 영양 상태도 있을 거고.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위생이다.

“신이 백번을 고민했사옵니다. 백성이 역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책은 무엇일까. 매번 결론은 같았사옵니다. 바로 위생이었사옵니다. 하여, 간곡히 청하옵니다. 백성의 옷과 이불을 끓인 물에 자주 씻고, 목욕을 대대적으로 권장할 것이며…….”

집 청소도 자주 하고, 오물도 치우고…….

장황하게도 말을 이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시어 군현의 수령에게 하달하신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사옵니까. 지천의 땔감 따위를 아끼지 말고 물을 끓이고 씻어야 하옵니다. 물론, 당장 먹을 끼니 걱정에 시름하는 백성의 사정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그런데도 이는 이뤄져야 하는 일이옵니다.”

벌목하려면 결국, 역을 부과해야 한다.

백성의 고통이 더 가중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지웠다.

어쩔 수 없다.

현대 사회처럼 벌목 회사를 세울 수도 없으니까.

설령 벌목 회사를 세운다고 할지라도, 조정이 무슨 돈이 있어서 벌목 회사에 대금을 지급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새 조정은 구휼미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옵니다. 또한, 그간 창궐하였던 역병의 사례를 다시 검토하여 처방을 명확하게 해야 하옵니다. 아울러 약재를 세분화하고 민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까지 완벽하게 정리해야 하옵니다. 언제까지 역병이 창궐하였을 때 처방을 찾고자 수십 종류의 약탕을 먹이며 시간과 싸우고 천운에 맡길 수는 없사옵니다.”

“그 위생이라는 것이 잘 확립된다면 조선은 역병에서 벗어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모든 역병을 막아낼 수는 없사옵니다. 또한, 위생을 아무리 강조할지라도 백성의 삶이 어찌 사대부의 청결과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신은 장담하옵니다. 전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선의 역사는 위생의 확립 전후로 나뉘게 될 것이옵니다.”

이연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흡족함이 가득한 미소까지 보였다.

“경이 이번에 삭주에서 조선의 길을 제시하였소.”

“황공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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