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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47화 (47/298)

47화 가난을 노래하는 나라

이연은 맑게 웃으면서 윤휴를 반겼다.

정책의 수립을 요구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왔다는 건, 애초 큰 틀이 존재하였다는 의미였다.

현재 조정에서 윤휴만큼 어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비변사의 대신들도 이 정도로는 해내지 못했다.

어찌 흡족하지 않겠는가.

미소를 유지하며 윤휴가 준비해온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 이연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윤선도 그리고 허목이라.”

“그러하옵니다. 신이 용렬하여 어심에 들지 못할까 두려워 그들과 함께 논의했사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문서를 넘긴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건의 타당성을 떠나서, 파격과는 거리가 먼 무난한 수준의 안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소를 거두었다.

“양잠업(養蠶業)이라.”

“그러하옵니다. 전하.”

“승하하신 선왕께서 의례적으로 양잠을 권장하긴 하였소. 또 외지로 부임하는 군현의 수령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셨고.”

“또한, 양잠에 힘쓰는 자에게는 신역을 탕감하셨사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주 광해군 이후 선왕에 이르는 세월 동안 양잠 정책은 진전이 없사옵니다.”

“그래요. 잘 알지요. 너무나도 잘 알지요. 그러니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소만.”

“양잠업을 바로 잡으면 조선의 국고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그 또한 알고 있소.”

말을 끝낸 이연은 자연스레 문서를 덮었다.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읽지 않겠으나 말로 내용을 이르라는 것, 즉 흥미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이연은 말을 보탰다.

“양잠을 수행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소. 오래전부터 조정의 잠실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외다. 즉,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원하지 못한 제도라는 말이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특히, 왜란과 호란을 거친 뒤 국토가 황폐해졌기에 뽕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소. 어디 이뿐이오? 나라에 뽕나무가 거의 없소. 이제 와서 심는다고 한들, 조기에 성과를 볼 수 있겠소? 무릇, 뽕나무는 심은 뒤 2, 3년이 지나야 누에에게 먹일 수 있소. 길어지면 3년에서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도 이연이 언급한 건, 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잠의 효용성을 모르지 않았을 선대 시절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으니까.

“신이 오늘 감히 전하께 청한 것은 기어이 해낼 방책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방책이 있다?”

“그러하옵니다.”

조금 전까지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이연은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동시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감돌았다.

윤휴의 말대로 양잠 정책이 성공한다면 국고의 규모가 달라진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급했소.”

“어찌 그러하겠사옵니까.”

“이제 경청해볼까 하오만.”

“이미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뽕나무를 심는 것이 가장 기본이옵니다.”

“계속하시오.”

자신감이 넘치는 윤휴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호(大戶) 50그루, 중호(中戶) 40그루, 소호(小戶) 30그루로 9, 10월경에 심어야 하옵니다. 수령이 직접 관리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크게 벌하고 군현의 모든 뽕나무 수를 조정에 고하게 하여…….”

“잠시.”

“이르시옵소서.”

“과정도 들어야겠으나, 결론부터 듣고 싶소.”

“결론이라고 하셨사옵니까.”

“목표라고 하지요. 궁극적인 목표.”

윤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껏 조선의 양잠업은 곡물을 생산하는 것이었사옵니다. 하오나 앞으로의 양잠업은 명확한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성질로 완벽하게 탈바꿈할 것이옵니다. 하여, 양반, 중인, 농민 그리고 노비에 이르기까지 양잠에 종사하는 신분 혹은 계층이 탄생할 수 있사옵니다.”

“아주…….”

이연은 천천히 말을 끊어내며 말했다.

“바람직하오.”

“황공하옵니다.”

“하면, 이제 시작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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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반계 학당은 활기가 넘쳤다.

유형원은 조선 팔도에서 이곳보다 활기가 넘치는 곳은 없다고 여겼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스승님.”

오늘도 어김없이 제자들이 다가왔다.

유형원은 미소를 유지하며 등을 돌렸다.

“그래. 보아하니 오늘도 궁금한 게 있나 보구나.”

“스승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어찌 모를 수 있느냐? 너희의 스승님께서는 지금 양잠을 하고 있지 않으냐.”

“양잠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저 양잠에 대해서 궁금하여 그러합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양잠을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모를 수는 없다.

짓궂게 웃으며 제자들의 반응을 살피던 유형원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크게 실언했구나. 그래. 양잠에 대해서 안다면 이 나무가 무엇인지도 알겠구나.”

“당연합니다. 뽕나무가 아닙니까.”

“그렇지. 남쪽은 5월, 도성 인근은 5월 중순, 북쪽은 6월 상순에 뽕잎이 만발하지.”

“북쪽은 춥고 남쪽은 따뜻하니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즉, 이 땅은 뽕나무가 성장하기에 딱 알맞은 조건이었기에 뽕나무가 아주 많았다는 말을 한 것이니라. 물론 북쪽보다는 남쪽이 더 적합하긴 하다만 뽕나무는 전국 각지에 고루고루 분포되어 있지. 과거 세종 시절의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는 36곳의 군현, 강원도는 24곳, 충청도는 22곳, 전라도는 41곳, 경상도는 25곳, 황해도는 5곳, 평안도는 43곳, 함경도는 8곳으로 총 204개의 군현에서 조정의 관리하에 뽕나무를 재배했다. 어디 이뿐만이겠느냐. 경복궁에는 3,590그루, 창덕궁에는 1천여 그루, 율도(마포 남쪽의 밤섬)에는 8,280그루의 뽕나무를 조성하셨느니라. 이후 문종께서 보위를 이으신 후 아주 성행하였지.”

“그 모든 걸 외우시는 건 역시 재능입니까?”

“무릇, 재능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다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입니다.”

“한데, 나는 어찌하여 너희가 부지런하게 필기하는 걸 보지 못하였느냐. 이뿐만이 아니다. 늘 지필묵 따위를 챙기라고 하였거늘.”

유형원이 혀를 차며 책망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반응이 놀라웠다.

“그저 스승님께서 평소에 빨리 익히면 조선에 좌절할 시간이 더 빠르게 다가올 뿐이라고 이르셨기에 저희는 늘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뿐입니다.”

“…….”

“예.”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기가 막힌 답변에 유형원의 말문은 막히고 말았다.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흥이 나지 않는구나. 천천히 익히도록 하여라.”

축객령이었다.

스승의 마음이 삐뚤어짐을 깨달은 제자들은 황급히 지필묵을 가져왔다.

다소 어수선한 시간이 지났다.

모두 어색하게 웃으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했다.

“스승님.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어찌 스승님의 말씀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적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너희에게 천천히 익히라고 하였으나, 사안마다 차이가 있다. 양잠은 꼭 알아둬야 하기에 필기를 일렀으니 절대 곡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 동안 의심이라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다.”

유형원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뒷짐을 지었다.

시선을 돌려 뽕나무를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랬다. 이 나라 조선은 그야말로 뽕나무의 나라였다. 어디를 가더라도 뽕나무가 넘쳤어. 아예 대규모 뽕밭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묻겠다. 이유를 아느냐?”

“어찌 알겠습니까.”

“너희는 참으로 탁월하구나. 되돌아보면 조선의 시작은 지금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어찌 다릅니까.”

“지옥보다 끔찍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사전(私田) 혁파라는 미증유의 개혁을 단행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당시 사대부는 이 땅을 재건하고자 목숨을 던졌어. 그야말로 민본의 나라였지.”

“어렵습니다.”

“과거 가평현의 수전 면적은 겨우 123결이었다. 충청도 청풍은 135결, 황해도 수안은 56결……. 한데, 이러한 지역에 많은 이가 살았다. 토지는 척박하고 사람은 많으니 끼니를 걱정해야 할 수전이었지. 하여, 조정은 이 모든 지역에 뽕나무를 심게 했다. 왜? 농사에만 매달려서는 도저히 백성의 삶이 안정적일 수는 없으니까.”

“사람이 많았다면 뽕나무 재배가 아주 잘되었을 거 같습니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당시 사대부는 조정의 요구와 백성의 삶을 딱 맞게 연계하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수립하였다.”

“하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유형원은 피식 웃었다.

가벼운 웃음으로 보였으나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명백한 조롱과 비웃음이 담겨 있다는 걸.

“조선은 뽕나무를 버렸다.”

“양난으로 나라가 어려워진 탓이 아닙니까?”

“병자호란은 20년 전, 임진왜란은 70년 전이다. 아니,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건 의지다. 하여, 내가 이르지 않았느냐. 왜구와 홍건적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졌고, 귀족의 수탈로 백성들이 죽지 못하고 살아가던 그 엄혹한 시절의 사대부는 기어이 해냈다고. 양난의 어려움이 그때보다 작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어찌 크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한데, 보거라. 200년 전의 사대부는 기어이 해냈거늘 작금의 사대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나라가 어렵다. 하면, 백성의 삶은 어떠하겠느냐? 조정의 대신이라면, 성리학을 배운 성리학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살피지 않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 여러 어려움이 있고 한계가 있더라도 기어이 해내야 한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대체 뽕나무를 심어 백성에게 권장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 그저 하면 될 일이다. 한데도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그 오랜 세월을 뭐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교지를 내리고 집행을 명하였을 뿐이다. 군현에서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했을 뿐이다. 지옥을 끝장내고 민본의 대의로 이 나라를 세우신 태조께서 보시면 통곡하실 일이지.”

시작은 달랐으나 결론은 같았다.

조선과 조정에 대한 유형원의 불신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제자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퍽퍽한 공기가 지배하는 시간이 제법 지났을 때였다.

누군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가벼운 물음을 던졌다.

“하면, 양잠업은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양잠은 전답에서 얻는 수익보다 많다.”

“하면, 농사보다 양잠이 부유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겁니까?”

“양잠업은 조선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유형원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작금의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방편 중 양잠보다 효과적인 건 없다. 오직 양잠이 으뜸이다.”

유형원은 한탄하듯 말했다.

“조선은 가난하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양잠 정책조차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양난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졌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께서 이르신 방법을 사용하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늘 말하지 않느냐. 가난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는 나라라고. 가난하여 부유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하니 궁핍을 즐기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유형원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나라 조선은 가난을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느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예 가난을 노래하고 있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다.”

덧붙였다.

“참으로 위대하지 않으냐?”

“…….”

“이 나라 조선은 너무나도 위대한 나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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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의 초안에서 빈틈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촘촘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세세한 계획까지 부족함이라고는 없었다.

이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진해졌다.

“……또한, 과거에는 뽕잎 가루의 사용 시기가 3월 누에가 깨어 나올 때라고 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신이 여러 사정을 확인하였는데 이보다는 큰 잠을 자고 난 뒤, 즉 4월 말에서 5월 초에 사용하는 것이 좋사옵니다.”

종래 조선에서 시행한 양잠업의 문제점도 빼곡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만 한다면 그루마다 뽕잎 30근씩은 능히 거둘 수 있사옵니다.”

이렇게 거둬진 뽕잎은 양질의 명주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또한, 윤휴는 변화한 세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개국 직후와 지금의 향촌은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옵니다. 이미 각지는 장시가 발달하였기에 농가에서도 내다 팔 수 있는 물건을 조금씩 찾고 있사옵니다. 이러할 때 양잠이 부흥한다면 어찌 탈이 있겠사옵니까. 결국, 백성은 자발적으로 양잠에 뛰어들 것이옵니다. 오직 농사만 바라보던 백성에게 다른 살길이 생기는 것이니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사옵니까.”

그의 분석에는 정치만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민간의 분위기도 세밀하게 파악되어 있었다.

그리고 윤휴는 양잠업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단서를 꺼냈다.

“오랜 세월 양잠은 부녀자의 덕목이었사옵니다. 하오나, 앞으로는 아닐 것이옵니다. 무릇, 누에는 매일의 날씨에 세심하게 대응하여야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에를 보살펴야 하옵니다. 그러하니 부녀자들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사옵니다. 신이 여러 사람을 만나보며 상황을 살핀 바에 의하면 양잠의 성행을 꺼리는 부녀자가 상당수였사옵니다. 하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양잠업은 상업화가 되어 전업화를 가속할 것이옵니다. 신은 단언할 수 있사옵니다.”

세상이 변했다.

“무릇, 뽕나무는 좋은 땅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거름 주고 호미질하지 않아도 저절로 옷감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 하여, 양잠으로 큰 재화를 모아낼 수 있사옵니다. 물론 그 주체의 다수는 양반이겠으나 어찌 백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남은 건 오직 통치였다.

이연은 윤휴의 열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령의 역할이 중요하겠소.”

“그러하옵니다. 어명을 내리시어 수령을 엄히 단속하시옵소서.”

“과거 송시열이 내게 말했소.”

윤휴는 멈칫했다.

비변사 문제로 조정을 시끄럽게 한 송시열이 언급될지는 미처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조선은 가난을 노래하고 있다고.”

“…….”

“그 노래. 이제는 그만 불러도 되지 않겠소?”

비변사가 수립할 소금 생산과 윤휴의 양잠업이라면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연은 확신했다.

“전권을 내리겠소. 전국에 뽕나무가 만발하게 하시오.”

“신 윤휴. 기어이 어명을 수행하겠사옵니다.”

“윤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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