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조선을 노래하라(5)
밤이 늦었으나 나의 석고대죄는 이어졌다.
군왕의 어명을 수반하지 않은 퇴각은 최악의 결과로 연결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생스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하였으나, 어찌하겠는가.
이 모든 건 천지도 모르고 날뛴 내 탓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송시열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처음부터 지식을 통째로 넘겼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랬다면 비변사 축소처럼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됐다.
이제 와서 내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저 죄를 청하며 이연의 노기가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목을 살짝 풀고 외치려고 할 때였다.
약간의 소란이 신경을 자극했다.
시선을 돌렸다.
희한했다.
주변을 지키던 무리가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어둠의 끝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었다.
눈에 힘을 주고 바라봤다.
그가 다가왔다.
바로 이연이었다.
상상도 못 했다. 통상 군왕의 등장이 이토록 고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서둘러 극진한 예를 취하였다.
“전하.”
“…….”
이연은 대꾸하지 않은 채로 지척에 이르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저 이연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군왕이 만든 침묵에 짓눌렀던 숨소리가 조금 흩어질 때쯤이었다.
“경은 참으로 고약하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비변사.”
“신이 불민하여 어심을 어지럽혔사옵니다. 부디 너그럽게 헤아려주시옵소서.”
“…….”
이연은 다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눈빛이 참으로 깊었다.
어찌나 흡입력이 있는지 하마터면 나도 물끄러미 바라볼 뻔했다.
“비변사를 축소하고 의정부의 복원을 청한 경의 행동은 분명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러하오.”
“…….”
“지금보다는 오래전.”
“…….”
“태조께서 민본의 대의로 이 나라 조선을 세우셨소.”
비변사가 왜 개국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의아하였으나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냥 들어야 했다.
“민본의 열의가 가득한 시절이었으나 정치에는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소. 태종께서 정도전을 참한 것이 그러하오. 하지만 당시의 다툼은 지속적이거나 추악함과는 달랐소. 이 나라 조선을 향한 열의의 싸움이었기에 그러하오. 하여, 다툼은 일시적이었고 논쟁이 지속하였으며 추악하지 않고 아름다웠소.”
“…….”
“비변사를 축소하고 의정부 복원을 청한 경의 뜻이 바로 여기 있었소.”
“신의 뜻이라고 하셨사옵니까?”
“하하하. 아직도 숨기시오? 뭐. 좋소. 나 역시 처음부터 모든 걸 알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경이 서인과 남인의 정객들을 한데 모아 백주에 의술을 베푼다는 소식을 접하고 알게 되었소.”
대체 무슨 말일까.
눈을 껌뻑이며 바라만 봤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좀 자세히 해줬으면 좋겠다.
이연의 말은 다소 느리게 이어졌다.
“영의정과 좌의정 그리고 우의정의 합의로 이뤄지는 의정부는, 작금의 조정에서 이뤄지는 서인과 남인의 극한 대립과는 너무나도 다른 과거의 이야기요.”
“전하. 신은 도저히 모르겠사옵니다.”
“경은 참으로 괴이하오. 누구보다도 주자의 말을 신봉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조선의 개국 초를 이토록 이상향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외다.”
“전하.”
“되었소.”
이연은 손을 내저으며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의 여유로운 행동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가진 왕권은 붕당을 억누를 수 있을지라도 붕당의 대립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지요. 나도 알고, 경도 알고 있소. 왕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붕당의 대립은 조정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말 테니까.”
“…….”
“내게 처음부터 세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의아하였소. 이것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일이 더 수월하였을 것이니 말이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소.”
“해결되어버렸사옵니까?”
“비변사 축소를 청하여 조정을 흔들고 사직을 운운하였소. 모든 이가 경을 욕하였소. 한데, 경은 보란 듯이 백주에 의술을 베풀었소. 그것도 서인과 남인의 주요 정객을 이끌고 말이외다. 그리고 지금은 석고대죄하고 있소. 결과…….”
내가 석고대죄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숨을 크게 내쉬며 이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송준길, 윤선거, 허적, 허목, 윤휴 그리고 윤선도. 이들이 합심하여 경의 구제를 청하였소.”
“……그들이 함께 말이옵니까?”
“뭘 그렇게 놀라시오? 설마 이토록 빨리 그들이 회합할 줄은 몰랐던 것이오?”
눈만 껌뻑였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물어뜯고 싸울 것만 같은 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나의 구제를 청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정말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색한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모든 것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었소. 그리고 경은 기어이 해냈소. 서인과 남인의 단합을 해냈소. 당대 최고의 학자 우암 송시열의 석고대죄를 멈추게 해달라는 구제 상소라는, 보고 들어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묘안으로서 말이외다. 모든 건 이를 위한 포석이었소. 그 옛날 의정부의 성세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았소.”
정말 놀라운 포석이 아닐 수 없다.
듣고 있노라니 감탄만 나왔다.
그새 이연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밀었다.
바로 교지였다.
왕이 직접 전하는 교지였다.
나는 최고의 예로써 교지를 받았다.
너무나도 황망하여 감히 내용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경의 뜻을 지지하오.”
“……전하.”
“더는 경을 의심하지 않소.”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고 하여 섣불리 무슨 말을 꺼내거나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연이 몇 걸음 옮겼다.
따르지 않을 수 없기에 조심스레 일어나서 걸었다.
뒷짐을 쥐고 하늘을 바라보던 이연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참으로 밤하늘이 좋소.”
“그러하옵니다.”
“요즘 밤하늘을 자주 바라보오. 이토록 고요하고 평온하거늘 어찌하여 하늘은 이 땅에 그토록 가혹한 재해를 내리는지, 너무나도 원망스럽기 때문이오.”
“…….”
“이판.”
“예. 전하.”
“경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오? 아니외다. 다시 묻겠소. 경은 요즘 무엇을 심장에 새기셨소?”
나의 가슴을 무겁게 하는 돌덩이가 있다.
떠올릴수록 숨 쉬는 것이 버거웠고, 떠올리면 너무나도 괴로웠다.
쓰게 웃으며 입술을 잘게 깨물고 말했다.
“신이 죽인 병자를 심장에 새겼사옵니다.”
“경의 선택으로 더 많은 백성이 살 수 있었소. 하니, 그른 선택이 아니었소.”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신은 다시 그 순간이 올지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옵니다.”
“한데, 어찌하여 마음이 무거운 것이오?”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장차 조선은 늘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옵니다. 그때마다 소수는 당연하게도 희생될 것이옵니다. 하오나 전하. 그들의 희생은 절대로 당연한 것이 될 수 없사옵니다.”
이는 철학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고 할지라도 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다.
부득이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할지라도 희생을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통치도 인간이 한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면 그 나라의 통치는 더는 정도가 아니다.
오직 야만에 불과하다.
“과감하고 빠른 결정과 집행으로 일을 도모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옵니다. 신은 구관당상으로서 남들이 냉혈한이라고 삿대질하고 욕설을 하더라도 과감하게 일을 집행할 것이옵니다.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옵니다. 하오나 전하. 어찌 남몰래 울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어찌 가슴이 멍들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어찌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리하여 신은…….”
콧잔등이 시큰하다.
눈가가 따갑다.
목울대가 축축하다.
눈물이 새어 나왔다.
온 힘으로 누르며 말했다.
“앞으로도 죽일 것이옵니다.”
“…….”
“머뭇거리지 않고 죽일 것이옵니다.”
한 치의 주저함도 담지 않았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단호하게 말했다.
“신은 명분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민본의 대업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명분에 휩싸여 포은 정몽주를 죽이지 못할 때, 이를 결행하신 분은 잠저 시절 태종이셨사옵니다. 전하. 신은 그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모든 건 신의 영역이옵니다. 백성을 죽이는 건 신이옵니다. 전하께서 나서실 일은 단연코 없사옵니다. 하오니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
“백성을 살리시옵소서.”
쏟아내듯 내 모든 진심을 말했다.
모든 백성을 대변하겠노라는 성리학자의 나라에서 과감하게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하다.
내가 해야 한다.
하늘을 바라보던 이연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그의 몸이 움직였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말을 해야 할 때다.
“희생될 소수의 모든 원성은 신이 달게 받을 것이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피해를 덜 보게 될 다수의 죄의식이 만들어낼 비난도 신이 감내할 것이옵니다. 사관의 붓을 피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신의 이름은 조선 역사의 가장 어둡고 끔찍한 곳에 새겨질 것이옵니다.”
“…….”
“신이 선택하고 취한 길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
“신의 길은 반드시 피를 동반할 것이기에 그러하옵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는 한 걸음 비껴 서시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백성의 환호만 취하소서.”
“참으로 가혹한 말을 하오.”
“군주란 가혹한 선택을 해야 하옵니다.”
“……교지의 내용을 확인하시오.”
답변이 아닌 어명이었다.
아마 교지의 내용이 답변일 것이다.
나는 지극한 예를 취하며 교지를 펼쳤다.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송준길, 윤선도, 윤선거, 허목, 허적…… 그리고 송시열.]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의정부까지는 아니외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경이 하고자 하는 일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그랬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기구를 수립하여, 조선의 재해를 막는 모든 일을 행하시오. 어떠한 외압도 없을 것이오.”
지금 이연은 내게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내린 것이다.
“나의 왕권이 외압을 걷어낼 것이며, 여러 비판 여론을 모두 제압할 것이외다.”
그야말로 최고의 신뢰였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이판.”
“예. 전하.”
“언젠가…….”
“…….”
“조선을 노래할 날이 온다면…… 그때만큼은 꼭 함께하길 바라오.”
조선을 노래하는 날.
내가 그날을 만끽할 수 있을까?
사치일지 모르나 지금은 그려본다.
하여, 말했다.
“……반드시 함께 노래할 것이옵니다.”
쥐어짜듯 이었다.
“조선을.”
그리고
“윤허하오.”
답변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