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53화 (53/298)

53화 중앙재해대책본부(1)

어깨를 주무르며 좌우를 바라봤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좌로 송준길, 윤선거, 허적.

우로 허목, 윤휴 그리고 윤선도.

이렇게 함께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물론 윤선도의 표정은 영 불편하였으나 어쩌겠는가.

주상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시어 나의 수족이 되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여유롭게 한 명씩 차근차근 살피며 말했다.

“모두 잘 모이셨소.”

“신하로서 어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기에 왔소만, 대체 뭐하오?”

띠꺼움을 가득 담은 윤선도였다.

하지만 송시열의 모든 기억을 흡수하고 이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상황에서, 전처럼 눈치 보거나 하나씩 설득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나도 띠꺼운 표정으로 윤선도를 빤히 쳐다봤다.

순간, 노정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재해와 관련한 모든 것을 관장할 것이오. 비변사와는 별개로써 우리는 조정의 정치와는 무관하게 오직 재해만 신경 쓰오.”

“……조정의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셨소?”

“물론이오. 누가 무엇을 할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재해만 방비하오.”

“……명칭도 있소?”

“담백하게 중앙재해대책본부요. 줄여서 중대본. 그리고…….”

윤선도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눈동자는 참으로 복잡했다.

“중대본의 권한은 한계가 없으나 책임도 무한하오.”

“…….”

“조선의 모든 재해를 관장할 것이오. 이만하면 답이 되었소?”

여전히 복잡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윤선도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이유가 궁금하긴 했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윤선도만이 아니라 그 외 인물들의 표정도 참으로 괴이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말은 이어가야 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내가 진휼재상 구관당상으로서 본부장을 역임하게 되었소.”

아무래도 윤선도가 반발할까 봐 뻘쭘한 미소를 동반하여 말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윤선도라면 최소한 미간이라도 찌푸릴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러니 이제는 나까지 멋쩍어졌다.

그래도 말은 이어가야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에 불과하오. 중대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시선을 움직였다.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내정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조판서 허적 대감이오.”

“진심이시오?”

내가 송시열의 지식을 통째로 얻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이 범람할지라도 사용하는 주체는 송시열이 아니라 나다.

나는 지금까지 한 것처럼 원칙을 세우면서 허적을 뒷받침하는 게 옳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송시열의 내정가로서의 면모는 허적보다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허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거짓도 없소. 나 역시 의견을 내겠으나, 전권은 호판께서 휘두르시게 될 것이오. 나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혹여 불편하시다면 회의에 불참할 의사도 있소.”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또 희한했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퍽퍽했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상견례이니 다과라도 나누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너무 괴이해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상견례는 여기까지 하지요. 차후는 호판의 주재로 논의를 진행하면 되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혼자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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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이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러나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

“…….”

유독 무거운 침묵이었다.

특이한 건 누구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서로 시선은 부지런히 교환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속내를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까?

자세한 속사정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지금의 상황을 이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운을 먼저 띄운 건 송준길이었다.

“모두 들으셨을 것이외다.”

“들었지요. 너무나도 잘 들었지요.”

호조판서 허적이 대꾸하며 보태듯 말을 이었다.

“오직 재해의 대비만 신경 쓸 뿐 조정의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주목해야겠지요.”

“호판의 말이 참으로 옳소. 그뿐만이 아니외다. 우암은 과거 삭주에서도 허적 선생에게 구황 정책 등의 전권을 넘겼소. 이번 중대본 역시, 지엄하신 어명으로 인하여 자신이 본부장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호판에게 넘겼소.”

“두 발언 모두 가장 우암 송시열답지 않은 것이오. 하지만 일전에 내가 말한 우암 송시열과는 너무나도 잘 부합하오. 더 의심할 여지가 없소.”

허적은 잘게 숨을 내뱉었다.

그 역시 볼 때마다 믿기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선왕 시절의 송시열과 지금의 송시열은 다르오.”

“……사실 그건 내가 가장 잘 느끼고 있지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심한 윤선거였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의 얼굴색은 다소 붉어졌고 눈치를 살피더니 급기야 자라목까지 했다. 그러자 송준길이 도와주듯 말했다.

“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아는 사람은 미촌이지. 모두 우암이 과거 미촌에게 어찌 했는지 잘 알 것이오.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듯이 했소. 그런데 그거 아시오? 우암이 미촌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사죄했소.”

“……소생이 직접 겪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그 팍팍한 인사가 먼저 그리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사실 어쩌면 내가 죽어도 그의 조롱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지요.”

송시열과 윤선거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과정에서 송시열이 얼마나 졸렬하였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데 윤선거가 직접 말한 생생한 경험담은 송시열의 변화를 아주 강력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상황이 이렇게까지 흐르자 사람들의 시선은 가장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였던 윤선도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그의 입장을 들어봐야 할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던 윤선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결국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여길 단서는 없소.”

과거 격렬하게 대립했던 송시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허적의 말대로 선왕 시절 송시열과 지금의 송시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히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것이 있었다.

“선왕 시절 우암 송시열은 산림 영수로서의 권위를 등에 업었기에 군왕의 지지를 받았소. 이를 군신간의 신뢰라고 여기는 건 무리였소. 한데, 지금 그의 위치는 철저하게 군왕의 신뢰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소. 금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우암 송시열은 단 한 번도 산림의 여론을 움직이지 않고 군주의 신뢰를 얻고자 움직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외다.”

윤선도의 입에서 송시열을 향한 긍정적인 말이 나왔다.

사람들의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윤선도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의 행보에 어떠한 악의가 없다는 건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는 여기지 않소.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그러하오.”

“어찌하여 그러하오?”

“중대본을 수립할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리하면 될 일이오. 그러나 그리하지 않았소. 비변사 축소와 사직 상소로 조정의 여론을 좌지우지하지 않았소이까. 그가 아무리 산림의 여론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존재 자체로 조정을 움켜쥘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 하여,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내릴 수 없소.”

일견 타당한 말이었다.

송시열의 최종 목표가 중대본이었다면 그토록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는 송준길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결과론적으로 남인과 서인의 주요 정객이 합심하여 그의 구제를 청하였습니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허목이 말을 꺼냈다.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한때 윤선도 이상으로 송시열을 경멸하던 그의 말이 가지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윤선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허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어찌하여 그를 이토록 신뢰하게 되었나.”

“선생. 소생은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그를 지지하나?”

“그의 길이 옳기 때문이지요.”

신뢰하지는 않으나 길은 옳다.

괴이한 말이었으나 담긴 의미는 무척이나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허목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소생은 그의 걸음이 삐뚤어질 때 언제라도 길을 달리할 것입니다. 만일, 소생이 그를 신뢰하였다면 길의 어긋남을 말하여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재해를 대처하는 그의 행보가 옳기에 그의 동지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길이 달라진다는 건 결국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불순한 의도가 포함된 것이지요. 선생의 말대로 그러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과감하게 손을 놓을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동지는 사치일 테니까요.”

정적이었으나 송시열의 진심을 느꼈기에 동지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지금 송시열의 방책에 전적으로 동의할 뿐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선생의 말씀처럼 중대본을 수립하는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송시열이 남인과 서인의 대립을 억제하고자 일을 도모했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선생께서도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 자리에 있는 남인과 서인의 중추가 의기투합하여 우암 송시열의 구제를 청한 것을 말입니다. 붕당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이런 일이 과연 있었습니까?”

“…….”

“만일 진실로 송시열의 의도가 존재하였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또한 아니라면…….”

허목은 쓰게 웃었다.

설마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걸어갈 뿐이었을 그의 진심에 우리가 감화된 것이지요.”

“전자로 하지.”

윤선도는 단호했다.

입술을 세게 깨물며 더 딱딱하게 말했다.

“붕당의 대립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 그의 의도라고 하지. 더는 용인할 수 없네.”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당색을 넘어 조선을 위하고자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일단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네.”

마침내 윤선도도 중대본의 대의에 합류했다.

모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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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퇴궐했다.

쉬고 싶어서 굉장한 속도로 사가에 당도했는데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감. 중대본의 수립을 감축드립니다.”

우두커니 대문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람, 바로 우리 변승업이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자네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네.”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서 긴히 할 말이 있네.”

“아니, 노상에서 이토록 긴급하게 이르실 정도로 화급한 사안입니까?”

“이 사람. 이미 그걸 눈치채버렸단 말인가?”

“역시 대감께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시는군요. 소인은 또 감탄하고야 말았습니다.”

전혀 쓸데없는 대화를 조금 더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혀가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력 있는 의원들을 섭외해주게.”

“의원이 아니라 의원들입니까?”

“성현께서 늘 이르셨네. 다다익선이라고.”

“음.”

“응?”

“저자에서 행하시던 의술을 계속 진행하실 계획이시군요.”

“자네는 참으로 탁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네.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토록 잘 알아들으니 말일세.”

나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운영하는 기구가 존재하는 건 사실일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워.”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보지 않았나? 시작하니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백성들을 말일세. 이는 결국 조정의 역량이 도성의 병자를 제대로 품어내지 못한다는 걸 의미해. 그렇다고 하여 조정에서 더 많은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닐세. 이럴 때는 어찌해야겠나? 뜻이 있는 의인이 우뚝 서야지. 안 그런가?”

“음.”

이렇게 열변을 토했는데 고민하고 있다.

바꿔 말해서 의원을 섭외하고 약재를 지속하여 제공하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변승업에게 대의명분을 더 실어줘야 함을 깨달았다.

목소리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이보게. 작금의 조선은 조정만이 아니라 민간의 역량까지 총동원해야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워. 자네가 중심이 되어 도성의 의료 기구를 잘 꾸려나간다면 차후 어찌 되겠나? 각지의 군현에서도 자네를 본받을 것이네. 하면? 뜻있는 재야의 인사들까지 모두 나서지 않겠나? 바야흐로 조선 전역에 민간이 주도하는 의료 기구가 생기는 것일세. 바로…….”

“…….”

“자네, 변승업을 본받아서.”

“음.”

오만가지 감언이설로 대의명분의 무게를 더하였다.

변승업의 눈동자에서 심각한 갈등이 보였다.

거의 다 넘어왔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더 보태지는 않았다.

명백하게 내가 부탁하는 사안인데 너무 부담을 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특히, 변승업의 재력으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여 판단내릴 시간을 반드시 보장해야 하는 법이다.

“도성까지라고 약조하신다면 소인이 어찌 해보겠습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일세.”

“좋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일일세. 부담이 되지는 않겠는가?”

“이미 볼일 다 끝내셨는데 이제 와서 그게 궁금하십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천연덕스러운 내 답변에 변승업은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확한 계산은 다시 해봐야겠지만, 대략적으로 지금껏 사대부가에서 탐한 재물보다는 적습니다.”

“…….”

“물론 여기서 사대부들이 다시 더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무척이나 어려워지겠지요. 그러나 소인은 대감께서 꼭 지켜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대부들에게 빼앗길 재물이라면 나라를 위하여 쓰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변승업.

정말 고생 많이 하고 살았구나.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만일 자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이가 있다면 바로 말하게.”

덧붙였다.

“조선의 산림을 동원하여 그들을 응징할 것이네.”

한마디로 그냥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변승업은 크게 감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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