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중앙재해대책본부(2)
투자자와 성공적인 협상을 끝내고 편히 쉬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막 잠이 오려던 찰나였는데 무례하게 손님이 방문했다.
바로 허목이었다.
관계를 떠나서 늦은 시간 사가를 방문할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은 거 같았는데 굳이 여기까지 온 게 참으로 희한했다.
나는 궁금증이 가득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색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머뭇거린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다가 입술을 잘게 깨물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간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파악했소.”
“대강의 사정이라니요?”
“역관 변승업 말이외다. 그의 재물로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한 것이 아니오?”
“이거 너무 자세히 타인의 사생활을 파악하신 것 같소만.”
“아. 오해하지 마시오. 그를 양지로 끌어올려 옹졸한 무리의 표적이 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외다.”
이러면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
훗날은 모르지만 아직은 변승업이 음지에 있는 게 옳으니 말이다.
“뭐. 좋소. 한데, 그 말을 하려고 나를 찾은 것이오? 이 늦은 시간에? 자야 하는데?”
“……일전에 위생이라는 말을 꺼내셨소.”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위생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으나 뜻을 어찌 모르겠소. 나 역시 백성이 역병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려면 위생이 잘 집행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니 말이외다.”
“해서요?”
“한데, 다과도 내놓지 않으시오?”
언제부터였을까?
늘 내게 공격적이었던 허목의 태도가 확실하게 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가볍게 농을 던졌다.
“쌀 한 톨이라도 아껴서 훗날 백성에게 베풀까 싶소.”
“…….”
허목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고개까지 몇 차례 저으면서 말했다.
“중대본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외다. 하나는 여러 정책을 수립하여 중대본의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어찌 대처할지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겠소?”
“물론이오.”
“해서, 하는 말이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까?
과연 이어진 허목은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알다시피 나는 구체적인 정책을 입안하거나 실무를 집행한 경험이 거의 없소. 삶의 대부분을 재야에서 무언가를 익히는 것에 주력했소. 그런데도 내가 중대본에 속한다면 백성을 직접 챙기는 역할이 적합하지 않겠소?”
한마디로 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건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다.
이미 삭주에서 허목은 제 능력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청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권하였을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무엇을 원하오?”
“삭주에서 역병이 창궐하였을 때 가졌던 생각이 있소.”
“무엇이오?”
“목욕치법이외다.”
……예상의 궤를 벗어나도 아예 벗어나는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례인 줄 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백성에게 목욕치법을 행하고 싶다는 의미요?”
“당연하오.”
답하는 허목의 목소리는 단호하였으나 표정은 참으로 복잡했다.
당연했다.
허목이 말한 목욕치법은 목욕과는 아예 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내 반응에 담긴 의미를 읽었을까?
허목은 잠시 주저하다가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역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소. 그중 목욕치법은 으뜸으로 꼽소.”
“진심으로 묻고 싶은데, 혹시 목욕치법과 목욕을 착각한 건 아니오?”
“내가 목욕과 목욕치법의 차이도 모른다고 생각하오?”
“그건 아니오만…….”
“역병을 방비하자면 목욕치법이 합당하오.”
목욕은 그냥 몸을 씻는 것이다.
그러나 목욕치법은 말 그대로 목욕으로 병을 예방하는 의술의 방책 중 하나다.
달라도 아예 달랐다.
“동의보감과 의휘에 의하면 복숭아 잎은 역병에 큰 효과가 있소. 잎을 많이 따서 진하게 달여 침상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앉아 옷을 덮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본다고 하오. 이를 목욕에 착용한 것이 바로 목욕치법이외다. 즉, 복숭아나무의 가지와 잎, 백지, 측백나무의 잎을 함께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 방법과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 달인 물로 목욕하는 방법이 있소.”
길게도 말했으나 핵심은 하나였다.
목욕과 목욕치법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비용이었다.
“향양집성방에 의하면 복숭아나무 지엽은 10냥, 백섭은 5냥, 매양은 3냥이 필요하오.”
허목의 입에서는 본격적으로 구체적인 액수가 쏟아졌다.
“목욕치법은 목욕으로 끝나지 않소. 의휘에 의하면, 목욕 이후 신급수 1잔을 생강즙과 꿀 약간에 섞어 3잔을 마시라고 했소. 또한, 행여 눈이 어지러운 증상까지 동반한다면 모과 상기생을 달인 물로 목욕하라고 했소.”
“…….”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오.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는 걸 지금 내 입으로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백성을 대상으로 목욕치법을 시행하고 싶다는 것이오? 조정은 그러한 재원을 마련할 방법이 아예 없소.”
재원이라는 건 확보하고 싶다고 하여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산과 들을 떠돌며 복숭아나무 지엽 등을 구해오라는 것도 억지의 범주를 넘어선 말이기도 하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목욕치법은 의서에 적혀 있을 뿐이다.
백성들로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전설 속의 이야기로, 사대부가의 전유물이었다.
백성들은 평소 뜨거운 물에 목욕조차 하기 어려운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조정에서도 이를 도와줄 방법은 애당초 없다.
그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하다면 그냥 전설이라고 하면 된다.
“대체…….”
그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허목은 본론을 꺼내기 전에 분명 변승업을 언급했다.
이거였다.
“설마……?”
“변승업을 설득한다면 작게나마 시작은 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내가 알아보니 그자의 재력은 조선에서 으뜸이라고 하던데.”
“…….”
“그를 옥죄어 억지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말이 아니외다. 그저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다는 말이오.”
말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작 핵심은 따로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방책은 어디로 귀결되오?”
“나는 조정에서도 위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조정이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이참에 중대본이 수립되었으니, 민간과 잘 타협한다면 능히 해낼 수도 있지 않겠소?”
“즉 중대본 산하에 위생을 책임지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오? 위생국과 같은 것을 말이오?”
“바로 그것이오.”
“좋소.”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당혹스럽구려.”
“선생께서 위생국 국장을 청하였는데 본부장으로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이까.”
“내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오.”
“그러면 없던 일로 하지요.”
“……하리다.”
됐다.
사실 위생국과 같은 기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설 기구를 수립한다면 명확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허목의 능력과 위상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또 임시기구인 중대본에 속하는 기구다.
운영 자금 역시 투자를 받을 것이고. 그러니 훗날 중대본이 해소될 때 위생국은 아예 민간으로 독립할 수도 있다.
어디로 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재원은 내가 꼭 마련하겠소.”
“기대하리다.”
그러면 변승업을 다시 불러야 한다.
오늘 두 번이나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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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변승업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혹시 목욕치법에 대해서 알고 있나?”
“예……?”
“알고 있느냐고 물었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역시 똑똑한 사람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말을 줄일 수 있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말일세…….”
나는 허목과 논의한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변승업의 얼굴은 조금씩 경직됐다.
종국에는 아예 썩어버렸다.
그의 입에서는 아주 불필요한 답변이 터져 나왔다.
“대감. 무리입니다.”
늘 자신만만하게 사회생활을 잘하는 변승업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떨렸다.
이는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아니, 자네 설마 화났나?”
“아니, 소인이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무리라고 하나?”
“대감. 도성의 백성을 상대로 목욕치법을 행하려면 정말 엄청난 수량의 재료가 필요합니다. 소인이라고 할지라도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허. 그런가? 그렇군. 아니었나 보군.”
“아니라니요?”
“이 사람과 자네는 우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니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대, 대감. 우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라고 할지라도 너무 과합니다. 우리끼리라도 사정을 봐주십시오. 우리가 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남이 아니라 우리니까 사정을 봐주겠네. 그러나 내일부터 우리는 우리가 아닐 것이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대, 대감. 소인은 일전에 무려 4천 석을 내어드렸습니다. 한데, 어찌 이렇게 박대하십니까.”
‘무려’를 강조하며 말하는 변승업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정계 최고의 거물과의 끈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그럴 수는 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쉬지 않고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4천 석이라니?”
“예?”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구휼미가 4천 석이긴 한데, 자네가 아는 바가 있나?”
“아…….”
“혹시 일전에 자네가 옮겨왔다고 하여 공치사를 하는 건가?”
내 말을 들은 변승업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번지수 잘못 찾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의, 의원을 모집하고 약재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목욕치법이 진짜 부담스러운가 보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이대로 물러나면 앞으로 허목과의 관계가 가시밭길이 될 건 뻔했다.
상상도 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위생국의 수립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명백하게 강제로 돈을 뜯어내는 상황인데 투자자를 너무 몰아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회유하듯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이 사람은 자네와 계속 우리가 되고 싶네.”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사이에 큰 장벽이 있고 정해진 기한도 있고, 조건도 까다롭고…… 속이 상하는군요.”
“속상하지 말게. 우리끼리.”
“…….”
이래도 아무런 말이 없다.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진짜 강수를 던져야 할 때다.
“전하께서 자네의 일을 알고 있네.”
“예……?”
“이런. 실언했군. 우리 전하께서 자네의 일을 알고 계신다네.”
“!!!”
“이번에도 기어이 해낸다면 우리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건데?”
“우, 우리 전하라고 하셨습니까?”
“암. 하면 남의 전하겠나?”
변승업의 눈동자는 진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순간보다 많이 요동쳤다.
진짜 최고였다.
그러니까 ‘우리 전하’라는 말이 아주 제대로 먹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쐐기를 박을 때가 됐다.
“어떤가. 우리 전하의 어심에 스며들 의향이 있나?”
“스, 스며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그러나 거절한다면 크게 상심하실 것이네.”
“소, 소인이 어찌 우리 전하의 어심을 어지럽히겠습니까.”
“그렇지?”
“물론입니다.”
“아까 마음이 상했다고 하던데?”
“우리끼리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됐다.
이제 목욕치법은 집행할 수 있게 됐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변승업도 이대로 무조건 동의하지는 않았다.
“한데, 대감. 아무리 소인이라고 할지라도 재원을 하늘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
투자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투자를 요구할 수는 없다.
또, 굳이 이 말을 하는 걸 보니 대안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말하게. 다 집행할 것이니.”
“정말입니까?”
“내가 누군지 잊었나?”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서둘러 말하게. 궁금하군.”
“만일, 무역을 크게 확대할 수 있다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어……?
이런 말은 조금 당혹스러운데?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한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기도 했다.
지금 변승업은 10분 하던 무역을 20분으로 늘려달라는 게 아니었다.
아예 개방해달라는 수준이 분명했다.
자금의 조선이 전면적인 개방 무역을 도모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청나라 혹은 일본이라면 더 그렇다.
“송구합니다만 목욕치법의 재원을 확보하는 건 일회성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꾸준하게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자면 아무리 소인이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역길이 크고 활짝 열린다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습니까.”
너무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재벌이 대국민 의료 서비스를 하는 조건으로 무역 장벽을 허물어 달라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상당히 재밌는 내용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판을 제대로 키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해준다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줄 건가?”
“예? 목욕치법을 행하기 위한 방책을 청한 것입니다만.”
“그건 이미 하기로 했고.”
“…….”
“전면적인 개방 무역을 하면 자네 역시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를 확보하지 않겠나? 그러니 하나씩 더 주고받아야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청나라에서…….”
몸을 살짝 내밀면서 말했다.
“쌀을 구하고 싶네만.”
아주 많이.
변승업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