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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56화 (56/298)

56화 현대인과 송시열이 만났을 때(1)

화급을 다투는 장계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황해도에 우박이 쏟아지고 서리와 눈이 내렸는데, 황주에는 불이 나서 인가 60여 채가 소실되었고 사람과 마소가 타죽었습니다!”

“5~10명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데 모두 귀신 형상이며 사람의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

“행여 누군가 밥을 들고 있기라도 한다면 파리모기 떼처럼 모여들어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며, 떠돌이 걸객들은 업거나 안고 온 자식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도성의 지척인 경기의 실정입니다!”

아주 그냥 팔도 전역이 난리였다.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다발적으로 재해가 시작됐다.

……아니다. 재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워낙 재해가 흔한 시절이었기에 어지간한 내용은 보고조차 안 된 것이었다.

경상도 칠곡에서 눈이 내려 초목이 얼어 죽었다는 것 정도는 논의에 낄 정도도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하던 중대본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굳었다.

공기의 무게는 무거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장계에 적힌 글자가 전하는 참혹함은 단지 듣기만 하였음에도 고통스러울 수준이었다.

숨 쉬는 게 사치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언어를 꺼내는 것이 불순하다고 느껴질 수준이었고.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 침묵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 순간에도 백성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을 물리치기로 했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며 말했다.

“……지금 중대본이 해야 할 일은 기근으로 죽어갈 백성의 수를 단 한 명이라도 줄이는 것이오. 그리고 이미 발생한 기근을 대처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소. 결국 구휼미를 확보하는 것이외다.”

현재 상황은 삭주와는 달랐다.

천천히 구황 정책을 전하고 보급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물론 구황은 백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으나, 당장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삭주에서 큰 효과를 거둔 건 본격적으로 기근이 발생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집행한 결과였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이미 유랑을 시작한 백성을 상대로 구황을 전한다는 건 아주 기만적인 행위다.

그냥 약 올리고 싸우자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재 보고되는 수준을 고려할 때 구휼미는 족히 수만 석은 필요했다.

당장 이 많은 쌀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변승업의 투자금을 구휼미로 선회하는 것이었다.

위생도 중요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성부터 구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리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기근을 동반한 재해는 쉬지 않고 발생할 것이다.

그때마다 구휼미를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기근으로 사람이 죽어갈 때마다 노선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금 급하다고 쉽게 움직이면 필시 역병이 창궐하였을 때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그래. 이게 맞다.

구휼미는 구휼미고 위생은 위생이다.

그래.

구휼미는 구휼미고 위생은 위생인데…….

무언가가 내 속을 계속 간지럽힌다.

무엇이라고 딱 잡아서 표현할 수는 없으나 계속 속이 간지럽다.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무거웠고 답답했다.

“우선 불필요한 논란부터 차단하는 게 옳을 듯하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허적이 운을 띄웠다.

나의 시선은 그에게로 향했으나 속은 여전히 불편했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위생국을 운영하기로 한 변승업의 재원은 별개의 영역이외다. 기근은 기근만으로 끝나지 않고 필시 역병을 동반할 것이기에, 상황이 어렵더라도 위생의 일은 따로 대비하는 게 옳소. 모두 같은 생각이겠으나 이를 굳이 언급하는 건, 혹시라도 우리가 쉬운 길의 유혹에 흔들릴 것을 우려한 것이오.”

쉬운 길의 유혹이라고 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쉬운 길이었다.

단지 위생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위생 정책에 들어갈 재원으로 구휼미를 확보하자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참으로 무서운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평소에도 사대부들이 변승업을 겁박하여 재물을 갈취하는 세상인데, 국가적 재난이 닥친 상황이었으니 변승업에게 협조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결의만 모아낸다면 변승업으로부터 구휼미를 확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실상 초법적 기구인 중앙재해대책본부까지 수립된 상황이었으니 무엇을 못 하겠는가.

따르지 않으면 상단은 해체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다행인 건 허적은 이런 악수를 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허목 선생께서는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이를 시행해주시오.”

“물론이외다.”

나름의 결의로 논의가 시작됐다.

그런데도 나는 체한 듯 속이 너무 답답했다.

대체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중대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을 구해야 하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외다. 괜히 거창해졌소. 그저 쌀을 구하면 될 일이거늘.”

쌀……?

그래. 맞다.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바로 쌀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을 되새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되새겼다.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은 참으로 괴이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깨달았다.

현대인과 만난 송시열은 악마라는 걸.

속이 불편한 건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기 때문이 아니라, 송시열의 지식과 나의 자아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용트림한 것이었다.

그새 심각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말을 꺼냈다.

“호판.”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소. 다른 고민이 있소?”

“쌀을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하오.”

“당연한 말을 그토록 심각하게 하는 것도 대단하오.”

“당연한 일을 놓치고 있으니 하는 말이외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본론을 꺼내면 다들 기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위생국 집행을 미루지요.”

“……뭐요?”

“그 재원으로 쌀을 확보하는 게 옳소.”

“허. 본부장.”

“이보시오! 본부장!”

허적과 허목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특히 허목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이글거렸다.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당장이라도 집어 던질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기근은 반드시 역병으로 연결되오. 그러나 역병으로 죽는 백성의 수는 굶어 죽는 백성과 감히 비교할 수 없소. 가장 선행해야 하는 건 구휼미의 확보요. 위생국의 수립에 들 재원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것이외다.”

“본부장. 그런 식의 논리라면 중대본은 구휼미를 확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소.”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소이까.”

“가장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유일은 아니지요.”

“본부장. 무엇보다 이치를 앞세우시오. 민간의 상단에게 나라의 비극을 책임지라는 꼴이오. 그럴 거면 대체 중대본은 뭐 하러 수립하였소? 차라리 변승업을 불러서 논의하시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허목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게 있소.”

그래. 맞다.

허목의 말이 다 맞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내가 한 말이 미친 소리라는 걸.

조정의 역량이 아닌 상단의 재원으로 구휼미를 확보하자는 건 진짜 미친 소리가 분명했다.

현대국가에서 정부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재벌의 재산을 모조리 압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랬다가는 정부는 거센 역풍에 휘말려 식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아니다.

조선은 그럴 수 있다.

힘이 차고 넘친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다.

“정도는 백성의 삶이지요.”

나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본부장은 변승업이 양지로 올라오는 걸 우려하셨소. 만일 그가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확보한다면 어찌 감당할 것이오?”

이 말도 맞다.

위생국 투자자와 수만 석의 구휼미를 투척하는 건 아예 결이 다른 일이다.

변승업은 완벽하게 양지로 올라오게 될 것이다.

결과는……?

자고로 일개 상단주가 수천 석, 수만 석의 구휼미를 확보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만 볼 수 없다.

자고로 세상이 흉흉할수록 오만가지 마타도어가 성행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정감록 같은 거.

변승업이 민심을 얻고자 수작을 부린다고 모해하는 세력은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니, 그게 더 좋다.

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하면, 묻지요. 아직 조정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소. 재원은 그대로요. 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구휼미를 확보할 수 있소?”

“본부장. 원칙을 올곧게 세우지 않고 일을 추진하면 반드시 화가 미치게 되오. 변승업의 재원과 구휼미는 철저하게 분리해야 하오.”

“변승업에게 쌀을 갈취하자는 것이 아니외다. 위생국 수립에 필요한 수준의 쌀을 얻자는 것이오. 차후 중대본에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면 되오.”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태도를 보이자 허목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수염까지 덜덜 떨리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니 조만간 뭐라도 집어 던질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온화한 허적에게로 옮겼다.

“호판. 변승업은 내가 설득할 수 있소.”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소. 위생도 포기할 수 없을뿐더러, 상단은 상단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있소. 구휼미 수만 석은 무리요.”

“위생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잠시 미루자는 것이오. 그리고 변승업에게 책임의 무게를 부과하는 게 아니오. 다시 말해야 하오? 조정도 그에게 대가를 주면 되오.”

“……하면, 대안이 있소?”

“있소.”

“무엇이오?”

“강화도에는 10만 석의 쌀이 있소. 남한산성에도 해묵은 곡식이 있지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렇게 나올지는 몰랐다.

“강화도에는 10만 석의 쌀이 있소. 조정의 위기를 대비하여 저장해둔 것이지요. 이를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으나, 백성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는데 어찌 이대로 둘 수가 있겠소. 백성들이 다 죽으면 군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 어디 이뿐이오? 남한산성에도 해묵은 곡식이 있으니 어찌 사용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허적의 말대로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군량은 국가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비축한 군량이었다.

청과 사대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나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사이라는 것도 확실하였다.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원 역사가 아무리 틀어졌다고 할지라도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이 시절 조선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같은 거 말이다.

머리를 긁적였다.

수염도 한 가닥 잡아당겼다.

그래서 말했다.

“알겠소. 이번에는 내가 양보하리다.”

“……양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니오. 어차피 본부장의 의견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뭐.

상관없다.

일단 구휼미 10만 석은 확보했고, 의도치는 않았으나 내가 원하는 흐름으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하면, 위생국 수립은 원안대로 진행하면 되겠군요.”

“원래 그럴 생각이었소. 마치 혼자 결단한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오.”

허적의 힐난에도 나는 웃을 뿐이었다.

시작이 좋다.

진짜 이래서 사람들이 송시열을 욕하고 다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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