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현대인과 송시열이 만났을 때(2)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러니 사람은 어떤 길을 갈지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어떤 길을 선택할지라도 같은 결과가 나오거나, 다를지라도 모두 좋은 결과라면 어떨까?
심지어 결과가 이러하다는 걸 미리 알고 있다면 또 어떠할까?
세상사가 참으로 편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랬다.
정확하게는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대감. 찾으셨습니까?”
방구석에서 혼자 히죽거리고 있을 때 우리 변승업이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대감께서 자주 찾아주시니 참으로 기쁩니다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변승업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요즘 내가 과한 청을 많이 하기는 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더 맑고 밝게 웃었다.
“일전에 말한 위생국의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나?”
“대감. 며칠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응? 며칠이나 지난 게 아니고?”
“……이런. 소인이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며칠이나 지났기에 제법 성과가 있었습니다.”
“오. 성과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벌써 성과가 있다고 한다.
역시 변승업은 못하는 게 없다.
또, 상단주인지라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일이 진행될 것이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어찌 웃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여러 의원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또, 효용성이 있는 약재를 다양하게 확보하도록 지시를 내렸으니 어찌 오랜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하면, 아직 결심을 굳힌 의원은 없고, 확보한 약재도 없다는 것인가?”
“대감. 시작이 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그리고 청계천 인근에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였으니, 땔감이 넉넉하게 구해지는 즉시 목욕 정도는 시행할 수 있습니다.”
목욕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중대본에서 백성의 목욕까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럴 여력 자체가 아예 없다.
다만, 우리가 목욕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땔감의 사용을 보장해주는 건 가능하다.
조선 팔도의 산을 다 엎어서라도 말이다.
“혹시 더 속도를 낼 수 있겠나?”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탈이 날까 차분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탈이 나다니?”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의원이지 않습니까.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손을 잡았다가 위생국에 피해를 줄까 두렵습니다.”
“그건 허목 선생이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이런.”
“혹시 자네 허목 선생을 믿지 못하는 건가?”
“이런. 소인이 또 실언했습니다.”
변승업은 재빠르게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더 빠르고 더 크게 일을 진행하게. 구황의 일도 손보면 더 좋고.”
“오랜 세월 다져온 소인의 눈치로 볼 때, 대감께서는 지금 무언가를 도모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만.”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닐세. 그러나 확실한 건, 자네와 상단이 손해를 볼 일은 없으리라는 걸세.”
변승업의 눈동자가 요리조리 바쁘게 움직였다.
보고만 있어도 어지러웠다.
현기증까지 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응? 의외로 긍정적인 결론이 쉽게 나온 거 같군.”
“가장 선행된 건 대감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변승업은 넉살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소인과 상단의 역량이 중대본에 꼭 필요함을 명확하게 각인시키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역시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혹시 그다음도 아나?”
“소인이 굳이 알아야 합니까?”
“끌. 그건 아닐세. 하면, 조기에 집행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최단기간에 최대 규모로 일을 펼치겠습니다.”
“훌륭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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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서책을 넘기던 이연의 손이 굳어지듯 멈췄다.
그대로 고개를 움직였고 허적을 바라봤다.
“호판. 지금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사용하겠다고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우리 조선이 청과 군신 관계를 수립하고 사대의 예를 다하고 있으나, 전란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오. 작금의 재해가 심히 어지럽다고는 하더라도 과거 계갑년의 대기근에는 미치지 못하오. 그러한데 변고에 대비해야 할 군량을 사용하겠다? 심히 당혹스럽소.”
계갑대기근은 계사년과 갑오년을 기근을 말한다.
이때의 기근은 임진왜란과 맞먹는 수준의 재앙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절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아예 살아 있는 사람을 도살하는 수준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러하니 이연의 지적은 타당하였다.
자금의 재해를 아무리 위협적으로 바라보더라도 계갑년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군량을 사용하자고 하니 어찌 의아하지 않겠는가.
허적은 예상했다는 듯 잠시 숨을 고르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신이 어찌 작금의 재해를 계갑년의 참혹함과 비교하겠사옵니까. 그런데도 군량의 사용을 청한 건 그리 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 답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소만.”
“전하. 신이 내일을 내다볼 수는 없기에 장담할 수는 없으나, 조선의 재해는 이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렇게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러하옵니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재해는 강약을 반복하였사옵니다. 작금의 재해가 ‘약’이라고 한다면, 머지않아 계갑년의 재앙과 준하는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작금의 재해가 계갑년과 비교할 수 없을지라도 절대 가벼운 성질은 아니었다.
현재 수준의 재해를 방비하는 것도 조선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이럴 때 계갑년 수준의 재앙이 다시 시작된다면 조선의 숨통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이연은 서서히 서책을 덮으며 허적은 지그시 쳐다봤다.
“가능성이 작을수록 군량을 사용할 수 없소. 반면, 가능성이 크면 그럴수록 군량을 더 비축하는 게 현명한 방책이라고 생각하오만.”
“가능성이 작다면 그대로 좋은 일이옵니다. 하온데 전하. 만일 기어이 계갑년의 재앙이 다시 일어난다면 조정이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비축한 군량만이 아니라 훈련도감을 해산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사옵니다. 하여, 신은 우리 조정이 조기에 과감한 정치적 행보를 밟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이연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깨우쳤다.
“재앙이 도래하였을 때 우리 사대부가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시발점을 만들자는 뜻이구려.”
“그러하옵니다. 시작부터 우리 조정이 총력으로 대응한다면, 훗날 일어날 사대부의 의기가 어찌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행여 반대할지라도, 지금 여론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혼란의 시기에 혼란을 더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고.”
“그러하옵니다.”
내정가로서 역량이 탁월하여 가려졌을 뿐 허적은 남인의 영수였다.
그가 이끄는 남인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진 서인과 팽팽한 전선을 구축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하니 이 정도의 정치력은 당연했다.
재해에 대처하는 정치는 참으로 대범했다.
이연은 엷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할 일은 해야 했다.
“한데, 한 가지가 부족하오.”
“이르시옵소서.”
“10만 석의 군량을 사용할지라도 다시 구해야 하지 않소이까.”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다.
재해라는 엄중한 상황과 맞이하였기에 임시로 사용할 뿐, 군량은 다시 확보해야 한다.
이연은 말을 보태듯 꺼냈다.
“전란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군량은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것이오. 나의 선택이 선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소.”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해서 하는 말이외다. 나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승부수는 피하고 싶소만.”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쇄염법이옵니다. 조선의 염전에 쇄염법을 집행한다면 필시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자연스럽게 말을 보탰다.
“물론 쇄염법으로 확보할 재원 역시 재해 극복에 먼저 사용할 것이옵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내가 손해군요.”
짓궂게 웃으며 말하는 이연을 바라보는 허적의 입가에는 신뢰의 미소가 가득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작금의 조선을 이끄는 군왕은 백성의 삶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타협도 없다는 걸.
그러하니 지금의 제안은 그저 통치의 일환일 뿐이다.
하면, 신하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
허적은 최고의 자신감을 보이면서 말했다.
“전하. 군량 10만 석은 신이 반드시 확보할 것이옵니다. 부디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하하하. 이토록 자신감이 넘치는데 어찌 반대할 수 있겠소이까.”
이연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군량 10만 석. 모두 가져가서 사용하도록 하시오. 한 톨도 남기지 말고 구휼미로 집행하시오. 이는 지엄한 어명이외다.”
“만백성이 천세를 연호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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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이 내려왔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군량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반응이 나와야 한다.
변고를 대비해야 할 군량이기에 불가하다고 하거나,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둘 중 뭐라도 나올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조금 피곤할지라도 전자가 더 좋긴 하다.
뭐. 후자도 상관없다. 효과는 조금 덜하더라도 쉽게 쉽게 갈 수 있으니까.
뒷짐을 쥐고 편안하게 산책했다.
관리들이 군량의 사용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
국방의 일은 한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시절 조선은 어떠한 전란에 휩싸이지 않는다. 전란보다 끔찍한 경신 대기근을 맞이할 뿐이다.
원 역사를 알고 있는 내게 비축 군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귀한 쌀을 먹지도 않고 쌓아둘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군비도 대폭 축소하여 재해 극복에 사용하고 싶을 정도였다.
전쟁은 정말 없으니까.
물론, 작금의 조선이 최소한의 방비를 하고 있기에 원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딱 까놓고 조선 땅이 무정부 상태가 되지 않는 이상 청이 국경을 넘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 넓은 중원을 지배하는 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고작 삼천리에 불과한 금수강산을 탐하겠는가.
국방의 일은 재해를 극복한 뒤에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
물론 관리들에게 나는 미래인이라고 커밍아웃할 수는 없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고.
또, 솔직히 나는 관리들이 반대하길 바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논파해야 한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관련한 일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만일, 청은 주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대청 무역의 전면 시행은 순식간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상업에 대한 여러 문제 제기는 변승업의 역할론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반대하지 않으면……?
이 경우는 정말 애매해진다.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청나라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스운 꼴이 어디 있겠는가.
또 이럴 때 대청 무역을 쉽사리 언급했다가는 거대한 역풍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해결할 방도가 있다.
즉 어떠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무역의 확대로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편안했다.
너무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과연 관리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대됐다.
저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나는 긴장하며 관리들의 구호를 기다렸다.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흐름으로 일이 흘러갔다.
눈만 껌뻑이며 저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황 정책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언급했던 것이 용관(冗官, 중요하지 않은 벼슬)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용관도 없애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국록을 먹는 신들은 어떠하겠사옵니까. 신들의 녹봉만 줄여도 수십, 수백 명의 굶주린 백성을 살릴 수 있사옵니다. 하여,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부디 신들의 녹봉을 감액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감히 조선을 썩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했던가.
적어도 이 순간 내 눈앞에 있는 저들은 오직 의기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대부였다.
가슴이 뭉클해졌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