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현대인과 송시열이 만났을 때(3)
이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턱을 괴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관리들의 상소와 연좌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파악한 허적은 몸을 더 낮췄다.
군왕이 괜한 곳에 노여움을 표출한 적은 없으나 어심이 불편하다는 건 그 자체로도 황망하였으니, 눈치를 살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제아무리 허적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녹봉의 삭감을 청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연좌를 진행한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비축한 군량은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기에 녹봉을 삭감하여 구휼을 집행하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하…….”
이연은 실소를 머금었다.
이는 참으로 불쾌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조정은 관리의 녹봉을 감당하지 못하였소.”
“전하.”
“전란과 재해로 국토는 황폐화하고, 국고는 텅텅 비었소. 이에 조정의 대신들은 녹봉의 삭감을 늘 주장하였지요. 이를테면 호판처럼 말이오.”
“전하. 신은 한순간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사옵니다.”
“알고 있소. 어찌 호판의 진심을 오해하겠소이까. 그러나 알고 있을 것이외다. 이 모든 건 결국 군주를 정점으로 한 기존의 질서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명확하게 드러내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되었다는 걸.”
“전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망극한 하교를 하시옵니까.”
“호판이 당대 최고의 내정가라고 할지라도, 손에 꼽히는 성리학자라고 할지라도 절대 알 수 없소. 관리의 녹봉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할 때 군왕이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쏟아지는 회한에 허적은 황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관리의 녹봉 삭감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조금 전에 한 말처럼 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저 조선의 국고를 걱정하여 나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버텼을 군왕의 외로움이 이토록 거대하였을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허적은 감상에 빠질 만큼 정치적 신념이 얕지 않았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들의 연좌 역시 조선을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애초 비축 군량을 구휼에 사용하는 것 역시 우리 사대부의 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판단도 크게 고려되었사옵니다. 하온데 전하. 지금 우리 사대부들이 분연히 일어나 제 녹봉의 삭감을 스스로 청하고 있사옵니다. 의기가 이토록 높은데 어찌 준비 태세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해서, 저들의 청을 들어주자는 것이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사옵니까.”
“불가하오.”
“전하.”
허적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묻어났다.
반면, 이연은 손을 내저으며 불필요한 감정을 밀어냈다.
“경은 이 나라 조선의 왕실이 어디까지 무능해지기를 바라시오?”
“전하. 신이 어찌 그런 망극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사옵니까.”
“다시 말해야 하오? 관리의 녹봉은 군왕이 반드시 책임져야 할 사안이오. 계갑년의 재앙이 도래한 것도 아니며, 변란으로 천도를 한 것도 아니오. 한데, 관리들의 곳간에 손을 대는 군왕은 대체 얼마나 무능력한 것이오? 나는 동의할 수 없소.”
이연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허적은 난처함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더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소. 즉시 비답을 내려 연좌를 해산토록 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그때였다.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중대본 본부장 송시열이 연좌를 지켜보고 있었사옵니다.”
“본부장 송시열이……?”
“그러하옵니다.”
이연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쩌면 굳이 비답을 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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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비축한 군량의 사용을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명분과 논리는 오직 한 가지, 청나라에 대한 불신이라고 판단했다.
“전하. 나라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국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임진년과 병자년의 참화를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비축한 군량은 이 나라 조선의 국격을 유지하는 버팀목이옵니다.”
“과거 병자년에 군량이 넉넉하였다면 어찌 그토록 참담한 일이 발생하였겠사옵니까.”
……
“전하! 신들의 녹봉으로 구휼을 집행하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신들의 녹봉이 부족하다면 사재라도 비우겠사옵니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군량만은 아니 되옵니다!”
어쩌면 청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여전히 청에 대한 적개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또, 아직도 청을 미개한 오랑캐로 바라볼 수도 있다.
고작 오랑캐에 불과한 청이 중원의 주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가 여기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 필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시작이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진 반청주의라고 할지라도 나는 비웃을 수 없었다.
저들이 내놓은 정치적 대안은 살신성인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나의 하찮은 세 치 혀로 어찌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만 그 자체다.
다만, 조금은 의아한 것이 있었다.
저들의 행위가 아름답고 눈부시긴 한데, 너무 대뜸 튀어나왔다.
무릇 모든 정치적 행위에는 기승전결이 존재해야 하는 법이다.
그간 조정에서 관리의 녹봉을 삭감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호조판서 허적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거대한 함의(含意)는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의아했다.
그나저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내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건 대청 무역의 확대다.
그러자면 뿌리 깊은 반청 감정이 폭발해야 하는데, 지금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이미 변승업은 일을 크게 진행하고 있을 것인데 나는 발목 잡힌 상황이 됐다.
고민하며 슬쩍 쳐다봤는데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짐작되는 나이는 대충 서른 살 정도였다.
복색을 보아하니 하급 관리가 분명한데 너무 눈에 띄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구호의 선창을 하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다.
딱 그때 그가 숨을 고르고자 잠시 쉬다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
“…….”
아니, 그런데 건방지게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찰나였지만 거의 오만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심한 욕을 할 뻔했다.
그래도 사회적 위치라는 게 있기에 연좌하는 관리를 타박할 수는 없다.
다음을 기약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이놈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서 걸어오지 않겠는가.
심지어 눈빛도 예사롭지 않다.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딱 봐도 내가 연장자인데?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릴 때 이미 다가온 그놈이 입을 열었다.
“대감.”
아니, 내가 대감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황당해서 눈을 껌뻑이며 쳐다봤다.
“중대본에서 비축 군량의 사용을 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어불성설입니다.”
“어불성설?”
“되었습니다. 어쨌든 소직들이 대안을 제시하였으니 물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주상 전하께서 어명을 내리셨네. 내가 어찌 감히 나설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불성설입니다.”
“뭐……?”
“되었습니다. 대감의 실수인데 어찌 책임을 회피하시는 겁니까.”
“실수 아니고 책임도 회피하지 않았네.”
“대감께서 중대본의 본부장이십니다. 한데, 모르쇠로 일관하시니 회피하는 것이지요. 또한, 비축 군량을 사용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재해이거늘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셨으니 명백한 실수이고요. 물론 대감께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으나,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이 정도면 중대본의 간부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언변이었다.
네 가지가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도 지금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일단 잘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본부장이지만 구체적인 실무는 호조판서의 권한일세. 또한…….”
“아니, 지금 남 탓을 하시는 겁니까? 백주에? 이토록 많은 이가 보고 있는데요?”
……속에서 치솟는 이 똥 같은 기분은 대체 뭘까?
조선에 온 이래 지금처럼 기분이 더러운 건 또 처음이었다.
그래. 맞다.
세상은 이런 감정을 분노라고 한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정태화와 잔소리가 많은 송준길도 이 정도로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젊은 놈이 하는 몇 마디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압니다. 대감께서는 우리의 연좌도 못마땅할 겁니다.”
“…….”
“대감께서는 녹봉의 감액을 늘 반대했으니까요.”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제 와서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수십 명의 관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녹봉의 삭감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참으로 눈부신 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의기로만 지탱할 수 없다.
또한 시대가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의기가 아니었다.
의기(意氣).
참으로 고귀한 가치다.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권신의 횡포로 조정이 흔들릴 때 의기로 충만한 이들의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한다.
또한, 강대한 외적의 침략으로 국운이 위태롭다면 의기로써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권신의 횡포나 외적의 침략으로 국운이 위태로운 시절이 아니다.
그래서 의기는 그저 의기일 뿐이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의기 충만한 젊은이들을 바라봤다.
뭐. 이해할 수 있다.
젊다는 건 정의를 마음껏 외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또 젊은이가 정의를 말하지 않는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숨을 잠시 내쉬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연좌를 잠시 중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황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연좌는 주상 전하께 고하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중대본의 본부장이라고 하실지라도 이리하실 수는 없습니다.”
“예. 더는 소직들을 탄압하지 마십시오.”
단체로 정색하며 내게 따진다.
내가 송시열인데 이렇게 나온다.
그리고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러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만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관리들은 움찔하더니 일제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꼴을 보니 더 열받았다.
하지만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자네들을 탄압하는 게 아닐세.”
“연좌를 중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탄압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진짜 탄압해줄까?”
“기어이 겁박하십니까?”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눈 하나 꼼짝 안 하고 개긴다.
너무 황당해서 이름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소직을 조직적으로 탄압하시려는 의도입니까?”
“……자네 실성했나?”
“외람되지만 소직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와.
조선에서 이런 용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주먹에 힘을 꽉 주며 한 번 더 물었다.
빙그레 웃으면서.
“참으로 건방지군.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임에도 이를 탓하지 않고 물었거늘 감히…….”
사실 내 말이 너무 맞았다.
이 시절 예의라는 건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다.
심지어 내가 송시열인데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한다는 진짜 미친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대체 얼마나 엄청난 이름인지 궁금했다.
어느 정도이길래 내가 송시열인데 이렇게 덤비는 건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소직 박세당이라고 합니다.”
“응?”
“예.”
……개길 만했구나.
설마 훗날 송시열을 대차게 까고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을 간 박세당이었다니.
이렇게 보니 젊을 때부터 남다른 존재감이다.
그나저나 내 앞에서 버티는 놈이 박세당이라면 좋게 말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고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완숙해지는 법이다.
바꿔 말해서 젊을수록 혈기를 주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박세당은 노년에 송시열을 대차게 깐 인물이다.
젊은 박세당이라면 더 미친놈처럼 내게 덤빌 것이다.
관복에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도 않고.
특히 지금처럼 의기라는 명분까지 가지고 있으면 더 그럴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웃음을 거뒀다.
“철없는 행동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중대본의 대신들이 너희보다 의기가 부족하고 천하의 정세를 읽지 못하였기에 비축 군량의 사용을 결정하였으며, 주상 전하께서는 이를 윤허하셨나?”
논리를 집어치우고 권위로 찍어 눌렀다.
단지 대신들만 거론한 게 아니라 무려 군왕까지 언급했다.
박세당이 아무리 대차더라도 이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과연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너희는 의롭다. 백성을 위하여 녹봉을 포기하는 너희가 의롭지 않으면 누구를 의롭다고 하겠느냐. 하지만, 너희의 연좌는 단지 의로울 뿐이다.”
“그것이 어찌하여 문제라는 것입니까. 의기로 일어선 소직들은 부족할지라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 세상만사가 의로움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더냐? 의기로만 말끔하게 세울 수 있다면 난세는 어찌하여 생기겠느냐? 정치의 매정함에 의로움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행동은 참으로 설익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토록 소직들의 의기를 비웃으시는 겁니까?”
“너희의 말대로 나는 녹봉의 감액을 반대했다. 오히려 증액하길 바랐지. 반대로 호조판서 허적은 녹봉의 감액을 원하였고. 한데, 보라. 재해로 만백성이 고통받는데 호조에서는 녹봉의 삭감을 언급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그러한지 아느냐?”
칼을 휘두르듯 말했다.
박세당은 멈칫하더니 쉽사리 답변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아니, 제안했다.
“연좌를 이어가기 전에 나와 쟁의(爭議)를 해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