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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60화 (60/298)

60화 현대인과 송시열이 만났을 때(5)

장엄하다.

씩씩하고 웅장하며 위엄있고 엄숙함을 이른다.

지금이 딱 그랬다.

태조의 거룩한 뜻을 전하자 박세당과 관리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또, 녹봉 삭감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이제 완벽하게 사장됐다.

사대부의 생계를 알뜰하게 챙겼던 태조의 위대함을 역설하였거늘, 누가 감히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자고로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하는 사람은 있어도, 죽고 싶어서 간을 배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

예상과는 다른 흐름에 당황하였으나, 결론만 놓고 보면 일이 더 잘 풀리게 되었다.

나는 흐뭇함을 참을 수가 없었기에 엷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차근하게 말을 꺼냈다.

“열의는 추상적이다. 하면, 이를 어찌 구현할 것인가.”

운을 띄우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불편함만 느껴지던 시선이었으나 이제는 신뢰가 느껴졌다.

뭐…… 신뢰까지는 아닐지라도 아무튼 그러했다.

어쨌든 그 덕에 엷은 미소는 너무나도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시선을 집중시켰으니 말을 슬쩍 돌렸다.

“재해가 두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네. 혹시 아는가?”

“기근과 역병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하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역병을 방비하자면 위생정책을 크게 일으켜야 하며, 역병이 창궐하면 의원이 활약해야 하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중대본의 허목 선생이 이미 위생국의 국장에 나섰으니, 어찌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지금 이미 집행이 결정되고 모두가 찬성하는 위생정책을 말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핵심은 따로 있다.

목을 조금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남은 건 기근일세. 기근은 늘 무수한 백성의 목숨을 앗아갔네. 또한, 기근을 확산하면 역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근을 막을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네.”

“허. 대체 어떤 신묘한 방책이 있으시기에 기근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하십니까.”

“왜 간단하지 않나? 쌀이 있으면 기근은 아무런 힘을 낼 수가 없거늘.”

너무나도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일까?

좌중은 황당함을 동반한 침묵에 빠졌다.

물론,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박세당과 관리들을 질책하듯 말을 이었다.

“열의를 입증하고 싶지 않은가?”

“…….”

“밤을 지새우고, 끼니조차 거르며 부지런히 일한다고 하여 열의가 입증되는 것이 아닐세. 구체적인 실적이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열의가 만발한 조정이 이뤄지는 것이네. 개국 초 열의가 천하를 뒤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사대부들이 누구도 하지 못한 개혁을 무수히 이뤄냈기 때문일세. 이를 실력이라고 하는 것이네.”

“…….”

“나는 우리가 그 옛날의 사대부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우리 역시 열의가 만발한 조선을 일궈 낼 수 있다고 믿고 있네.”

여전히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말이 개국 초의 열의며 당시의 사대부다.

그들은 난세를 끝장내고 기어이 창업을 일궈낸 위정자들이다.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가오는 경신 대기근과 진하게 한판 붙어보려면 우리 사대부들도 개국공신의 수준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열심히 선동했다.

“어떠한 기근이 도래하여도 백성이 굶지 않을 수량의 쌀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목표일세.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렵지 않네. 쌀을 확보할 수 있는 여러 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것일세. 이미 중대본에서는 쇄염법을 관철하고 양잠을 모든 군현에 권장하기로 했네. 자네들 중 누군가는 이를 거들어야 할 것이네.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좋은 정책을 찾아내야겠지.”

좌중은 고요해졌다.

반면, 점차 내 목소리는 커졌다.

“어떤 것이라도 괜찮네. 무엇이라도 제안하게.”

“…….”

내 목소리가 커질수록 고요함도 커졌다.

괴이한 비례였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나의 선동이 아주 시의적절하게 먹히고 있다는 걸.

그래서 쓱 던지듯 나의 본론을 꺼냈다.

“정책이 어렵다면 타국의 쌀이라도 구해올 방도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눈치를 살피며 보태듯이 슬쩍 말했다.

“기근이 허덕이는 우리 조선의 백성을 구할 수만 있다면 군량이면 어떠하고, 청의 쌀이면 어떠하며, 왜인의 쌀이면 어떠하겠나.”

핵심을 정확하게 말했다.

눈치 빠른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천하에 존재하는 쌀을 확보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찾아내게.”

“…….”

“자네들은 오직 열의를 보이게. 발생하는 우리 중대본이 최고의 성과로 화답할 것이니. 또한, 발생하는 모든 문제도 중대본이 책임질 것이야. 그리고 다시 언급하지만, 녹봉의 삭감은 없을 것이네.”

모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녹봉은 인상될 것이네.”

“!!!”

모든 관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뜩이나 쌀이 부족한데 녹봉을 인상한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 대감. 그리하면 조정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은 오직 열의를 보이라고. 젊은이들의 열의에 노인들이 성심껏 화답하는 게 인지상정일세.”

“하, 하지만…….”

“인상되는 녹봉만큼 자네들의 어깨도 무거워질 것이네.”

“…….”

“조선의 관리가 만백성을 챙길 때, 조정은 관리가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굶지는 않도록 해야 할 것이네. 이는 태조께서 조선을 창업하실 때 아로새긴 원칙일세.”

덧붙였다.

“조선은 이러한 나라일세. 모두 뼈에 새기도록.”

답변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박세당과 관리들의 눈가가 붉어진 것으로 이미 답을 들은 것이니 말이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아주 보람찬 하루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이런 능력이 생겼겠는가.

이건 모두 송시열의 자아가 현대인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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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퇴궐하면 좋겠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사고를 제대로 쳤으니 최종결정권자를 꼭 만나야 했다.

그러니까 이연 말이다.

탈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였으나 조금 긴장은 됐다.

그런데 이연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경은 정말 간이 크오.”

“황공하옵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움직이며 나를 쳐다본다.

왜 그러는지 능히 짐작됐다.

“천만다행으로 신의 간은 배 속에 있사옵니다.”

“배 속에 있어도 그 정도인데 나오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소.”

“간이 배 밖으로 나오면 죽사옵니다.”

“그래서 한 말이오. 죽기를 각오하였소?”

적당한 농을 던졌더니 칼을 휘두른다.

물론 이연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중대본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사옵니다. 만일 신이 용상의 권능에 해를 끼쳤다면 엄히 벌하여주시옵소서.”

“하하하. 녹봉을 인상하는 것이 중대본의 권한이었소? 참으로 대범하오. 이 나라 조선이 창업된 이후 이토록 대범한 신하는 없었소. 태조 시절 정도전도 이리했을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중대본의 일을 효과적으로 일구고자 행한 일이옵니다.”

“구휼미를 확보하기도 어렵거늘, 더 사용하는 게 중대본의 일이었소?”

“조선에서 구휼미를 구하기 어렵다면 나라 밖에서 구해오면 될 일이옵니다.”

은근슬쩍 속내를 보였다.

그러자 이연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선의 쌀을 아예 바닥까지 사용할 생각이오? 그것도 조기에?”

진짜 귀신이다.

정말 소름 끼칠 정도다.

내가 방금 한 말로 파악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상황을 정확하게 읽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실실 웃고만 있지.

하긴 이 정도 정치력이 있으니 그토록 첨예한 예송논쟁의 시절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정을 단속했겠지만.

또, 내가 여기서 본 이연은 정말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으나 강력하게 옥좨올 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런데 절대 피를 보지는 않는다.

그저 제압할 뿐이었다.

보면서도 기가 막힐 정도로 유려한 정치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신은 조선의 쌀을 최대한 빠르게 고갈시킬 것이옵니다.”

“이런 신하를 보았나. 혹시 내가 윤허하지 않으면 어쩔 것이오?”

“신을 벌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윤허하셨다고 여기옵니다만.”

“참으로 고약한 신하로다.”

“또한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무릇 다다익선이 아니겠사옵니까.”

“다다익선이라.”

“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옵니다.”

이연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느새 웃음기를 거두며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였다.

이럴 때는 나도 분위기 파악 제대로 해야 한다.

배에 힘주고, 어깨 펴고, 자세를 확실하게 바로잡았다.

“그 다다익선. 자신 있소?”

“오만하게 보실 수도 있겠으나, 하늘 아래 신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전하뿐이옵니다. 또한, 신이 자신 없는 건 오직 전하의 반대를 뚫는 것이옵니다. 어찌 실패를 염두에 두겠사옵니까.”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오.”

이연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중앙재해본부장 송시열.”

“예. 전하.”

“반드시 천하의 모든 쌀을 이 땅으로 가져와야 할 것이오.”

“신 중앙재해본부장 송시열. 죽기를 각오하고 어명을 수행할 것이옵니다.”

“윤허하오.”

됐다.

큰 산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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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이 동의했으니 걸림돌은 없다.

기분 좋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궐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올라왔다.

으슬으슬 한 것이 마구마구 떨렸다.

급기야 살기까지 느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괴이한 기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

허적이었다.

진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보고 있노라면 서너 대는 맞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진짜 아차차였다.

내가 흥분해서 이 사람을 잊었다.

이는 정말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뒤통수를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호판.”

“……실성하셨소?”

“아…….”

“실성하셨냐고 물었소.”

“……아마도 그런 것 같소.”

“하!”

깜짝이야.

나는 세탁기에서 막 나온 빨래처럼 쭈글쭈글해졌다.

다 떠나서 이건 내가 허적한테 잘못한 게 맞고, 백번 사죄하는 것도 맞고, 욕을 들을 만했고…….

됐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화살은 떠나고 말았는데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녹봉을 인상하겠노라 선언하셨소?”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내가 실성하여서…….”

“본부장!”

“험험.

“1만 석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여…….”

“본부장!”

허적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 같았다.

지나가던 관리나 내관, 궁녀들이 은근슬쩍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부끄러웠기에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허적이 나의 사지를 찢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부끄러움과 목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목숨이다.

그냥 참아야 했다.

“1만 석이 하늘에서 떨어지오? 그리고 내가 녹봉 삭감에 반대한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오?”

“……그건 상황이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소. 진심으로 사죄하리다.”

“하!”

더는 곤란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치트키를 꺼내기로 했다.

“그런데 호판. 전하께서 윤허하셨소.”

“!!!”

“의도한 건 아니었소. 그저 실성하여서 그런 것이니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오.”

미안하오.

사실 일부러 그런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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