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국고를 탕진하라(1)
궐 안팎은 어수선했다.
불과 하루 사이에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 보고 들은 이가 워낙 많았기에 호사가의 정보와 도움이 없어도 두세 명만 모이면 쉬지 않고 떠들었다.
-들었나? 녹봉을 인상한다는군.
-암. 우암 대감이 정치 생명을 걸고 약조했다는군.
-호판 대감이 노발대발하셨네.
-오. 흥미롭군. 누가 이겼나?
-백주에 내관과 궁녀 그리고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삿대질까지 하셨다는군.
-누가? 우암 대감이?
-아니. 호판 대감이.
-허. 우암 대감이 죽을 때가 됐나?
-그건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우암 대감이 일방적으로 당했어.
-어쨌거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암. 우암 대감은 혼이 좀 날 필요가 있어.
-그건 참으로 지당한 말일세.
대충 이러했다.
이렇게 발 없는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소문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중대본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호조판서 허적은 숨을 크게 내쉬면서 문서를 내밀었다.
중대본의 대신들은 말없이 문서를 갈무리하며 천천히 살폈다.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비축 군량 10만 석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소. 통상 1인당 1끼는 1승(升)이오. 하루 두 끼를 먹으니 사람 한 명당 2승의 식량이 소모되오. 즉, 10만 석은 최소 2만 명의 1년 식량이오.”
현재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2만 명을 1년 동안 부양할 수 있는 식량이라면 작금의 위기를 무난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대본의 첫 번째 실무는 아주 성공적이었는데도 분위기는 어두웠다.
허적은 좌우를 살피다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본부장은 올 생각이 없으니…….”
그랬다.
중대본의 본부장인 송시열이 회의에 불참했다.
물론, 전체적인 실무는 허적이 담당하고 있기에 송시열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또, 허적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송시열이 회의에 불참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문제는 오늘 불참한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하다는 것이었고, 그 사실 때문이라도 그는 오늘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하. 1만 석을 대체 어디서 구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소.”
그랬다.
송시열은 녹봉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한 뒤 대안도 마련하지 않고 사라졌다.
허적의 화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음. 호판.”
송준길이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을 꺼냈다.
“사실 녹봉 인상분 1만 석 정도를 저축해도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 않소이까. 현재 호조의 재정도 별문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소. 그러니 일단 녹봉 인상을 원안대로 추진하면 어떻겠소?”
“누가 그러오?”
허적은 송준길을 빤히 쳐다봤다.
송준길조차도 움찔할 정도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호조판서인데 대체 누가 호조의 재정에 문제가 없다고 하오?”
“아. 그게 아니라 나도 여러 갈래로 파악해본 결과였소.”
“그 정보가 나보다 정확하오?”
“하하하. 그건 아니지요. 다만, 꼭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분석도 있더라는 것이지요.”
“하!”
유들유들한 송준길의 말을 듣던 허적은 결국 화를 참지 못했다.
입술까지 파르르 떨렸다.
“잘 들으시오. 정1품은 쌀과 콩을 각각 2석씩 더하고, 종1품 이하에서 종9품까지는 쌀과 콩을 1석씩 추가 지급해야 하오. 이렇게 1년간 추가되는 쌀과 콩이 1만 석이오. 한 번이 아니라 매년 1만 석이 추가로 필요하오.”
“…….”
“대사헌이 파악한 정보대로 올해는 지급할 수 있소. 한데, 내년에는 어찌할 것이오? 지금의 수준으로는 차후 매년 지급할 녹봉이 쌀 2천 석, 콩 2만 5천 석 정도 부족하게 되오. 혹시라도 다른 물품으로 대체하자는 말은 집어치우시오.”
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까?
이제는 눈썹까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송준길은 굴하지 않았다.
“목면, 정포, 면주가 비축되어 있지 않소이까.”
“하! 잘 들으시오. 1년 4등을 기준으로 면주와 목면이 440동 16필이 필요하오. 여름에는 마포로 면주를 대신하고 가을에는 상황에 따라 목면으로만 지급할지라도 매년 면주 2,752필, 목면 2,752필이 소요되오. 이걸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대체 그런 건 어찌 외우고 다니시오?”
“일국의 호조판서에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허적의 얼굴은 뻘게졌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덕에 중대본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험험. 호판. 그나저나 왜 이리 화가 많아지셨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이외다.”
누가 봐도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뭐라고 하겠는가.
되돌아보면 언제부터였을까.
허적은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늘 유화적으로 조정의 화합을 유도하여 대표적인 온건파로 분류되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화가 많아졌다.
정확하게는 굉장히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 또한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호조의 관원들이 허적을 평가하는 걸 들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호판 대감의 인품은 조선 제일이시지.
-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네. 다만…….
-됐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끙. 평소 그토록 부드러우신데 실무에 임하실 때는 아예 다른 분이 탈바꿈하시니.
-휴.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경을 치시니,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네.
-저승사자가 따로 없지.
그랬다.
개인 허적과 호조판서 허적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허적은 조정의 화합을 유도하는 남인의 영수가 아니라, 중대본의 실무를 책임지는 관리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보이는 중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화가 많아졌다고 조심스레 유추할 수가 있었다.
“꼭 백호와 대화를 하는 것 같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아니, 가만히 있는 소생은 왜 거론하십니까?”
허적과 윤휴가 동시에 발끈했다.
송준길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대사헌. 결론을 말하리까? 1만 석이면 2천 명의 백성을 1년간 부양할 수 있소. 이 귀한 쌀을 결국 허공에 내던지게 생겼소.”
“아.”
“대체 어떤 정보원을 두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인연을 끊으시오. 한 치 앞도 내다볼지 모르는 인사가 분명하오!”
“…….”
“기어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사헌께서 대안을 수립하시오!”
이쯤 되면 질서 있는 퇴각이 필요했다.
송준길은 재빨리 백기를 들었다.
“아니, 우암은 감당도 할 수 없는 일을 왜 저지른 것인지 모르겠소. 답답하오. 참으로 답답하오.”
“아니외다.”
“무슨 말씀이시오?”
“대사헌께서 적당한 방책을 하나 마련하시오.”
“아니, 나는 백호와 함께 양잠을 담당하지 않았소이까.”
“같은 서인이니 책임지시오.”
“……다 같이 화합하여 중대본을 수립하였거늘 어찌 당색을 나누시오?”
“그냥 그러고 싶소.”
“…….”
할 말은 많았으나 일단 지금은 방책이 없었다.
송준길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면, 미촌과 함께하리다.”
“음.”
“아, 아니. 대감…….”
허적이 고민하고, 윤선거는 당황하여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러자 송준길은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미촌도 서인이외다.”
“아, 아니…….”
“좋소.”
소심한 윤선거는 항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허적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고.
------
언제 봐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내게는 변승업이 그러했다.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방망이도 부럽지 않았다.
변승업의 곳간은 너무나도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심지어 곳간의 주인인 변승업이 사회생활도 너무 잘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음. 대감. 근래 소인을 너무 자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그래서 불편한가?”
“너무나도 행복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역시 자네는 탁월하군.”
“대감의 사가로 오는 길이 너무나도 설렜지요.”
“큭…….”
감탄이 절로 처세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관리의 녹봉이 인상되었다는 말은 들었나?”
“인상이 추진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새 인상이 됐군요.”
“이미 주상전하께서 윤허하셨네. 물론, 반발이 있을 수도 있으나 호조에서도 수긍하는 분위기이니 큰 탈 없이 진행될 것이야.”
“음. 소인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족히 1만 석은 추가로 필요할 겁니다. 조정에서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보게. 내가 왜 거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과연 그렇습니다.”
변승업은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수록 놀라운 처세다.
“조만간 국고가 바닥을 보이겠군요.”
눈치는 어찌 이리도 빠른지 모르겠다.
너무 편했다.
“점차 쌀과 콩이 부족해지겠지?”
“그러면 면주나 목면 따위를 지급하겠지요.”
“어찌 되겠나?”
“그리한들 바뀌는 건 없습니다.”
“좋군. 혹시 내가 도와줄 건 없겠나?”
“이미 모든 걸 마련하셨는데 어찌 더 하실 일이 있겠습니까.”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국고를 고갈시킬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토목 공사를 한다거나 군비를 확충할 생각은 전혀 없다.
모두 재해 극복에 사용될 예정이니 사치나 낭비가 아니었다.
그렇게 조선의 국고가 점차 말라갈 때 국경을 활짝 열어낼 것이다.
바로 그때 변승업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이고.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자신 있나?”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조선 최고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참으로 듬직하군.”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가볍게 술이나 한잔할까 싶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감히 내 집에서……?
오만상을 찌푸렸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더 오만상을 찌푸렸다.
생각 만해도 오만상이 찌푸려지는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의 허락 없이 문이 열렸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고함.
“우암! 자네 진짜 제정신인가?!”
송준길이었다.
소 닭 보듯 그냥 쳐다봤다.
그런데 윤선거도 왔다.
“우, 우암. 자네 진짜…….”
“조용히 하게.”
“알겠네.”
그때였다.
“대사헌 대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응……?”
“소인 역관 변승업이라고 합니다.”
“아. 자네가 상단주인가?”
“알아봐 주시니 감읍할 뿐입니다. 대감. 항상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정계의 거물이 들이닥치자 변승업의 눈부신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윤선거는 일전에 봤고, 송준길과 정식으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송준길에게 모든 걸 집중한다.
어쩌면 윤선거라는 인물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도권을 가졌을 송준길에게 접근하는 걸 수도 있고.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슬쩍 봤는데 송준길도 그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처음 접하는 변승업의 사회생활에 눈이 부셨을 것이다.
“언제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소인이 최선을 다하여 보필하겠습니다.”
눈부시다.
눈부셔.
송준길은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분위기를 잡았다.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인 거 같았다.
그러자 변승업은 자연스레 뒤로 빠졌다.
낄 데 안 낄 데를 정확하게 아는 참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자네 덕분에 일을 떠맡게 생겼네.”
“감축드립니다.”
송준길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봤다.
물론, 나는 가볍게 넘겼고.
“무슨 일을 떠맡으셨기에 기별도 없이 대뜸 찾아오셨습니까.”
“뭐라도 하나 해내라는 것일세.”
“적당한 게 있습니까?”
“없네. 그러니 자네가 뭐라도 꺼내 보게.”
“소제가 왜요?”
“시작했으니 해결도 해야지. 안 그런가?”
“발의했고 주상전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발을 빼겠다는 건가?”
“발을 빼는 게 아니라, 애초에 걸친 적도 없습니다.”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고 하자 송준길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낌이 왔다.
폭풍과도 같은 잔소리가 시작될 기미라는 걸.
그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변 역관.”
“예. 대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볼 때 우리 조선에서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허. 우암. 자네 지금 뭐하나? 중대본의 일을 어찌 상단에 자문하나?”
“적당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응……?”
자신만만한 변승업의 말에 송준길은 눈을 껌뻑였다.
나도 처음 봤다.
송준길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
그런데도 변승업은 섣부른 행동을 삼가고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목장입니다.”
목장……?
이 아이템은 확 끌리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