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국고를 탕진하라(2)
목장…….
정말 별로였다.
나와 송준길 그리고 소심한 윤선거까지 거의 동시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정말 별로였다.
그냥 별로가 아니라 아예 아니었다.
“목장……?”
“목장이라니.”
“…….”
우리의 반응이 완전 최악이었으나 변승업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무지한 이들을 깨우치는 선각자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자신의 시야가 남다르다는 걸 깨닫고 기뻐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현재 경기도 28개, 충청도 10개, 전라도 13개, 경상도 18개, 함경도 6개, 평안도 5개, 제주도 2개로 총 92개의 목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명맥만 유지할 뿐 제대로 운영되는 것은 고작 50여 개에 불과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목장은 폐지 또는 축소의 길을 밟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됐다.
거두절미하고, 현재 목장의 축소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런데 이러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실상부 최고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눈치 빠른 변승업이 말이다.
그가 우리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지금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런 상황에서 변승업은 알아서 잘 처신했다.
그런데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시 목장을 언급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 영역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었으니 더 들어볼 필요성을 느꼈다.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송준길과 윤선거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헛웃음을 지었을 뿐 변승업의 말을 자르거나 막지 않았다.
이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군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위정자의 자세였다.
이럴 때 보면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들이라는 건 확실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현재 구색을 갖추고 있는 92개의 목장을 정상화하고 이후 더 늘릴 수 있다면 어찌 국사(國事)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관 변승업이라고 했나?”
“예. 대감.”
“자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네. 상재가 뛰어나기에 조선 최고의 거부라고?”
“부끄럽습니다.”
“또, 중대본의 행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도 들었네.”
“그저 작은 힘을 보탰습니다. 도움이라고 하시니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의 천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한마디, 한마디에 절륜한 사회생활이 녹아내려져 있다.
변승업의 세 치 혀는 가히 마약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자네의 공을 인정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알겠네. 하지만, 목장을 정상화해서 재화를 확충한다는 발상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군.”
송준길의 표정은 엄중했고, 목소리는 묵직했다.
지금껏 내게 잔소리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일국을 경영해온 거인의 무게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놀라운 건 바로 송준길의 말이었다.
변승업의 의견을 들었으니 가부를 정하여 내쳐도 그만이다.
그냥 사대부가 아니다.
조선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송준길이다.
그가 고작 중인에 불과한 변승업의 의견을 경청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토론으로 설득하고자 하고 있다.
이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송준길은 나한테만 꼰대 짓을 한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관대한 위정자이고, 학자였다.
정말 재수가 없지 않은가.
“예기(禮記)에서 이르길 ‘나라의 부(富)를 물으면 말의 수효로 대답한다’할 정도로 말은 국력을 평가하는 요소일세.”
무려 예기까지 인용하는 정성을 왜 내게는 보이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재수가 없었다.
“자네 말대로 우리 조선은 원래 목장의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네. 과거 성종 시절 진도 지력산 목장에서 방목한 목마는 1,300여 필이었지. 한데, 지금은 고작 50여 필에 불과해. 일국의 국세와 직결하는 일이거늘 이토록 방치하다시피 이어지고 있어.”
친절하다.
정말 친절해.
나는 송준길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변승업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러하겠나. 여러 사정이 있겠으나 목장을 둔전이나 민전으로 사용하는 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기에 그러하다네. 작금의 조선은 이제 목장을 경영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일세. 상단주로서 자네의 안목은 높게 평가하네. 하지만, 일국의 방침은 상단의 일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명심하게.”
“소인이 어찌 감히 국정을 논하겠습니까. 대감께서 이르신 것처럼 작은 상단의 일을 처리하듯 목장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응……?
그냥 들으면 흘러갈 내용이다.
하지만 다시 들으면 무언가 묘했다.
이는 나만 이를 느낀 게 아닌 것 같았다.
“속에 담은 이야기가 있나?”
과연 송준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변승업을 지그시 쳐다봤다.
가늘어진 그의 눈가에는 상당한 압박감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변승업도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나는 게 옳다.
그런데
“대감. 민전과 둔전의 확대로 목장을 축소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변승업의 답변은 예상과는 아예 달랐다.
심지어 공격적이었다.
말을 삼가며 듣고만 있던 윤선거의 눈동자는 아예 휘둥그레졌다.
진심으로 정말 놀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송준길의 눈가는 더 가늘어졌다.
“……무슨 뜻인가.”
“양잠이 국부에 도움이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간 여력이 없기에 순위에서 밀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대감께서 이르신 진도 지력산 목장은 둘레가 130리에 육박하였습니다. 하여, 목자 130여 명, 절수 전답은 200여 결, 둔전답은 100여 결 이상이 필요하였습니다.”
“…….”
“과거 1,300여 필이 있던 목장이었으나 현재는 50여 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나마 진도 목장 일대가 50여 필이라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
“소인이 어찌 모든 걸 알겠습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소인은 국정을 논할 시야가 부족하며, 능력과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상단주로서 바라봤을 때 목장의 축소는 결국 재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발생한 일입니다.”
변승업이 내린 결론에 송준길은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윤선거는 그저 눈만 껌뻑였고.
그리고 대화가 여기까지 흘러오자 나는 너무 흥미로워졌다.
변승업이 이렇게까지 치고 나올 정도라면 목장 사업이 정말 괜찮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일개 상단주가 아니라 조선 최고의 거부다.
사업을 바라보는 안목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대단한 건 여기까지 대화를 이끌어 온 송준길이었다.
왜?
지금까지 변승업은 조정의 방침을 이른 송준길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아무리 돌려 말했다고 한들 본질은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송준길은 노기를 보이지 않았다.
이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데,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래. 알겠네. 좋아. 상단주로서 자네가 볼 때, 목장을 경영하는 일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건가?”
“상단주로서 바라볼 때, 목장은 조선의 국부를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아주 유력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자네가 한 말 그대로일세.”
“예……?”
“우리 조정은 목장을 경영할 수 있는 여력이 없네.”
송준길이 너무나도 쉽고 시원하게 인정했다.
듣고 있던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또, 변승업도 상당히 당황했다.
“해서 하는 말일세. 자네는 도저히 조정이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를 언급했네. 하면, 방책이 있다고 여겨지네만.”
송준길이 원래 이렇게 남한테 부드러운 인간이었나?
그동안 송준길에게 당한 게 새록새록 떠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땀이 차올랐다.
“방책이 있습니다.”
“이르게.”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뭐……?”
방책을 물었는데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다.
송준길의 볼이 살짝 씰룩거렸다.
“목장을 상단이 소유하게 해달라?”
“맡겨주신다면 최소한 양난 이전의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습니다.”
“방책을 말하라고 했거늘, 상단의 이권을 챙겨달라?”
“수익의 절반을 조정에 바치겠습니다.”
“!!!”
조선 최고 거부다운 배포였다.
이 엄청난 베팅에, 은은한 노기를 담긴 냉소적인 말투로 화답하던 송준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순간 내가 느낀 게 있었다.
이 시절에도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송준길의 평정심을 무너뜨린 것도 그렇지만 조정이 포기한 목장 정책을 변승업이 해내겠다고 나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정부가 포기한 국책 사업을 재벌이 하겠다고 덤빈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이 있었다.
변승업은 대체 돈이 얼마나 많기에 이토록 공격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습니까.”
그새 변승업의 금권이 미친 듯이 휘둘러지며 무려 송준길을 압도했다.
정사에 기록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불가(不可).”
송준길의 답변은 너무나도 의외였고 심지어 단호했다.
그렇게 그가 말을 이었다.
“5할을 조정에 바치겠다는 말은 기특하다.”
“한데, 어째서 불가함을 이르셨습니까.”
“그 말만 기특하기에 그러하다.”
“예……?”
변승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송준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대번에 사라졌다.
“속내를 숨긴 상인과 거래를 할 만큼 내가 가벼워 보였나?”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속내를 숨기다니요.”
“조정에 5할을 바치더라도 이익이 남으니 제안했겠지. 그런데 이익이 단지 금전인가?”
“…….”
“이렇게 물어보지. 나머지 5할로 무엇을 도모하고자 하나?”
“…….”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숨기고 감히 내게 그런 제안을 하였다? 자네 참으로 간이 크군.”
듣고 보니 나도 궁금했다.
변승업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일까.
그런데 변승업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봤다.
“…….”
“…….”
왜 계속 나를 바라보지?
계속 눈을 껌뻑였다.
그새 송준길도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암? 혹시 자네가 개입되었나?”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 역관이 어찌하여 자네만 쳐다보나?”
“그건 소제가 제일 궁금합니다.”
“아니, 대감.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응?”
“허!”
변승업이 팔짝 뛰면서 내게 항변했다.
이리되자 송준길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우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하게. 설마 자네가 변 역관과 합을 맞춰서 나를 희롱하고 무언가를 도모하고자 하였나?”
“모르는데요?”
“대, 대감.”
“자네가 나를 기어이 이렇게 희롱하나? 그래. 변 역관. 자네라도 모든 걸 토설하게!”
“아니라니까요?”
“우암!”
송준길이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아니라서 뻣뻣하게 버텼다.
그런데
“구, 국고를 탕진하는 게 목적입니다.”
응……?
그런 거였어?
변승업이 던진 폭탄에 송준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도 깨달았다.
목장 사업도 대청 무역을 위한 발판이라는 걸.
아씨. 그러면 미리 언질을 주든가.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