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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63화 (63/298)

63화 국고를 탕진하라(3)

송준길이 정말 화가 많이 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염까지 떨릴 이유는 없다.

슬쩍 봤는데 윤선거도 충격에 휩싸인 것 같았다.

물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우암. 하나부터 열까지 그리고 모르쇠로 일관한 이유까지 모두 다 말해야 할 것이네.”

“우암. 자네 대체 무슨 생각인가?”

“미촌.”

“그래. 어서 말하게.”

“빠지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네.”

일단 윤선거를 가볍게 제압한 뒤 송준길을 슬쩍 쳐다봤다.

노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내가 자신을 조롱했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이럴 때는 일단 멋쩍게 웃고 시작하는 게 맞다.

그러나

“웃지 말게.”

송준길의 강력한 경고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괜히 헛짓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다.

게다가 변승업은 이미 발을 빼듯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시 예사로운 인사가 아니었다.

나는 이 난국을 오직 나의 실력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어수선한 분위기부터 바로 잡았다.

“형님.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오해……? 하면, 역관이 지금 나를 희롱했다는 건가? 감히?”

“아닙니다. 대감. 소인은 오직 진실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오해 말고요. 그나저나 변 역관. 전광석화라는 말은 자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군.”

“송구합니다. 대감.”

“내가 언제까지 실없는 대화를 들어야 하나?”

송준길의 말과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 잔소리만 하던 모습과는 아예 달랐다.

일국을 지탱하는 거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고 있었다.

절대 경시할 수 없었기에 나도 자세를 바로잡고 핵심부터 내질렀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소제는 국고를 아낄 생각이 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국고가 바닥을 보이도록 유도하고자 합니다.”

“타당한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네.”

“더 많은 쌀을 확보하기 위해서이지요.”

“내가 무지하여 자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자네가 이 상황을 대충 넘기려고 하는 건가.”

“소제가 거두절미를 너무 잘했나 봅니다.”

“나와 농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약간의 말장난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송준길의 노기가 점차 커졌으나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고작 쌀 10만 석을 구하지 못하여 비축 군량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 나라 조선이 이러합니다. 소제는 이를 주목하였고요.”

“대안을 치운 건 바로 자네일세.”

“백성을 살리고자 관리를 굶주리는 게 무슨 대안입니다. 그건 결국 나라를 엉망으로 만드는 겁니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지만, 관리가 없으면 그들을 어찌 다스릴 수 있습니까. 계갑년의 비극이 다시 도래하였을 때 관리가 모두 굶어 죽으면 대체 무슨 수로 백성을 구제할 겁니까?”

솔직히 이건 이제 철 지난 이야기다.

나는 간단하게 한마디로 이를 정리하기로 했다.

“사대부라고 하여 굶으면서 버틸 재간은 없습니다. 녹봉으로 삶을 연명하는 관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한데, 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이 어찌 대안이 됩니까.”

“그래서 녹봉의 인상안을 꺼냈다? 국고를 탕진하려고?”

“예.”

“우암!”

“다시 말하지요. 그래야만 길이 열립니다.”

“자네가 말하는 길이 무엇이기에?”

“국경의 개방입니다.”

“뭐……?”

“의주를 전면 개방하여 대청 무역을 모두 민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

송준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단언컨대 나는 여태껏 송준길이 이토록 경악하는 걸 보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송준길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그만큼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 논쟁이 때아닌 성리학의 세계로 흘러가면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실성했나?”

“형님. 다시 말해야 합니까? 고작 10만 석의 구휼미도 구하지 못하여 변고를 대비한 군량에 손을 대고 만 가난한 나라입니다. 역병을 대비하기 위한 위생국의 재원조차 일개 상단의 지원을 받은 상황입니다. 계갑년의 재앙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재해와 싸우고 있는데도 이러합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조선 조정의 역량은 고작 이 정도입니다. 만일, 차후 미증유의 재해가 도래한다면 정녕 조선의 역량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해서, 중대본을 수립한 것일세. 이제 막 시작하였으나 잘하고 있어.”

“양잠과 쇄염법을 이르십니까? 정녕 그 정도의 내정 개혁으로 조선이 백성을 책임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 다르고 아 다르다.

나는 언제부터 조정이나 중대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재해의 주체를 ‘조선’으로 규정했다.

이는 조선의 국가 역량 자체가 재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내정 개혁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조선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습니다.”

작금의 조선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뜯어고치면 가능하다.

나는 이를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세율을 인상하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가당키나 합니까? 금상께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위화도 회군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암!”

“소제는 정확한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개국 수준의 충격이 있어야만 세율을 인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명분도 없을뿐더러, 그럴 힘도 없다.

“조선이 조선의 백성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청을 통하여 쌀을 확보해야 합니다.”

송준길의 굳은 안색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일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함구하고자 했다.

변승업을 탓할 일도 아니다.

송준길이 너무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본질을 토설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상황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오늘 송준길을 설득하지 못하면 무역 거점의 전면 개방이라는 원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준길이 아직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시간이었기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계사년(1593년)과 갑오년(1595년)의 기근은 어떠했습니까. 미증유의 기근에 우리 조선은 어찌 대처하였습니까.”

“적절한 사례가 아닐세. 당시는 왜란의 와중이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어 절멸될 상태였습니다. 병량이 문제가 아니라 기민을 구제할 곡물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라 기근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명도 큰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기에 조선을 일방적으로 구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해서, 어찌 되었습니까. 압록강 하구인 중강(中江)에서 공식적으로 교역을 진행하였습니다.”

당시 명은 전쟁 이후 쌀과 콩 12만 여석을 조선에 넘겨서 백성을 구제하게 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지금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송준길 역시 이 사실을 꺼내지 않았고.

지금 중요한 건, 과거 계갑년의 기근은 조선의 자력으로 극복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게 핵심이었다.

“형님.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청의 쌀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조선은 백성을 구할 수 없습니다.”

“……자네 말대로 거점을 전면 개방하여 상단이 쌀을 확보한다고 가정하지. 한데, 조정은 그 쌀을 무슨 수로 구휼미로 사용할 수 있나? 나라가 어려우니 상단의 재물을 몰수라도 하자는 건가?”

“아닙니다.”

“하면?”

“사야죠.”

“뭐……?”

송준길은 헛웃음을 지었다.

조선 조정이 그럴 여력이 있다면 상단을 통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 이권과 교환하면 될 일입니다.”

“이권……?”

“목장의 경영이나 광산의 채광 권한을 넘기는 것입니다.”

가볍게 내뱉은 말이지만 담긴 의미는 거대했다.

철저하게 조정이 움켜쥐고 있는 국책 사업을 민간에 개방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 방법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상단에 넘겨서 뭐라도 하는 게 옳다.

그냥 두는 건 국가적인 낭비다.

그리고 하나 더.

“나라가 안정화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가져올 수 있는 권한이지요. 혹은 조세를 징수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구휼미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줬는데 다시 뺏는 건 나쁜 짓이다.

혹은 정당한 교환이었는데 세금을 내라는 것도 나쁜 짓이다.

그런데 이 시절에는 그래도 된다.

군주가 통치한다는 건 그런 나쁜 짓이 가능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송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을 모두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라를 넘기는 것이 아닌 이상 백성을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겠나. 다만, 주상께서 윤허하실지는 모르겠네.”

“아. 이미 윤허하셨습니다.”

“……그런 말은 가장 먼저 하는 게 옳지 않나?”

“생각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송준길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변승업을 바라봤다.

“말해보게. 목장의 활성화가 어찌 국고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는지.”

“간단합니다. 수익의 5할을 쌀로 낼 겁니다.”

“뭐……?”

“소나 말은 상단이 취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점차 값은 오르겠지요.”

“허…….”

변승업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감.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조정의 국고가 바닥을 보이게 할 것입니다.”

“알겠네.”

누가 들으면 나라를 혼란으로 밀어 넣기 위한 결의의 장이라고 여길 만한 맹세가 오고 갔다.

어쨌든 큰 산을 넘었다.

송준길이 동의하였으니 당분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그렇군.”

갑자기 윤선거가 끼어들었다.

심지어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면서 말이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나는 말을 자르지 않고 쳐다봤다.

“변 역관. 자네가 위생국의 일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는 이유를 알겠네.”

“예?”

“때가 되면 상단의 어려움을 내세울 계획이었어. 또한, 그 시기라는 건 위생국이 크게 활성화된 전후가 될 것이고. 아마 조정에 쌀을 바치기도 어렵다며 난색을 보이겠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무역의 확대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흐름이야.”

와. 진짜 깜짝 놀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그동안 만만하게 봤는데 윤선거의 안목이 정말 대단했다.

나는 진짜 놀라서 눈만 껌뻑이며 쳐다봤다.

“무역의 확대가 쌀의 확보만을 위한 것은 아니겠지. 자연스레 자네 상단의 부도 지금껏 이 땅에 없었던 수준으로 확대될 것이고. 내 말이 맞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정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닐세. 나는 그저 전후 사정을 파악했을 뿐이니까.”

윤선거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송준길에게 말했다.

“대감.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자네의 정세 판단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자네는 서인 최고의 정세 분석가가 아닌가.”

서인 최고의 정세 분석가……?

윤선거의 위치가 그 정도였나?

왜 나는 몰랐고, 송시열 이 새끼는 정보를 안 준 거지?

그런데 어울리기도 했다.

허구한 날 눈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딱 적성이었다.

“상황을 잘만 활용한다면 청 황제에게 쌀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동안 우리 조선에서 가져간 쌀이 많지 않습니까. 소생의 판단으로는 가능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정말 윤선거가 맞을까?

평소 눈치만 보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청산유수였고, 내용은 실로 대범했다.

송준길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데, 남인이 이를 수용할까? 청나라와 관련한 일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데.”

“당연히 반대하겠지요. 호조판서 허적부터 반대할 겁니다.”

“어찌 운을 띄워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군. 그렇다고 숨기고 일을 진행하자니, 정치가 정도를 벗어나게 될 것이고.”

“일단 본질은 덮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송준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형님의 말씀대로 남인은 청에 대한 입장이 너무나도 강경합니다. 미촌의 말대로 청 황제가 구휼미를 내린다고 해도 반대할 겁니다. 은혜를 입을 수 없다면서 말입니다. 이러한데 무턱대고 일을 진행하면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음.”

“하나씩 하시죠.”

“소생도 우암과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목장부터 진행하시지요.”

윤선거까지 거들자 송준길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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