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또 다른 준비(1)
허적의 눈은 가늘어졌다.
단 하루 만에 정책을 수립한 것도 미심쩍은데, 심지어 그 내용이 목장의 확대였다.
정말이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목장이라. 참으로 당혹스럽소. 다른 분도 아닌 대사헌께서 진정 이리 생각하셨다는 것이오?”
“아니, 왜 그러오?”
“……대사헌. 목장을 대체 무슨 수로 확대할 생각이시오? 얼마나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지 모르시오? 우리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목장이 중요한 걸 누가 모르겠소? 하지만 여력이 안 되는 그냥 두고 있는 것이외다.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오만.”
“그래서 일이 될 수 있는 방도를 찾았소.”
“그 방도가 무척이나 궁금하오만.”
송준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명백한 약 올리기였다.
그 수작을 지켜보던 허적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입술을 미세하게 떨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상단주 변승업이 목장의 경영을 해보겠다고 하오.”
“…….”
“일단 진도의 목장부터 해보겠다고 하니, 하나씩 넘겨보는 게 어떻소이까.”
허적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새로 준비하시오.”
“호판. 변승업이 수익의 5할을 조정에 바치겠다고 했소.”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말을 돌렸던 허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으로 놀라서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송준길은 보태듯 말을 꺼냈다.
“쌀로 바친다고 하오. 이 정도면 인상된 녹봉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소?”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허적은 아예 말문이 막혀버렸다.
“변승업은 과거 삭주에서 합을 맞춰본 적이 있소. 이번 위생국의 일도 그러하고. 의기가 넘치고 대범한 인물이었소. 그라면 신뢰할 만하오.”
다른 사람도 아닌 허목까지 거들었다.
이러면 더 반대하기가 어려워진다.
허적은 연신 헛웃음을 지었다.
“다 알겠소. 다 알겠는데, 대체 변승업은 왜 이렇게까지 조정에 복무하오?”
“그는 중인이오. 고작 중인이 조선 최고의 거부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믿소.”
사대부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는 나라가 조선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중인은 고작 중인에 불과했다.
조선 최고의 거부라고 할지라도 송곳 꽂을 땅 하나 없는 사대부를 이길 수 없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허목의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중대본이 그를 보증한다면 중인이라고 할지라도 핍박받지 않을 것이외다.”
중대본 구성원은 사실상 조선 사대부 그 자체였다.
조선 땅에서 이들의 권위를 넘을 수 있는 존재는 군왕이 유일했다.
허적은 허목의 말을 골똘히 곱씹었다.
사대부들이 무도하게 변승업을 괴롭힌다면 이유 여하를 떠나서 당연히 엄벌하는 게 옳다.
딱 이 정도로 그를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면, 중대본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었다.
“좋소. 전하께 고하겠소.”
“아주 바람직하오.”
“한데, 본부장은 대체 뭐 하는지 아시오?”
그랬다.
송시열은 여전히 중대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송준길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모르오.”
“어처구니가 없구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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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잘 풀렸다.
그런데 괘씸했다.
변승업…….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좋은 사업 아이템을 말하라고 했더니 나한테 공을 다 넘겨버린 게 아닌가.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짜 개판 될 뻔했다.
“하하하. 대감. 일이 잘 풀렸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변승업은 방긋 웃으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내 심기가 안 좋다는 걸 단번에 파악한 처세였다.
“대감. 위생국에서 일할 의원을 20여 명 정도 확보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의원을 구할 것이고요. 아. 각지의 약재도 순탄하게 구해지고 있고요.”
이 새끼 봐라.
이 와중에 성과를 보고하네?
일부러 이렇게 행동하는 게 분명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빤히 쳐다봤다.
변승업은 내 눈을 슬쩍 피하면서 어물쩍 말을 꺼냈다.
“혹시 소인이 무언가 실수라도 하였을까요?”
“…….”
“만일 그렇다면 크게 꾸짖어 주십시오. 소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매사 최선을 다하였으나 대감께서 조금이라도 언짢으신 부분이 있다면 응당 죄를 청하는 게 옳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괜한 말을 보태면 나는 아주 옹졸한 인간이 되는 건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변승업에게 악의나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 더 확실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변 역관.”
“예. 대감. 이르십시오.”
“두 번 다시는 나와 상의하지 않은 일을 펼치지 말게.”
“송구합니다. 소인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웃음기 하나 없이 정색하며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자 변승업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감. 소인은 잘해보려고 그랬습니다.”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안다.
송준길이 귀신처럼 파악해서 일이 복잡해졌다는 걸.
변승업은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는 일은 나라의 존망과 직결하는 일일세. 작은 변수로 일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네.”
“송구합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변승업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아주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나라의 명운을 건 중대사였다.
나와 중대본은 사대부로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변승업에게도 그럴 의무가 있을까?
그는 조선의 운명에서 한발 비켜선 인물인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변승업에게 너무 가혹하고 무거운 역할을 맡겼을 수도 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확실하게 아는 게 하나 있다.
이런 일은 억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변 역관.”
“예. 대감.”
“자네와 상단을 보호해준다는 약조는 변함이 없네.”
“예?”
“여기까지 힘을 보탠 것만으로도 충분해. 누구라도 해를 끼치지 못하게 충분히 살필 것이네. 그러니 버거우면 말하게.”
“대감.”
“나와 중대본의 인사들이 가진 무게를 자네가 똑같이 나눠 가질 필요는 없네. 애초 자네의 목표는 누군가의 위해로부터 상단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는가.”
변승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은 갈등이 읽혔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의 시작은 처세였고, 복잡하게 휘말리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그래. 이해하네.”
“소인은 끝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이보게.”
“소인이 경솔하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변승업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사라졌다.
오히려 굳건함이 강하게 전해졌다.
“우리의 일이 나라의 존망과 관련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작은 변수에도 일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소인은 상단을 경영하듯 판단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초안과 달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조정의 일은 소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단과는 달랐습니다. 수백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거늘, 오직 이익만을 창출하면 되는 상단의 일처럼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
“소인이 부족하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소인은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언짢으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네.”
“하늘이 소인과 소인의 가문, 그리고 상단에 내린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회……?”
“최고의 공을 세우면…….”
이어질 말은 바로 짐작됐다.
변승업이 갈망하는 건 신분의 상승이었다.
중인이 아니라 양반.
역관이 아니라 대신.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거기까지.”
“…….”
“어림도 없다는 의미가 아닐세.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말라는 말이야. 변 역관. 세상은 중인이 재력으로 공을 세웠다고 하여 양반이 되게 해줄 만큼 아름답지 않아. 변방의 이름 없는 상인이었다면 여러 방편으로 양반이 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네는 오히려 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러니 함구하게. 때가 올 때까지.”
변승업은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파악했다.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래도 잘한 건 잘했네. 작금의 조선에는 자네처럼 일을 치고 나갈 사람이 필요하긴 하니까.”
이건 진심이긴 했다.
보수적인 사대부와 변승업은 기질 자체가 완벽하게 달랐다.
전자가 정책을 입안할 때는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변수를 고려한다면, 후자는 빠른 결정과 집행을 선호했다.
나라고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대사를 추진할 때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의 지식과 현대인의 기억은 누구도 가질 수 없지만, 내 판단을 무조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섣부른 나의 결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할 때 변승업의 과감한 행보가 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번에 식겁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고려할 때 변승업의 길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내정 개혁을 진행할지라도 한계가 있다.
물론, 경신 대기근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재해는 어떻게든 방어할 수 있다.
조선이 그 정도의 역량은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경신 대기근을 방어하려면 무조건 대외무역의 빗장을 열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변승업 덕분에 송준길과 윤선거라는 최고의 우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나쁘지 않다.
미리 상의만 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대감.”
“왜 그러나?”
“왜국은 어떻습니까?”
“뭐……?”
“북으로는 의주, 남으로는 동래까지 시원하게 개방하는 건 어떻습니까.”
“응? 하하하. 이렇게 상단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나?”
“소인의 상단이 원래 청과 왜국의 중계무역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만일 동래까지 전면 개방을 한다면, 효과는 상상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는 게 낫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동래를 개방하였을 때 확보할 수 있는 쌀의 수량을 정리하게. 그 결과를 보고 다시 이야기하지.”
“그리하겠습니다. 대감.”
마무리는 훈훈했다.
이제 변승업을 보내고 방구석을 굴러다니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가지 않고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말하게.”
“실은 대감을 뵙고자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나를? 누군가.”
“소인과 같은 역관인 김근행입니다.”
“……그가 왜?”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변승업의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족히 소인과 견줄 만한 상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당장 데려오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귀인을 기다리게 하나? 오늘 자네의 판단은 아주 형편없군.”
“송구합니다. 소인이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제라도 바로 잡을 생각은 없나?”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잠시 후 변승업이 김근행을 데리고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조선 최고의 거부인 변승업도 검소하다고 여겼는데, 김근행은 그 이상이었다.
당장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낡은 옷이었는데, 애초부터 거친 베로 지은 것이 분명했다. 또, 갓은 아예 해진 상태였다. 다른 건 더 말하기도 민망했다.
갓만 안 쓰고 있으면 거지라고 해도 믿을 뻔했다.
느낌 딱 왔다.
이 사람도 처세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는 걸.
그런데
“대감. 소인 김근행이라고 합니다.”
첫 인사가 참으로 담백했다.
눈치 백 단으로 최고의 사회생활을 보여주는 변승업과는 결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