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65화 (65/298)

65화 또 다른 준비(2)

김근행이 역관 출신이긴 한데, 변승업과 달리 제법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고모가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 씨였고, 부친인 김득기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 1등관에 책록되기도 했다.

김근행의 활약도 제법 아름다웠다.

조정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서 유황 4만 근을 밀수해오기도 했다. 또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일본으로부터 유황과 총기류를 수입하여 조정에 바치기도 하였으니, 예사로운 인사가 아니었다.

더 놀라운 건 이 정도의 공을 세우고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변승업이 혼자 호들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딱 깔끔하고 담백하다고 해야 할까?

누구처럼 고관대작을 열렬하게 갈망하며 질척이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된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주로 왜인과 무역을 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대감.”

정말 간결했다.

대체 얼마 만에 담백한 대화를 나눠보는 걸까.

“큰 부를 이룬 상인이 어찌하여 나를 보자고 하였는지 알고 싶네만.”

“변 역관으로부터 여러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감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소인도 중대본의 일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일은 누가 알아주지 않을 것일세. 어쩌면 상단의 재물만 축낼 수도 있어. 그런데도 함께하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유가 없다?”

“예. 그저 그러고 싶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호인(好人)이었다.

하늘 아래 이런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변승업조차도 신분 상승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이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한다.

나는 크게 감탄하며 방긋 웃었다.

은근슬쩍 변승업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데, 대감. 무역의 전면 개방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변 역관이 잘 설명해줬을 것이라고 여기겠네.”

“사정은 모두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작정 문을 연다고 하여 부가 증진되는 건 아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김근행은 변승업과 견줄 수 있는 거부다.

한마디로 조선의 재벌 중 한 명인데도 개방에 소극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동의 여부를 떠나서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기에 더 들어보기로 했다.

“과거 선조 대왕 시절 대마도에서 사절을 보내어 무역을 재개를 청하였습니다. 처음은 조정이 주도하는 공무역이 시작되었지요. 당연하겠으나 북방의 변고를 대비하여 대마도를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진했습니다.”

“자네,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왜 하나? 아쉽지만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네.”

“송구합니다. 소인이 가끔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즐깁니다.”

조금 전만 해도 차분하고 신중하며 담백한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런 면모가 있다.

세상은 이를 꼰대라고 부른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론을 꺼내게.”

“이후 조정은 개시 무역(사무역)을 논의하였지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미 상인들은 알아서 무역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시 무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요.”

“…….”

“한데 말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인은 대마도에서 유입되는 물품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대마도 물품은 적체되어 갔고, 이는 큰 불만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질적인 의문을 말해도 되겠나?”

“이에 조정은 다시 공무역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로써 개시무역은 종래 독점하였던 외교, 국방의 색채는 퇴색하고 경제적인 색채만 강화되었지요. 아. 물론입니다. 대감. 이르시지요.”

“……내가 대체 왜 자네에게 대일무역의 유구한 역사를 들어야 하나?”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들어야 하나?”

“아닙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변하는 김근행.

내용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정말 신뢰감을 주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어쨌든 이제 본론이라고 하니 나로서도 더 트집 잡는 건 무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으로 발언을 청하였다.

“대감. 대마도 상인은 조선의 물품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응……?”

“그들은 늘 명나라의 물품을 선호하였지요. 특히, 비단에 주력했습니다. 조선의 물품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원의 변란이 본격화되면서 우리 조선은 명의 비단을 구해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뭐.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 시절 명은 이자성의 난과 만주족의 공세로 혼란이 극심하였으니 말일세. 어쨌거나 자네 말대로라면 무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당시 무역은 월 6회(3,8,13,18,23,28일) 열리는 대청개시가 정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대마도인은 해당 날짜에 물품을 구하여 물러나야 하겠지. 하지만 명나라 물품을 구하지 못하자 체류 기간이 길어지고 동래부의 부담으로 이어졌겠군.”

무역 거래는 상인만 참여하는 게 아니었다.

관리자가 꼭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수세, 즉 무역세를 징수해야 하므로 엄격한 관리가 이뤄졌다.

그런데 이 과정도 모두 비용이었다.

무역이 이뤄지지도 않는데 비용은 계속 발생하는 것이니 동래부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김근행의 옛날이야기를 경청하더니 심지어 답변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참으로 괴이하고 불필요하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는 곤란하기에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본론을 말하고 싶을 때 나를 다시 찾겠나?”

“이대로 무턱대고 전면 개방을 한다면 조선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건 너무 본론이었다.

계속 대화를 해보니 김근행도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하긴, 어지간해서야 조선 최고 수준의 상단을 이끌 수 있겠는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김근행은 수줍은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세를 피하고자 상인과 대마도인은 각방개시를 통하고 있습니다.”

각방개시.

말 그대로 숨어서 물건 팔고 돈 받았다는 뜻이다.

왜? 탈세하려고.

“그러나 이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중원의 물품을 구할 길이 아예 없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수세가 부담스러워지고 갈수록 조선 상인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궁여지책으로 인삼을 새로운 물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조차 여의치가 않았으니 어찌 수세를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세금을 내느니 그냥 불법으로 장사했다는 의미였다. 대충 내가 들어도 탈세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어쨌거나 계속 이어진 김근행의 말에 의하면 인삼의 판매에도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에 대충 듣고 흘렸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오직 ‘조선이 대일무역을 전면 개방화할 때 손해를 보는 이유’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그냥 듣는 것이었다.

“조선 상단의 역량은 대마도 물품을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적체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불만이 커지자 결국 조정에서는 공무역이 일으켰지요. 대마도에서 가져오는 물품을 받고 공목 즉 목면을 지급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무역도 대마도에서 밀려오는 물품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조정과 민간이 다 달라붙어도 대마도 하나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습니다.”

김근행의 말은 장황하게 이어졌다.

그중 특히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었다.

“대감. 작금의 개시무역은 백사(白絲, 하얀 실), 은, 인삼의 규모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조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도성의 백사는 340~350냥인데, 왜관에 피집되는 값은 287냥 5전의 수준입니다. 무역하면 할수록 조선 상단의 피해가 커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정치 외교적으로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조선 조정의 노력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로는 철저하게 민간의 영역이었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도 이익을 도모하는 상단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김근행은 말을 보탰다.

“대감. 섣불리 대일무역을 강화하면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이거 그냥 문만 연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혹시 자네에게 마땅한 방책이 있나?”

“방책을 찾기에는 아직 명확한 흐름이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와. 진짜 맞는 말을 이렇게 잘 할 수가 있나.

김근행의 말대로였다.

의주에서 진행할 대청 무역은 명확하게 쌀의 확보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동래에서 펼쳐질 대일무역은 성격이 불분명했다.

변승업과 김근행 모두 일본에서 쌀을 구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쌀을 구할 수는 있겠으나, 열심히 노력해도 고작 수만 석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을 꺼내기도 했다.

그러니 당장 대일무역을 확대하는 건 건 결국 상업의 활성화 정도로 그칠 가능성이 컸다.

“그저 상업의 활성화를 꾀하신다면 이대로 두면 됩니다. 하지만 대감께서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지 않습니까.”

“자네라면 어찌하겠나.”

“소인은 역관이며 상인입니다. 대감께서 품으신 대의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괜찮으니 말하게.”

“개방만 해주십시오.”

“개방만 해달라?”

“그 뒤는 상단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는 내가 왜 전면 개방을 꾀하는지 아는가?”

“오직 식량만을 확보하기 위한 무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상단의 일입니다. 자유로운 대일무역의 끝이 무엇인지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

당장 대일무역을 확대한들 기근 방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막을 이유도 없었다.

“빗장을 열어줄 수는 있네.”

“하면……?”

“그러나 조선의 쌀이 한 톨이라도 바다를 넘는 건 곤란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단 자네는 적당하게 처신하며 대일무역을 준비하게.”

김근행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일단 대일무역은 이 정도로 정리하는 게 옳다.

세세한 일은 허적에게 떠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첫인상과는 다르군.”

“예?”

“첫인상은 참으로 담백하였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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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눈을 껌뻑였다.

계속 껌뻑이다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런 뒤에도 껌뻑였다.

여러 번 반복했으나 바뀌는 건 없었다.

하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대체 왜 이런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걸까?

유형원은 심각한 의문을 품으며 아전이 하는 꼴을 쳐다봤다.

“이보게.”

“예. 선생.”

아전은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태도에서 유형원의 신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근 고을의 사람 중 크고 작게 유형원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면서 유형원은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 뭐 하는 건지 알 수 있을까?”

“하하하. 선생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까. 뽕나무를 심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그걸 모르는가. 갑자기 왜 뽕나무를 심는지 물어보는 걸세.”

“이런. 아직 선생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군요. 가장 먼저 선생께 전하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아닐세. 내가 관복을 입는 것도 아닌데 아전을 사사롭게 부릴 수는 없기에, 일찍이 그러지 말라고 하였네.”

“예? 그러면 평소 그놈들이 선생께 소식을 전한다면서 관청을 나가고 한참 뒤에 온 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하는 아전을 보며 유형원은 피식 웃었다.

깊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보나 마나 그냥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였을 것이니까.

“되었네. 어쨌든 이제 그 소식을 내게 말해주겠나?”

“아. 이건 중대본에서 내려온 지침입니다.”

“중대본?”

“아니?! 중대본도 모르십니까? 대체 언제부터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입니까.”

“하하하. 참으로 희한한 일일세.”

“끙. 중앙재해대책본부라고 하여 새롭게 생긴 기구라고 합니다.”

“이름 한번 거창하군.”

“소인이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 들어보니 유명하신 분들이 많이 포진되었습니다.”

“그 유명하신 분들의 성함을 들어볼 수 있겠나?”

아전은 잠시 눈알을 굴리며 머리를 쥐어 짜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한 명씩 이름을 거론했다.

“이조판서 송시열 대감, 대사헌 송준길 대감…….”

유형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시작부터 서인의 수뇌부가 언급됐다.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필시 서인의 세력 확장을 위한 기구가 분명했다.

가볍게 손을 내저으려고 할 때였다.

“호조판서 허적 대감, 허목 선생…….”

절대 나올 수 없는 이름이 나왔다.

유형원은 멈칫했다.

정신을 차린 뒤 바로 되물었다.

“스승님께서 중대본에 속하셨다고?”

“선생의 스승님이 누구십니까?”

“허목 선생이시네.”

“아. 그렇습니다. 또 윤휴 선생과 윤선도 선생도 함께하십니다.”

“뭐……?”

유형원은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사롭게는 스승인 허목은 서인이라면 치를 떤다.

하늘 아래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윤선도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윤휴는 또 어떠한가.

그런데 이들이 송시열과 함께 중대본에 속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어명이 내려졌다고 한들 따를 사람들이 아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사하였을 것이다.

“중대본의 본부장은 이조판서 송시열 대감입니다.”

심지어 송시열이 수장인 기구에 속하였다고 한다.

유형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양잠도 대사헌 송준길 대감께서 직접 챙기십니다.”

대사헌이라면 송준길이다.

조정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왜……?

송준길이 뽕나무를……?

양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여 송준길은 이런 일을 담당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지위와 역할이 있는 이가 아닌가.

연이은 당혹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형원은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군현의 수령들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수령들뿐이겠습니까. 군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족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뽕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지요.”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수령 중에서 송준길의 말을 대놓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일 그랬다가는 사방에 산재한 산림의 세력이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설 것이니 말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조선에서 서인의 산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군왕이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염전에서 쇄염법이라는 방책을 사용하게 한다는군요.”

“뭐……?”

“예.”

“허.”

“예?”

“아, 아닐세. 하면, 이만 가보겠네.”

아전과 멀어진 유형원은 쉬지 않고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조선(朝鮮).”

홀로 읊조리듯 말했다.

“당신을 모두 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조선을 잘 안다고 여겼다.

누구보다도 조선의 모순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조선은 지금껏 알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녕 당신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수작일 뿐인가.”

무엇 하나 시원하게 장담할 수는 없다.

아전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이 진실이라면, 어제의 조선과 오늘의 조선은 아예 다른 나라였다.

그러나 그동안 겪어온 조선은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도 있으나 내일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발악하는 나라였다.

조선의 사지를 찢고, 배를 가르고, 뼈를 발라가며 분석했다.

그래서 모든 걸 알게 됐다.

작금의 조선이 얼마나 비루한 나라인지. 그리고 비루함의 표본을 세우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조선…… 당신이 숨겼던 모습이 있었나.”

영원히 이런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죽는 순간까지 조선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다시 조선을 만나야 할 순간이 도래하였다.

유형원은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부안현은 참으로 평온한 곳이었다.

늘 마음이 간지럽고 부드럽게 하는 곳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은 곳이었다.

번뇌와 고민만을 선사하였던 한양도성과는 너무나도 달리 아름다운 곳이었다.

“잠시 떠나야 하겠구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하였으나 미소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단 하루면 조선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하루가 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우스운 일이었다.

부안현에서 도성까지 540리, 엿새 가는 거리였다.

그런데 어쩌면 도성에서는 단 하루도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내키지 않는 걸음이지만 어쩔 수 없다.

숨을 쉬고 있다면 절대 멈출 수 없었다.

조선을 알게 된 이후 죽는 순간까지 지키겠노라 맹세한 것이 있었다.

어느새 신념이 된 그 맹세는 반드시 엄수해야 했다.

“조선을 바꿀 수 없다면 조선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여 모든 걸 기록한다.”

그랬다.

이는 조선을 개혁해내고자 하였던 순수한 청운의 꿈이 무참하게 꺾인 시절 심장에 새긴 맹세였다.

“조선의 척추까지 꺼내서 기록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가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기어이 그리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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