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삼고초려(三顧草廬)(2)
터벅터벅 걸었다.
터벅터벅 천천히 걸었다.
터벅터벅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섰다.
터벅터벅 돌아갔다.
터벅터벅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섰다.
터벅터벅 천천히 걸었다.
앞도 보기 싫었다.
그냥 하늘을 바라보며 걸었다.
다리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이렇게 걷고 싶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잠수함을 타고 싶었다.
하지만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경고가 있었다.
-반계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나는 사직할 것이외다.
호조판서 허적이었다.
개 씨발 유형원은 밤새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여론을 형성한 것이었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지금껏 고생한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근본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왜……?
-윤선도 선생께서 중대본 사직을 선언하셨소.
이미 화살이 떠나고야 말았다.
이대로라면 진짜 중대본은 누더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남인의 이탈로 인해서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준길과 윤선거까지 시비를 걸었다.
-자네는 대체 언제까지 불협화음을 만들고 다닐 생각인가?
-휴…….
……송준길의 잔소리보다 윤선거의 한숨이 더 재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제 유형원의 낙향을 무조건 막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생겼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주막이었다.
그냥 지인들 집에서 신세 좀 지면 얼마나 좋을까.
꼭 이렇게 티를 낸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뻘쭘하게 주막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딱 봐도 고관대작으로 보이는 노인이 들어서자 모두 긴장하며 조심스레 시선 처리를 했다.
어색한 정적이 주막을 감돌 때 주모가 서둘러 나왔다.
자세는 아주 공손했다.
“아이고. 나리. 어서 오세요.”
“나리가 아니라 대감일세.”
“아니고. 대감마님이셨군요. 무식해서 몰라봤네요.”
“괜찮네.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그런데 지체 높으신 대감마님께서 이 누추한 곳은 어떻게 오셨을까요?”
“아. 혹시 반계…….”
“반계 선생이요?”
순식간에 말을 낚아챈 주모.
나는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껌뻑였다.
그런데 주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아닌가.
이건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네.”
“대감마님이라고요?”
“그렇다니까.”
“음.”
“왜 그러나?”
“아니에요.
“안 그래도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 하긴 하셨어요.”
……참으로 흉악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주모의 태도 변화도 유형원의 영향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주막의 주모가 딱 봐도 높은 사람으로 보이며, 대감마님인 내게 이리 대할 수는 없다.
분명 나를 보잘것없는 인사라고 말한 게 확실하다.
아니면, 깔보라고 했거나.
어쩌면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절대 대감마님이 아니라고 했던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다 책임진다는 말도 했을 것이고.
그런데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단지 나를 괴롭히려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모가 나를 흘겨보며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냉큼 가버렸다.
대화를 듣던 주막의 손님들은 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쳐다보니 일제히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손도 가지런히 공손하다.
하늘 같은 대감마님께서 행차하시자 하던 식사도 멈추고 어찌해야 할지 정세 판단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하던 거 하게.”
그제야 손님들은 편히 수저를 들었다.
그때였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는데 귀엽게 생긴 꼬마 동자가 보였다.
“…….”
“무슨 일이십니까?”
안 물어봐도 유형원의 제자였다.
“……네 스승님을 뵈러 왔다.”
제자 앞에서 스승을 하대할 수는 없으니 적절하게 예를 차려서 말했다.
그런데 제자 놈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눈까지 휘둥그레 뜨고 발연기까지 한다.
보고 있노라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한 가지 스치는 단서가 있었다.
주모는 유형원이 누군지 알면서 제자 놈을 데려온 것이다.
상황 파악을 끝내자 속에서 무언가 거세게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바로 웃음이었다.
나는 애써 집어넣느라 정말 식겁했다.
오직 중대본을 위해서 참았다.
이는 오직 대의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모조리 제어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웃었으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래. 스승님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송구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그래?”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한 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흐름이었다.
나와 관계가 아무리 험악할지라도 안 나오고 제자를 보낼 수는 없다.
자리를 비우면서 각본 써서 배우들 배치했겠지.
어차피 이곳은 주막이니까 끼니나 때우며 기다리면 된다.
“하면, 기다릴 테니 너는 네 일을 보거라.”
“그것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니?”
“스승님께서는 유람을 떠나셨기에 언제 돌아오실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뭐……?”
“왜 그리 놀라십니까? 어차피 사전에 약조한 만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
“설마 스승님께서 누군가의 방문을 예측하여 자리를 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유람을 떠났을지는 몰랐다.
그냥 바람이나 쐬러 갔을 줄 알았지. 아니면 어디 가서 또 이간질하거나.
와. 그런데 유람이라니.
유형원, 이 새끼 진짜 지능적으로 나쁜 놈이네.
그러니까 아예 각을 잡고 유람을 하러 간 것이다.
밤새 허적, 허목, 윤휴, 윤선도를 만난서 갈라치기를 한 뒤 바로 발을 뺀 게 분명하다.
진짜 흉악한 인간이었다.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욕을 할 뻔했다.
치밀어 오르는 욕을 겨우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갑자기 유람이라고 하여 당황하였을 뿐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래. 어디로 가셨는지 아느냐?”
“송파나루를 건너 세곡에서 끼니를 챙기신 뒤 큰 산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길은 산 위로 가로질러 있는 이부치를 넘으신 뒤 모감점에서 말먹이를 먹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로를 묻는 게 아니라 목적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 뒤 경안역을 지나 쌍교점에서 곤히 주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은 제자 된 도리로서 참으로 걱정됩니다. 쌍교점은 주막이 없는데 밤 기온이 차기에 노숙도 할 수 없습니다. 행여 스승님의 몸이 상하시면 어찌하나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떠나셨다며? 한데, 무슨 밤잠을 이룰 수 없느냐?”
“그럴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휴. 스승님께서 토굴이나 구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됐다.
이제 와서 어디로 싸돌아다니는지 알아서 뭐 하겠나.
제일 중요한 걸 물었다.
“그래. 언제 오신다고 하더냐.”
“조금 전에 모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붙잡아서 더 묻고 싶었으나 어린애를 붙잡고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저놈도 유형원이 적어준 대본을 그대로 읽을 것이고.
그냥 내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다시 오면 되니까.
“아이고. 대감마님. 벌써 가시게요?”
주모였다.
간다고 하니 즐거워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대충 손을 내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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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종일 괜찮아도 자려고 할 때 갑자기 하나씩 생각나서 열받을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 딱 그랬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누우니까 화가 났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생물체로서 가지고 있는 미지의 분노까지 솟았다.
“유람? 재해가 나라 전체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유람? 진짜 미친놈이었구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잘난 척을 그렇게 하더니 유람이란다.
그러면 수발을 들 사람 한 명과 말 한 마리가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소한의 경비로 쌀 다섯 되, 반찬 두 상자 그리고 이불 따위도 챙겨야 한다.
백성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 말이다.
아주 사치스러운 인간이었다.
나는 누워서 유형원을 미친 듯이 씹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이 안 왔다.
“나를 피하려고 일부러 자리를 비워? 선전포고야 뭐야?”
유형원을 씹었다.
또 눈을 감았으나 역시 잠이 안 왔다.
이러기를 수십 번.
동이 텄다.
……한숨도 못 잤다.
열받아서.
눈 밑이 퀭했다.
온몸에 피로감이 누적됐다.
“내 인생 최대 위기가 이렇게 도래하는구나.”
한숨을 푹푹 쉬었다.
설마하니 반계 유형원의 정치력이 이 정도라는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제대로 관직 생활도 안 하고 재야에 은둔한 사람의 정치력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진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수준이었다.
과거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윤선도나 허목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끙. 이제 어쩐다…….”
유람갔다고 하니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
그랬다.
이게 핵심이었다.
유형원이 사치스러운 인간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인간이 놀러 다니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핵심은 지금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냈다가는 중대본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군량부터 옮겨야 하는데 멈춘 상황이 아닌가.
속이 꽉 찰 정도로 답답해졌다.
딱 그때였다.
“대감! 반계 선생이 주막에 출몰했다고 합니다!”
주막을 오가며 임무를 수행한 하인의 목소리.
나는 바로 의관을 갖추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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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께서 이르셨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
“…….”
“…….”
설마 이들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쩐 일이시오?”
“반계를 만나러 왔소.”
“반계를 만나러 왔습니다.”
바로 허목과 윤휴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반계는 안에 있소?”
“아쉽게도 없소.”
“오늘 만나자고 서찰이 왔는데 아직 당도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
자기가 불러놓고 자리에 없다고?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제 스승인데?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
순간적으로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였다.
지금 패턴이 딱 그렇다.
처음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러 갔을 때 유람을 떠나서 만남은 불발됐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제갈량의 지인만 만나고 왔다.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유형원이 제갈량의 그림자라도 밟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을 모셔놓고 자리에 없다니, 참으로 무도한 인사가 아닐 수 없소.”
“내가 괜찮은데 본부장이 왜 그러오?”
“……그게 아니라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외다.”
“틈만 나면 이간질을 하니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소.”
“이간질이 아니라…….”
“길이 질퍽거리고 말이 지치면 일정이 미뤄질 수도 있으니 어쩌겠는가.”
부처가 여기 있구나.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허 국장. 참으로 관대하시오?”
“팔은 안으로 굽어서 그렇소. 내 제자의 일이니 어찌 편들지 않겠소이까.”
“…….”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구나.
밴댕이 소갈딱지가 아닐 수 없다.
홀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쨌든 온다고 하였으니 기다리지요.”
“참으로 한가하시오. 나는 가봐야 하오. 위생국의 일이 많아서.”
“소생도 가봐야 합니다. 전 군현을 대상으로 양잠을 집행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감은 여유로워 보이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열받는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시발노마(施撥勞馬).”
“…….”
“…….”
찰나 어색하게 찾아온 정적.
괴이하게 일그러지는 허목과 윤휴의 표정.
나는 재빨리 말했다.
“말처럼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과 남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인품을 가진 두 사람을 보니 참으로 기분이 좋소. 그야말로 시발노마가 아닐 수 없소.”
“……알고는 있소만, 본부장이 말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쁘오.”
“……고사성어에 불과한데 왜 이리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거기까지 내가 어찌 알겠소이까. 하면, 어서 가보시오. 나는 한가로이 반계를 기다리겠소. 하루빨리 그를 설득해야만 군량을 옮길 수 있지 않겠소이까.”
허목과 윤휴는 찝찝함을 감추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몇 번이나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나는 홀로 유형원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가 떨어지고 달이 뜰 때까지 유형원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진짜 짜증 난다.
이 새끼는 진짜 씨발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