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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70화 (70/298)

70화 삼고초려(三顧草廬)(3)

또 밤을 지새웠다.

이틀을 연이어 잠을 못 자니 머리가 아팠다.

자고 싶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도 없었다.

그냥 막 화만 났다.

진짜 그냥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반계 선생이 주막에 출몰하였습니다!”

밖에서 들린 하인의 외침.

나는 당장 뛰쳐나갔다.

“이번은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소인이 직접 확인까지 했습니다.”

“만일 이번에도 아니면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확실합니다!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오냐! 내 이번 한 번만 더 너를 믿겠다!”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아…….”

“예?”

찰나 그간의 기억이 재빠르게 스쳤다.

경험상 이번에도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괜히 하인을 데려갔다가 망신살만 뻗칠 수가 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아니, 대감.”

“어허!”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사가를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유형원을 꼭 만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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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에 도착했다.

도착했고 유형원도 있다.

있긴 있었다.

그렇긴 한데…….

“…….”

자고 있다.

이건 진짜 미친놈인가?

백주에 마루에서 잠을 자?

정말 태평하구나.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혼자 태평성대다. 진짜.

되먹지 않은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고 욕이 치밀어 올랐다.

더 열받는 건 따로 있었다.

“세 번째…… 낮잠…….”

이건 딱 그거였다.

너무나도 똑같아서 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삼국지를 보면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이 자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그냥 유명한 건 모두 흉내 내고 있다.

미친놈이 분명했다.

진짜 유형원 따위가 자기를 제갈량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 나는 제 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편안하게 잠이나 자면서 멋있는 것만 하고 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찬물을 가져와서 던져버리고 싶었다.

당장 깨워서 멱살이라도 잡아야만 이 노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어이 깨우려고 할 때였다.

“스승님께서는 낮잠을 깨우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십니다.”

제자 놈이 가로막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똘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나도 모르게 유형원의 각본에 말려 들어갈 뻔한 것이다.

저놈은 필시 나를 도발하여 더 한 궁지로 몰아넣고 싶을 것이다.

중대본이 보는 앞에서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나저나 제자 놈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학문을 어디까지 깨우쳤는지는 몰라도 장유유서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나 한참 연장자인 내게 이토록 당돌하게 행동하는 건 스승의 엄명이 있었을 것이고.

가까운 스승이 무서운 거지 알지도 못하는 노인이 뭐가 무섭겠는가.

문제가 생기면 스승이 알아서 똥 치우겠다고 했을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제자 놈을 빤히 쳐다봤다.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괜히 괴롭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집어넣었다.

그냥 적당하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어차피 유형원의 각본은 여기까지가 아니겠는가.

삼고초려를 흉내 내는 것이니 오늘은 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기서 자고 있겠지.

“한데, 내가 꽤 바쁜 사람이란다.”

“혹시 약조한 만남이십니까?”

“일전에 두 번이나 찾아오지 않았더냐. 전하지 않은 네 탓도 있다.”

“선생께서 누군지 알고 소인이 전합니까?”

“그것은 참으로 우문현답이구나.”

크게 뉘우치는 시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내 실수가 맞다. 그리고 나는…….”

“무릇, 군자라면 실수를 인정하면 그것으로만 족할 일입니다. 구태여 사족을 달아서 어렵게 한 반성의 의미를 퇴색하게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

일부러 장단 맞춰준 건 맞는데 이놈도 보통은 넘었다.

그리고 유형원이 만들어 준 대본에 이런 상황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조금 전 상황은 이놈의 애드립이라는 것이다.

볼수록 똘똘한 놈이었다.

“네 말이 참으로 옳다.”

내가 재차 동의하자 제자 놈이 조금 당황했다.

그러더니 대충 읍을 하며 물러서려고 하길래 내가 먼저 말했다.

“내 이름은 송시열, 호는 우암이라고 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한참 연장자가 자기소개를 먼저 했는데 무시할 수는 없다.

과연 제자 놈은 재빨리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생은 김서경, 호는 담계입니다.”

“담계 김서경이라. 좋은 이름과 호구나.”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도 학문에 더욱더 정진하여라.”

“감사합니다.”

각본을 벗어난 현실에서는 참으로 예의가 바르지 않은가.

역시 동방예의지국이 아닐 수 없다.

그새 김서경은 눈치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아마 애드립이 고갈됐기 때문일 것이다.

볼수록 똘똘한 게 귀여웠다.

크게 될 놈 같았다.

주변을 돌아본 나는 적당한 곳에 앉아서 하늘만 바라봤다.

나를 힐끗거리는 주모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대충 무시했다.

단역 배우까지 다 신경 쓰기에는 기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달이 떠 있다.

진짜 더럽게 오래 잤다.

혹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지금 유형원의 수면은 각본상 연출이 아니라 진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러고 있으니 내 신세가 조금 처량한 거 같았다.

물끄러미 달이나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음.”

유형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냥 시체이길 바랐는데 너무나도 아쉽게도 소리를 내더니 급기야 조금씩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가 살아 있다는 걸 파악하자 나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만약, 지금 일어나서 시 한 소절 딱 읊으면 화룡점정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상은 빗겨나가지 않았다.

“초당에 봄 잠이 넉넉하고, 창밖의 해는 더디 더디 기운다.”

“…….”

“큰 꿈에서 누가 먼저 깨어날 것인가, 평소에 나 나 자신은 아노라.”

“…….”

와. 진짜 미쳤다.

아예 제갈량의 시다.

미친 새끼가 계속 제갈량 흉내를 낸다.

아주 그냥 지랄하고 있다.

진짜 짜증이 났다.

그냥 빤히 쳐다만 봤다.

“응? 이게 누구십니까. 우암 대감이 아니십니까?”

아주 많이 신나서 시비를 건다.

그간의 성과에 만족한 게 분명했다.

뭐. 인정한다.

치가 떨릴 정도의 이간질과 갈라치기로 나를 궁지로 몰았고, 기어이 삼고초려를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선전이고 본판은 당사자끼리 만난 지금부터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진짜로 낙향할 생각이었으면 일을 이렇게 지저분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정세 판단은 여기까지.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응수해주기로 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 자네는 반계가 아닌가?”

“예……?”

“실은 내가 와룡선생을 찾아왔는데 안 보여서 말일세.”

“…….”

유형원의 볼이 살짝 흔들렸다.

눈동자도 흔들렸고.

그러니까 유효타였다.

싱긋 웃으면서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나저나 낙향한다더니 여기서 뭐 하나?”

“그것은…….”

“됐네. 한데, 진짜 와룡선생을 보지 못했나? 내가 그를 만나고자 이번으로 3번째인데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세.”

유형원은 멈칫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대로 나의 승리가 굳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현덕 선생을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지요. 그런데 그분은 오지 않고, 대감만 보이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역시 보통 새끼가 아니었다.

한 마디도 안 지고, 한 발자국도 안 물러선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밀리면 낙향 안 하고, 중대본에 결합해도 두고두고 피곤해진다.

무엇보다 내가 그러기가 싫었다.

“그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소설을 쓰려고 남은 게 아닌가?”

“소생이 말입니까? 하하하. 소생은 재주가 부족하여 글을 남기지 못합니다. 애를 써서 남길지라도 누군가가 아예 치워버린다고 해서 말입니다.”

가소롭다.

지금 누구에게 말장난을 거는 걸까.

나는 입가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세상은 이런 미소를 조소라고 부른다.

“아. 혹시 그 반계잡변 말인가?”

그 순간 유형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힘을 준 거 같았다.

제대로 유효타였다.

유형원의 동요를 즐기며 말을 더 이었다.

“참으로 잡스러운 내용이 담기지 않겠나? 불쏘시개의 역할은 아주 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소생은 역사에 자리가 없을 것으로 예정되어 가까운 분들을 만나서 담소나 나눴을 뿐입니다. 부안현으로 돌아가기 전에 혼자만의 추억이라도 가지려고요.”

혼자만의 추억이라.

그래. 나를 거하게 물 먹였으니 아주 즐거운 추억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새끼는 개새끼다.

개새끼가 여기 있다.

“소인은 아주 기억력이 좋습니다. 해서, 모두 담아 놓을 수밖에 없지요.”

“기억이 자주 왜곡되나 보군.”

“소생의 사정이겠지요. 그나저나 소생은 이제 식사할 생각입니다만. 종일 현덕 선생을 기다렸더니 허기가 밀려오는군요.”

“잠만 자면서 배도 고픈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대감께서는 조식을 거르십니까?”

“…….”

이건 후퇴.

나는 어물쩍 말을 돌렸다.

“나도 시장하군. 여기는 뭐가 맛이 좋나?”

“삼계탕이 괜찮습니다. 그러면 비켜주시겠습니까?”

“뭐……?”

“소생 따위가 어떻게 대감과 겸상하겠습니까. 아. 이런. 실언했군요. 소생이 비키겠습니다.”

“…….”

“하하하. 농이었습니다. 뭘 그렇게 눈을 부라리십니까?”

“혹시 반계탕 있나?”

“……그건 묘하게 기분이 나쁘군요.”

“자네 기분까지 내가 어찌 알겠나. 성현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셨거늘. 그리고 내가 많이 먹지 못하여 삼계탕의 절반인 반계탕을 먹겠다는데 왜 기분이 나쁜지는 전혀 알 수가 없군.”

“소생의 느낌으로는 와룡선생을 만나지는 못하실 거 같군요.”

이대로 낙향해버리겠다는 경고였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실은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는데 혹시 자네가 대신 답해줄 수 있겠는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개새끼로 추정되는 유형원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뿌리칠 수는 없다.

그건 서로가 원하지 않는 결론일 것이니까.

“뭐. 좋습니다. 소생도 현덕 선생을 더 기다리기가 어려우니 대감과 담소나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사실상 휴전협정 체결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혹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

유형원의 이마에 힘줄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졌다.

진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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